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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릉도원 김수형 Dec 19. 2022

노래를 잊은 요즈음

노래를 잊은 요즈음

2022


어른들은 웃음을 잊고 사는 것 같다는 유튜브를 보니, 하나 더 보태고 싶은 항목이 있다.

4~50년 전 옛날에 비하면 요즘 나는 노래가 적은 메마른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꾸라 사구라 요이 요이 요이 미나 핫떼 미나 소시 곡께이쇼 미사야 미사야 모모따로상” 

어린 시절 학교에서 가시나들이 둥글게 서서 손을 들었다 내렸다, 앞으로 뒤로 걸음을 옮기면서(원을 작게 크게 변화시키며) 부르던 노래다. 그 때는 당연히 일제의 잔재가 남아있었다(주: 위 가사는 발음이 부정확할 수 있음. 내가 커서 일본에 갔을 때, 이 노래를 부르면서 무슨 뜻이냐고 물어봤지만, 아는 사람을 못 만났다). 

“김~서방 들어오세요. 들어와서 인사하세요. 장깽이뽀, 잰는(진) 사람은 속히 속히 나가주세요”

“삼천리 강산에 새봄이 왔구나 농부는 밭을 갈고 한 판이요”

역시 여자 아이들이 줄넘기 하면서 부르던 노래다.

죽으로 연명하고, 고추를 들래놓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술래잡기든 메뚜기(자치기)하든 빨쭈(딱지)치기든, 우린 자주 공회당에 모여서 놀이도 하고, 노래도 하며 놀았다.


“일등병 이등병은 간빵(건빵) 도둑놈, 보기 좋은 하사는 색시 도둑놈”

“...만약에 가다가 엠피(MP 헌병)한테 걸리면... 오천X 비행장에 미군이 많대요”

이건 60년 전에 시집가기 전 고모가 수를 놓으며 부르던 노래인데, 일제시대를 벗어나면서, 그리고 6.25를 거치면서 부르던, 미군과 헌병에 관련된 노래도 있었다. 우리 동네에는 고모 또래 처녀들이 몇 있어서 가끔씩 우리 집에 와서 예쁜 수를 놓으면서 노래를 부르곤 했다. 옆에서 공부하면서 귀동냥으로 배운 거라 가사를 정확하게 외우진 못한다.


 동네 상사 때 상여를 메고 가면서도 상두꾼들이 노래를 합창했다,

 “너~화 너~화 어기넘차 너~화”

우리 할아버지는 상여를 이끄는 선소리꾼을 거의 도맡아 하셨는데, 그 때 할아버지가 하시던 그 ‘소리’는 어떤 것인지, 그 때 직접 들었지만 어려워서 외우지 못했으니, 할아버지 代에서 소리가 끊어지고 말았다.


“개구리 개굴 개굴 연못가에 개굴 개굴 개구리 열 두 형제 다 모여서 두 눈이 휘둥글 노래를 한다 개구리 개굴 개굴 노래를 한다”.

이 노래는 요즘 아이들도 부르는지 모르겠는데, 초등학교 학예회 때 동창 예식아들이 무대에서 합창하던 모습을 잊지 않고 있다. 에구. 정말 너무 귀여웠어. 이젠 다들 할머니 됐지만. 

초등학교 때 풍금치는 음악선생님은 2반 담임인 얼굴이 얽은 여선생이셨고, 가끔 1,2,3반이 합반해서 노래를 배웠다.


“저기에 돌이 어멍이 오네—중략--중국이와 돌이 어멍이”

동네 선배가 ‘봄처녀’ 노래가사를 고쳐서, 정신이 이상해진 ‘중국이’와 ‘돌이’ 어머니가 밥 얻으러 다니는 것을 놀리는 노래도 불렀다.

명절에는 동네 여자들 아랫방에 모셔 놓고 우리 머스마들이 ‘삼총사’ 연극을 만들어 보여주기도 했다. 연극에 노래 빠지면 되나? 

“우리 우리 삼총사 맹세를 합니다. 악골이를 잡을 것을 삼총사에게!”


중학교 때, 동네 형 하나가 하모니커를 참 잘 불어서, 그가 혓 바닥의 닿는 면적과 하모니커를 쥐고 한 데 모은 양손 바닥의 공기량을 조절하면서 연주하던 가락은 정말 너무 멋있었다. 그 형은 대체 어디서 그런 기술을 배웠는지 신기했다. 그 후에 나도, 어디서 구했는지 기억이 없지만 하모니카를 가지고 개울 가 팽구 나무에 올라 앉아 ‘삼국지’를 연주하곤 했다.

“도원에서 맺은 형제 관우 장비 유현덕...”

할아버지 할머니 슬하에서 소멕이러 안 가는 나는 아무런 걱정없이 컸는데, 한 여름 땡볕에서도 혼자 마당의 풀 다 뽑고, 뒷 거랑에 나가 땀을 씻고 팽구 나무에 올라 한 곡조 뽑으면, 더위는 하모니커 소리를 타고 멀리 개울물과 함께 흘러가곤 했다. 


좀 더 커서인가? 영화 ‘산유화’의 노래곡은 언제인지 불확실하지만, 아주 오래된 것 같은데, 아직도 머리에 박혀 있다. 외롭고 쓸쓸한 여인을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된다.


불러도 대답없는 님의 모습 찾아서 외로이 가는 길엔 낙엽이 날립니다

들국화 송이 송이 그리운 마음 바람은 말없구나 어드메 계시온지

거니는 발자욱은 자욱마다 넘치니 이 마음 그리움을 내 어이 전하리까


고등학교 들어가면서 유행가 노래를 익히는데, 주로 형에게서 들었다. 형은 무척 많은 레파토리가 있었다. “추우웅처엉도 아줌마아가~”

셋방살이 살아도 즐겁게 노래도 흥얼거렸다. 당시의 많은 노래는 형으로부터 들었고, 형 친구들이 태권도 유단자가 많고 놀기를 좋아한 덕분인지, 새 유행가가 나올 때마다 많이 들었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그리고 이성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나는 자주 삼척항 정라진 방파제 끝에 나가 노래를 불렀다. 공부하다가 심심하면 혼자 나가서 노래를 불러댔다. ‘충청도 아줌마’와는 다른 노래다. 중학교의 최혜자 음악 선생님과 전문학교의 이청배 음악 교수에게서 배운 고상한 명곡들을 불렀다.

“가시밭의 한 송이 흰~ 백합화 고요히 머리 숙여 홀로 피였네”.

이 노래를 부를 때는 어딘가에 꼭 다소곳한 여학생이 옆에 있는 것 같은 생각을 가지고 불렀고, ‘Oh Solemio'와 같은 노래는 파도 소리를 이길 듯 우렁차게 불렀다.

“오 맑은 햇빛 너 참 아름답다. 폭풍우 지난 후 너 더욱 찬란해”

독일어를 배우면서 독일 노래도 잘 불렀다.

“자 아인 크나베 아인 레슈라인 쉬텐 레슈라인 아우프 데어 하이덴 바르소 융 운트 모르겐 셴”.

(웬 아이가 보았네. 들에 핀 장미화…)

웅변으로 단련된 내 목소리는 저음에서 고음까지 잘도 넘어갔다. 집에서 사글세 빨리 안 낸다고 주인 아주머니하고 우리 어머이하고 싸움이 벌어져 있으면, 나는 듣기 싫으니, 방파제에 나가 파도에 대고 소리질러 노래했다.


취직해서 부산의 하숙집에 있을 때, 하숙방에서 한번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근 한 시간 이상소리내어 냅다 불러제켰다. “총각, 인제 쫌 고마 부르모 안되겠나?”

시끄러워 몬 살겠다는데 우짜건노. 고마 그쳐야지. 그 때의 하숙집 맏 딸이 지금의 큰 처형이다.


30대에 주로 익힌 가요는 ‘니나노집’에서 식탁 두드리며 불렀다. 이십여 명이 단체로 야유회에 갈 때, 아예 저녁에 술 한 잔 할 집의 아가씨들을 데리고 같이 갔다. 저녁에 긴 식탁을 몇 개 붙여 놓고 주욱 둘러 앉아서 젓가락을 앉은뱅이 식탁 모서리에 두들기며 장단 맞춰 노래하는데, 남자들이 가사를 잘 모르거나 하면 아가씨들이 가사도 이어주고 흥을 잘 맞춰주었다. 

수저를 꽂은 소주병을 가랭이 사이에 끼워 넣고 소리가 요란하게 마구 흔들며 추는 춤도 나오고, 곱사 춤도 나오고, 손가락과 박수로 딱딱 소리가 나게 하며 장단을 맞추는 기발한 기술들이 나온다. 우린 신나게 니나노를 불렀다. 

좀 고급 손님들과는 ‘방석집’에 갔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시중드는 아가씨들 몇 명을 합석시키는데 니나노 장단에 소리질러 합창을 했다. 

트위스트도 유행했고….

언제부터 방석집이 슬금슬금 사라졌다. 여성들의 일자리가 는 덕분이겠지? 남자들에게 좋은 시절은 다 갔지 뭐.

룸 쌀롱에서도, 가라오케 노래방에서도, 마이크 들고 노래하거나 노래에 맞춰 흔들며 춤을 췄다. 몇 년 전까지도 저렴한 서민들의 노래방 출입을 많이 했다. 친구들의 노래는 레파토리가 거의 똑같다. 다들 한 50곡은 기본으로 휴대하고 다닌다. “내 18번을 왜 니가 불러?”라고 말하지만, 먼저 부르는 사람이 임자다. 가요는 우리 곁에 매우 깊숙하게 들어와 있었다.

그런데 요새는 코로나 때문에 노래방에 못간 탓도 있거니와, 새로운 노래를 많이 배우지 못한다. 겨우 아는 게 ‘안동역’이나 겨우 몇 구절 따라 부를 정도다. 

속도가 빠른 ‘랩’ 때문인가? 아이돌 때문인지, 걸그룹 때문인지…. 대신 나는 손녀가 추는 걸그룹 춤을 따라 흉내를 내기도 한다. 손녀의 유연한 몸놀림과 나의 지독한 몸치가 추는 춤 장면. 아내가 동영상을 찍은 걸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친구 봉선의 말이 일리가 있다. “BTS가 k-pop 세계 1위를 해도, 블랙 핑크가 1위를 해도, 우리가 아는 노래는 하나도 없다”네. 참말 그렇네. 그나마 코로나로 방콕하는 동안 ‘미스 트롯’ 프로가 즐거움을 주었다. 그런데도 1등한 가수들의 노래도 한 곡 모른다. 이러다 가요의 맥도 끊길 일은 없겠지?

아내의 코에서도 노래를 들은 지 오래되었다. 어쩌다가 아내가 부엌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릴 때, 그날 밤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나 같은 숫사자들은 소리없이 기면서(?), 설걷이에다 커피 타주기 등, 눈물겨운 노력을 해야 하는 요즘이다.

아아! 천진난만하며 순진무구하고 명랑 발랄했던 나에게서 이제는 저 멀리 멀어지는 노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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