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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릉도원 김수형 Dec 20. 2022

채란일기(採蘭日記)

채란일기(採蘭日記)

1990.1.14


일요일 아침은 피곤하다. 한 주일 내내 쌓인 피로도 있고, 괜히 일요일이기 때문에 더 피로한 것 같기도 하여 느즈막한 시간에 아침을 먹고 베란다의 난에 물을 주었다. 녀석들이 웃는 것만 같다. 기분이 좋다.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蘭이니 얼마나 영특하면 그런 소리가 다 나올까 모르겠다.

 작은 쌕을 둘러메고 산차림으로 혼자 터덜터덜 집을 나섰다. 어디 마실 거라도 좀 사갈까 하다가 그냥 가게를 지나쳐 버렸다. 일찍 돌아올 거라 생각하고.

 난은 역시 영명한 식물인가, 추운 계곡이나 찬바람 부는 음지엔 살지 않는다. 따뜻하기만 하면 잘 자란다. 이제 손을 들어 이마에 대고 햇빛을 가린 후 앞을 바라보면 저기는 난이 있고 이쪽은 난이 없겠다 싶은 생각을 하고서 그 쪽을 가보면 정말로 생각대로 있을 곳에 있고 없을 곳에 없다.

서서히 도사가 되는가 보다. 후훗. 산세와 지세와 수세를 보고서 풍치를 논한다 했거늘, 나도 점점 도를 트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옛 노인들은 정말로 대단하다. 난이 많이 있는 곳에 무덤을 잡고 있다. 거꾸로 무덤이 있는 곳에 난이 있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역시 그만큼 따뜻한 곳에 무덤도 난도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혼자서 무덤가에 앉아 山勢를 감상하노라면 나도 부모님 돌아가시면 이런 곳에 모셨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가 문득 홀로 외로움을 느낀다.

누가 이 세상에 나와 같이 있는가? 나는 혼자인 것을. 그리고 무덤 봉분에 굵직한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을 보면 저 무덤의 자손은 얼마나 못나서 저 모양인가 싶다가도, 세월이 흘러 자손의 번창함도 쇠진하여 멸문의 날이 오기도 하는 법이니, 역시 인간은 흙이 되어 저 나무뿌리에 썩은 몸이 거름되어 양분을 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조상 묘에 반듯하게 묘석을 세우고 주위 나무를 베고 묘지로 올라오는 길을 널직하게 닦아 놓은 묘를 보아도 지금은 자손이 잘 살아 저렇게 한다 해도, 언젠가 그 자손의 자손 또 그 자손의 자손이 망하는 날엔 이 무덤도 굵은 나무 뿌리를 받치는 한갓 흙에 그치지 못하려니….

이 세상에 살아있을 적에 사나이로 살다 가야 하는 것, 자식은 무엇이며 손자는 무엇인가? 

죽으면 저 소나무 잎에 빨아 올려진 물기일 뿐 다시 깔비로 낙엽되어 그렇게 또 썩어가는 것을.

그러나 아직 덜 녹은 이 눈 속에서 꼿꼿이 잎을 세우고 있는 난을 보면 세상 풀들이 다 사그라든 겨울에도 기개를 보는 듯하고 사나이의 용기와 절개를 생각하게 한다.

수백 촉 난을 감상하며, 산을 타다 내려왔다. 금방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 생각보다 더 길어져 다섯 시간이 흘렀다. 언제든 음료수나 빵 등 간단한 음식을 휴대해야 하는데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서 가게를 그냥 지나쳤던 것이 후회스럽다.

허기진 배에 목마른 목을 하고 하산했다.

  

1990. 1. 20

일주일 간을 고대하여 겨우 토요일이 왔다. “퇴근하여 집에서 식사하지 않고 왜 회사에서 점심을 드느냐”는 동료들의 질문을 받으며 요기를 하고 퇴근시간을 기다려 혼자 걸어서 회사정문을 나섰다.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가 「깊은 골」로 들어섰다. 평소에는 억새가 우거진 저수지로 골이 좀 깊어서 깊은 골이라는 것 쯤으로 생각했는데 깊이 들어가도 끝이 없이 깊은 골이다.

 地勢를 살펴 일단 논둑길로 깊이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좌편 산허리를 타고 나오기로 했다. 송림이 우거지고 도토리 나무들이 띄엄띄엄 섞인 통풍 좋고 따뜻한 이 산줄기는 蘭의 寶庫임에 틀림없으리라 생각되었는데 정말로 많은 난이 自生하고 있었다.

반대편 산엔 아직도 많은 눈이 녹지 않은 채 쌓여 있는데 이 쪽은 따뜻해서 눈은 다 녹았으나 난 뿌리 쪽을 헤집으면 눈 녹은 물이 갈잎 썪은 냄새와 엉겨있다. 곰팡이 냄새 같은 난이 뿌리내린 독특한 분위기가 풍기는 냄새다. 이제 이 발효되는 냄새가 나는 좋아졌다.

 내 눈길을 줌 렌즈처럼 멀리 던졌다 가까이 던졌다 하면서 빠른 속도로 비탈 위 아래를 훑어 나갔다. 마치 써치 라이트를 비추듯 초록 형체만 보아도 눈이 머무는 그야말로 기찬 눈을 갖게 해주신 부모님이 고맙다.

가시덤불에 이리저리 할퀴어 온 종아리엔 상처투성이이고 바지는 몇 군데 올이 뜯겨 나갔다. 문득 눈을 들어 위를 보니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소나무들이 많이 우거진 곳에 불툭 불툭 바위가 박혀 있어 바위 위에 난이 있다면 그야말로 옛 동양화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일 것이라 여기면서 한 번 올라가 보기로 했다.

이게 웬일인가? 바위 위에 춘란이 자리잡고 있지 않은가!

여기도 저기도 또 저기도, 어라 저쪽도, 또 저쪽도…… 온 사방이 갈수록 난 밭인데 다음순간 더 놀라운 광경을 발견하고 말았다. 이 무슨 몹쓸 짓인지, 누군가 산을 아주 매어 놓은 것을 본 것이다. 호미로 밭을 매 듯, 산을 온통 매고 다니면서 새 촉은 왜 그리도 떼내버렸는지 난의 시체가 즐비하다. 

뿌리가 붙은 것은 다시 묻어주고 또 묻어 주면서 몹쓸 인간에게 욕을 퍼부으며 혀를 찼다. 서울사람이 동네에 나타나서 돈 주고 가마니로 사간다는 소리가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었던 것 같다.

 소나무 우거진 숲에 바위는 세월을 뿌리박고, 바위 위 춘란은 병풍 그림인 양 눈 속에 기개를 뻗쳤는데, 몹쓸 인간들은 황금에 눈이 어두워 이토록 처참하게 산을 일궜는가? 자생 춘란의 앞날이 훤히 내다 보였다.

나는 춘란을 채집한다고 다니며 이 자연을 훼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가슴 깊이 생각해 보고는 단 한 뿌리도 채집하지 못한 채 맥이 빠져 돌아왔다.


1990.1. 21

베란다에 있던 춘란이 좀이 쑤셨는지 겨울을 참지 못하고 씌어준 봉지를 머리에 이고 쭈욱 쭉 꽃대를 뻗더니 어랍쇼 그냥 꽃을 피우고 말았다. 코를 가까이해서 향기를 맡으면서 사람의 향기를 생각해 보았다. 이토록 그윽한 蘭香은 이 세상 어느 아름다운 女人의 냄새보다도 더 좋은 것 같다. 진하지 않고 독하지 않고 은은하고 없는 것 같으면서도 또렷한 난의 향기란 어떤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보다 더 좋은 향기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생각하니 말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난보다는, 말도 하고 울기도 하고 움직이기도 하는 사람의 향기가 아니겠나 생각되었다. 

같이 있을 때는 잘 몰랐어도 떨어져 있으면 더 절실해지는 인간의 향기, 시기하지 않고 감싸주고 손해 볼 줄 알고 그러한 향기가 오래간다. 제아무리 똑똑하고, 제아무리 재주가 좋다 하나 그윽한 향기가 나지 않는 사람은 오래 기억되지 않는다. 

똑똑하면 독한 냄새가 날 것이고, 잔재주가 좋으면 진한 냄새가, 모질면 역겨운 냄새가 풍길 뿐이다. 나는 그래도 어떤 냄새가 좋은 지 분별할 수 있으니 좋기는 한데, 그런데 과연 나에게서 나는 냄새는 진할까? 독할까? 역겨울까?

언제나 밑지기 싫어했고 손톱만큼도 손해보기 싫어했고 조바심에 참을 줄 몰랐고….

蘭香을 맡으면 想念에 잠긴다. 한 철 꽃필 때만 풍기는 난향보다 팔십 평생 그윽한 향기를 내는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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