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릉도원 김수형 Dec 21. 2022

주왕산 여행기

주왕산 여행기

2011


경북 청송의 주왕산(朱王山)에는 두세 번 가 봤지만, 갈 때마다 나를 뭔가에 골몰하게 만드는 것은 언젠가 한국서부발전 초대 홍문신 사장님께서 작가의 솜씨에 대해 들려주신 말씀 때문이다. 

“‘돌에 들어 있는 사람을 오롯이 꺼내 놓은 듯한 돌 조각’처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어느 유명인의 말을 인용한 말씀인데, 그 표현이 너무 높은 경지에 있으니, 나는 어떻게 그런 곳에 오를 수 있을지, 특히나 홍사장님의 주왕산 수필 ‘돌의 미학(美學)’을 읽고 내 기가 더 죽었다.


주왕산은 먼 발치부터 돌의 잔치다. 초입에 늘어선 한 무더기 암벽군(群)은 기암봉이다. 미구에 학소대를 지나면 형형색색의 모양으로 괴석들이 도열하여 우리를 놀라게 한다. 제1폭포에 이르러 장엄한 괴석미는 절정에 달한다. 수백 척의 괴석이 병풍처럼 들러서 있다. 겸재의 총석정도(圖)에 나오는 괴석기둥이 장대처럼 하늘로 치솟아 있다. 대단한 괴석의 열병식이다. 


 ‘돌의 잔치’, ‘괴석미’, ‘병풍’, ‘열병식’들은 잘 깎아 야물게 생긴 하얀 참밤같은 시어다. 

 어금니로 씹으면 오독오독 씹히는 참밤. 아무래도 그런 분들의 시각(詩覺)을 따라가기 힘든 나로서는 아예 추종을 포기하고, “사진이라도 어떻게 잘 한 번 찍어 봐야 겠는데…” 하는 생각을 가지고, 남다른 촬영의 시각(視角)을 가지려 애쓰면서도, 남들이 보는 각도는 어떤지 궁금해하면서, 나도 카메라를 들이대 보기도 한다. 

나름 각도를 바꾸고, 방향도 바꾸고, 촬영 시각(時刻)을 바꾸고, 셧터 속도인 시간도 바꾸고, 명암도 바꾸고…. 사람들은 주로 산 쪽으로 올라가면서 찍고, 내려올 때는 별로 안 찍는다. 하지만 사진은 여기에 노하우의 함정이 있다. 그 시차(時差)는 비록 한 시간에 불과하더라도, 큰 산에서의 아침나절은 안개나 구름, 햇살의 각도 차이가 색깔과 명암 등 사진의 차이를 확연하게 다르게 만든다.


2011년 11월 3일, 이미 가을이 겨울 쪽으로 많이 걸어가버린 날, 서부발전 후배 이충근 처장이 사업소장으로 근무하면서 나를 초청하여 강의를 한 청송양수발전소에 온 김에 주왕산에 들었다. 단풍잎이 많이 떨어져서 1주일만 빨리 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던 날 아침, 날씨는 희뿌연 안개 속에 해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산에 들어섰는데, 일단 서둘러 제1폭에 이르렀다.

역시 거석에 대한 내 시적 감각의 메마름을 절감하며 홍사장님의 표현대로 ‘괴석의 열병식’에 참석(?)하고는, 잠시 숨을 멈추고 앉아 올라오는 많은 관광객들을 바라보다가, 내려가려는 참에 문득 한 장면을 포착했다. 

뭔가 모르게 마음에 드는 한 장면. 그제사 계속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시각(時刻)과 시각(視角)의 차이로 시각(詩覺)을 달리해보려는 욕심을 가지면서, 머리 속에 떠오르는 시를 구상해 봤다. 그래. 내가 詩의 위인들을 멀찌감치 바라보는 위치지만, 일단은 좀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역심을 품은 걸까? 허허. 그 정도의 평가를 들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주왕산 제일폭


무지하게 큰 힘으로 물꼬를 터준 게야

잘 익은 청송사과 두 손으로 힘주어 가른듯

거대한 바위를 뽀갠듯한 틈새로

제일 폭포수 재잘거리며 흘러나가는 것이.



이 정도로 하자. 더 바라다가는 머리에 쥐나고 말겠지? 

내려가면서 올라오는 사람들의 얘기를 얼핏 들으니, 올라오는 방문객들마다 작가같은 생각을 품고 들어오네. 

“참 좋다. 다음에는 엄마도 한 번 모시고 와야지”

그만큼 풍경이 멋지다는 말이겠지.


*주왕산에는 슬픈 전설이 있다. 

옛 이름이 석병산인 주왕산에는 중국 주나라 왕의 전설이 서려 있다. 중국 당나라 때 주도라는 사람이 스스로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고 칭한 뒤 당나라의 도읍지였던 장안으로 쳐들어갔다가 크게 패한 뒤 쫓겨 다니다가 마지막 숨어든 곳이 이곳 주왕산이라 한다. 당나라에서는 주왕을 섬멸해달라고 신라에 요청했고, 신라에서는 마일성 장군의 5형제를 보내 주왕을 쳤다. –하략—[네이버 지식백과] 주왕의 전설이 서린 주왕산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진나라 주왕은 어떻게 이 먼 곳까지 피난을 오게 된 것일까? 마장군이 여기까지 와서 주왕을 끝까지 죽였어야 했을까? 참으로 순진한 마음을 가져보며, 올라갈 때와는 달리 날이 활짝 벗어져 본색을 드러낸 하늘, 기막힌 역광촬영을 하게 해주는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폭포수 흐르는 계곡을 따라 내려왔다.

마치 수만 마리의 나비 떼가 함께 춤추고 있는 듯한 나뭇가지 앞에서는 연신 셔터를 눌렀다. 역광사진의 아름다움이에 반해서.


대전사(大田寺)에 이르러 뒤를 돌아보니 아침에 들어올 때 안개에 가려 제대로 보지 못했던 주왕산을 대표하는 부처님 손바닥 같은 기암(旗岩)이 정말 장엄하게 우뚝 서 있다.   

어느 쪽에서 바라보아 깃발같이 보여서 기암이라 불렀는지 몰라도, 여기서 보는 모습은 영락없는 부처님 손바닥 모습이다. 주왕도 마장군도, 전설도, 꿈도, 시도, 문학도 다 흐르는 물처럼 그저 뜬구름처럼 덧없이 흘러가는 구나! 

거석 기암 틈새를 흘러나와 대전사 옆으로 흐르는 개울 양 쪽에 피는 수진달래. 수달래라고도 부르는 꽃은 주왕의 슬픔과 희망을 잃은 듯한 마음을 지닌 듯, ‘숨어 지내는 색’을 띈다.

 확 드러난 색깔이 아니다. 전설을 알고 나니 꽃에서 슬픔을 느낄 수 있어 마음도 슬퍼진다.



무심


시루봉과 학소대 사이로 무심히 흐르는 게곡수 양편에

그토록 부활을 꿈꾸던 제왕의 못다 이룬 색깔로 피는 수달래

모두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기암(旗岩)도 무심히 서있네.


작가의 이전글 내 詩를 몹시 좋아했던 여대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