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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릉도원 김수형 Dec 22. 2022

충청 서북부 여행 2022

충청 서북부 여행 2022

 

일정: 2022.10.30~11.3(4박5일)

참가: 이선종, 이순교, 심병섭, 김수형


보령시 고속버스 터미널 인근에서 친구들을 만나,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께서 왕건에게 나라를 양도하고 말년에 신하들과 여기에 오셔서 몇 년 간 사시던 대천시 궁촌리(宮村里)의 영양 돌솥밥집에서 점심 잘 먹고, 드디어 우리 네 사람의 세 번째 여행을 시작했다.

네 명 모두 초등 중등 동기 동창-정해생-둘째 아들로 태어난 것이 큰 인연이다. 삼척 말로 물출래, 십문 칠 친구들…. 원래부터 네 사람이 그렇게 발에 딱 맞은 건 아닌데, 삐져 나온 거는 자꾸 깎아내고, 거짓말 보태서 ‘신이 크면 발을 키우더라도’ 자꾸 맞춘 거지 뭐.

야호~~~~~!!!!!


[보령시] 성주사지

보령시를 안고 있는 큰 성주산(聖住山) 너머에는 저 유명한 성주사(聖住寺. 구 오합사(烏合寺) 터가 있다. 백제 법왕 때 초창(初創)되고, 신라 말 문성왕 때 중창된 이 절은 백제에서 일본에 불교문화를 전해주던 본사이며, 신라말기 선종구산(禪宗九山)의 하나였고, 고려 때는 불문에서 손꼽는 성주사인데, 애석하게도 임진왜란 때 왜놈들의 손에 의해 불타버렸다.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와 4기의 석탑이 외로이 사지(寺址)를 지키고 있지마는, 이곳이 바로 백제문화를 일본에 전해주던 사찰이다. 일본에 대한 한류의 본거지인 것이다.

그 역사적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임진왜란 때 왜군들도 이 절만큼은 파손하지 않으려 했지만, 승병 4만명이 군사훈련을 받는 승병 훈련소가 된 사찰을 그냥 둘 수 없어 불태워버렸다는 말이 전해지는 곳이다. 쌀씻은 뜨물이 서해바다로 흘러나갔다고 하니 규모가 짐작된다.

보령시 오천면의 선림사, 이곳 성주사 외에도 미산면의 백운사(白雲寺), 웅천면의 단원사(團圓寺) 등도 신라 때부터 고찰로 오늘까지도 옛날의 번성했던 이 지방의 불교문화를 말해주고 있다. 

문화가 어디 저 혼자 번성하는가? 다 사람 사는 곳에서….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예전으로 치면 국보 제8호. 신라의 대문장가인 최치원이 글을 지었다. 

이 때문에 이 절터 뒷 편에 최씨 문중에서 최치원을 기리는 장소를 따로 있다.

내가 1998년에 보령 땅을 떠났는데, 백제문화재 복원사업이 얼마나 이뤄졌는지는 모르지만, 성주사지는 그 때나 지금이나 24년 동안 바뀐 게 거의 없는 것 같아 참 서운했다.

 

[부여군] 무량사(無量寺) 

무량사 입구 단풍이 고와, 참 오랜만에 동무들이 어깨동무를 했다.

1950년 초 6.25 무렵의 무량사 흑백 사진을 친구 김봉선에게서 얻은 적이 있다. 종군기자 김이식 님의 사진으로, 당시에는 1,2층 추녀를 받치는 나무 기둥이 따로 없었다.

두 사진을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종군기자와 똑같은 자리를 찾아 촬영했다.

주지 스님이 출타 중이라서, 옛 사진은 공양간에 일하시는 아주머니에게 전달해드리고 왔다. 

흑백사에는 오른쪽 나무 가지가 잎도 무성하게 극락전 위쪽으로 뻗쳤는데, 그 세월 동안 가지가 없어져 현재 사진에는 나무 줄기에 상처가 남아있고, 예전 사진에는 없던 조명등 전주가 서있다.


무량사에 올 때마다 느끼는 마음이지만, 아름다운 조형미가 돋보이는 5층 석탑은 중후한 모습이다. 또한 2층 목조건물 극락전 내부 모습은 정교하고 아름답다. 이런 건축기술은 후대에도 계속 전수되어야 하는데….


무량사 5층탑 


아름다운 조형미가 참으로 돋보인다

중후하고 안정된 모습의 5층 석탑

기단의 크기에서 탑 꼭대기까지

비율을 맞춰 줄이며 올라간 모습이며,

층마다 조금씩 줄인 층간 높이며,

직선이 아닌 약간 볼록한 본체 선이 

배흘림 기둥과는 다른 예선(藝線)이다

무엇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수십 년 수백 년 변치 않는 저 탑의 색깔

희뿌연 돌 색이 아니고, 완연한 노리끼리함

누가 따라 낼 수 없는 은은한 노랑은 

‘너그러운 황혼의 여유’다


밖에서 보면 극락전 건물은 분명 2층이지만 내부도 2층인 것은 아니다. 안에는 위 아래 한 통으로, 엄청 큰 大佛을 안치하고 있다.


[보령시] 무창포 해수욕장


무창포 항구에 가서 해산물을 사다가 이를 요리해주는 곳에 가서 갑오징어 회랑, 지금 한참 제철인 쭈꾸미 샤부샤부 특산음식을 먹었다. 이런 싱싱한 멋을 어디서 부릴 수 있을까?

바다노을 펜션에서 1박했다. 우리의 여행 목적은, 좋은 경관을 감상하는 것도 있지마는, 이 나라 여기 저기 맛있는 토속음식을 즐기는 것도 하나의 목적이다.

펜션에서 편하게 자고 아침 식사는 병섭이 준비해 온 갈비탕과 ‘햇반’으로 느긋하게 즐겻다. 세상은 참 편리하게 발전했다.


오천성

남포 방조제를 거쳐서, 보령시 오천면 오천성(城)으로 향했다. 

성으로 가는 길은 내가 14년 간 출퇴근하던 길을 일부러 찾아서 갔는데, 주교면에서 발전소까지는 정말로 변한 게 없어서 모두가 낯익은 광경이었지만, 좀 냉정한 생각이 들었다. 

14년 동안 내 정열을 다 바쳐 모든 것을 걸었던 발전소, 그로써 나의 석탄화력 발전기술이 여물던 곳이고, 토정 이지함 선생님 묘소에서 정성스레 이 발전소가 안전하게 운영되게 해달라고 제를 올리던 곳이고, 1호기부터 6호기까지는 정말 구석구석 내 발이 안 밟힌 곳이 없을 정도로 돌아다녔던 곳인데, 밀려오는 냉정함은 왜일까?   

나의 세 아이들이 다닌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아이들에게는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보령…. 보령 땅 떠난 지 24년에 다시 찾은 이곳을 찾는 내게 스며드는 ‘나와는 무관한 약간 무관심함’은 무엇인지….


오천성에 오르니, 전에 없던 영보정(永保亭) 건물이 오천성곽 내부에 건축되어 참 반가웠다.

저 아치형 성문에서 대천 사협(寫協) 사람들 틈에 끼어 누드촬영을 하던 일도 떠오르고, 주말에 출근하여 회사를 한 바퀴 돌아보고, 여기와서 짜장면을 같이 먹던 박건복, 양진권 등 회사 후배들이 생각났다. 그 시절이 참 젊고 좋았는데….


고려 때 오천항에 군선(軍船)을 두어 바다를 지키게 하였고, 조선조에는 군사영(軍使營)을 두어 백여 척의 군선에 3천여명의 수군이 주둔했던 충청수영성(忠淸水營城)은 서해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위해 돌로 높이 쌓아 올린 석성이다. 조선 중종 4년(1509) 수군절도사 이장생(李長生)이 축성, 충청수영의 외곽을 두른 1,650m의 장대한 성으로 자라(鱉)모형의 지형을 이용 높은 곳에 치성(稚城) 또는 곡성을 두어 바다와 섬의 동정을 살폈고 해안방어의 요충지였다. 

사방에 4대 성문과 소서문을 두었고, 동헌을 비롯한 관아건물인 영보정(永保亭), 관덕정(觀德亭), 대섭루, 능허각, 고소대 등이 있었으나 허물어졌고, 서문 망화문과 건물로는 진휼청(賑恤廳), 장교청(將校廳), 공해관(控海館)이 보존되고 있다. 
  마침 영보정 편액과 정약용 선생이 쓴 ‘영보정연유기(永保亭宴游記)’ 현판은 내가 여기 살 때 함께 문화활동을 하던 전 예총 보령지부장 백강 임기석 님의 글씨라서 더욱 더욱 반가웠다.


영보정에서 내다보는 북쪽 작은 항구가 도미항

삼국시대 백제 땅에 ‘도미’의 부인 ‘아랑’이 경성지색(傾城之色)으로 아름다워 호색(好色) 임금인 ‘여경’이 탐을 냈는데, 뜻대로 할 수 없자 그 남편인 도미의 두 눈을 뽑아 장님으로 만들어 강에 버렸다. 

시종으로 하여금 여경의 탐욕을 대신 채우게 하는 등 그의 마수를 피하던 아랑은 기어이 장님 남편을 찾아내어 함께 고구려로 들어가 살았다.

“얼굴이 예뻐서 남편을 장님으로 만들었으니 이 잘난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니겠으랴...” 

아랑은 갈대를 꺾어 스스로 얼굴에 마구 흠집을 내어 추녀로 만든다.

이러한 아랑의 정절에 감복하여 하늘이 그들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주게 되고 부부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게 된다. 


이런 줄거리의 도미부인 이야기는 실제로 삼국사기에 적혀있다. 뮤지컬 ‘명성황후’가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히트칠 때 크게 명성을 얻은 윤호진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명성황후는 오픈게임이다. 몇 년 후 메인 게임을 만들겠다. 그것은 도미부인 이야기다”

그 때 윤감독은 또 이렇게 말했다. 

“도미부인 뮤지컬의 클라이맥스는 아랑이 억센 갈대를 꺾어 자기 얼굴에 상처를 내는 장면이 될 것이다”.

그 약속대로 도미부인 뮤지컬을 만들었는데 결과는 흥행 참패였다. 그는 조금씩 다른 몇 가지로 전해지는 도미부인 이야기를 자의로 독특하게 꾸며서 뮤지컬을 만들었으나, 현대인들의 성(性) 문화와는 맞지 않았던 건지…. 


보령시 오천항에 왔으니 특산품 먹거리인 간재미(강개미) 회를 먹고 가야지. 성에서 남쪽으로 형성된 시가지 중 길 오른쪽편은 바다를 메워서 새로 조성하였더라. 관광객이 많은 곳의 변화가 보였다.

이윽고 보령시 대천항과 원산도 사이를 잇는 ‘보령해저터널’을 지나 ‘원산안면대교’를 거쳐 안면도 영목 항구에 도달. 해저터널은 제일 깊은 곳이 해저 80m이고, 총 길이는 길이 약 7km로, 전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길다.

 대교를 건너면서 천수만 저 건너에 보이는 보령화력 본부와 신보령화력본부를 촬영했다. 달리는 승용차 안에서 대충 찍었지만 화소수가 워낙 많고 카메라 기술이 발달하여 사진이 참 잘 나왔다.


 천수만을 바라볼 때면 언제나 천수만 북쪽의 서산 A, B지구 방조제를 생각한다.

정주영 회장의 유조선 물막이로 유명한 서산 A, B지구 방조제 건설 전의 천수만 조류는 시속 10노트(약 18km/h)였다. 이것이 후에 딱 절반으로 줄어들었으니, 전체 수량의 절반이 방조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식량이 부족해서 그곳을 논을 만들었지마는, 그 때 한 수만 더 앞을 내다보아 그곳에 논 대신 조력발전소를 건설했다면, 국가 전력에너지 공급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을까! 요즘처럼 쌀이 남아돌아가서 세금으로 비싼 값에 수매를 하는 일을 볼 때도 내가 다 후회스럽다.   


   태안군 [장삼포 해수욕장]

 내가 태안에서 산 것도 5년이나 되어, 틈나면 서른 개 해수욕장을 두루 섭렵했는데, 장삼포 해수욕장은 특히 멀리 바라보이는 풍경이 수묵화 같고-아담하고-조용하고-바닷물결에 반사되는 햇살이 반짝이는 곳으로, 늙어서 편안하게 노후를 보내기에 딱 좋은 곳으로 생각했던 곳이다. 

이번에 다시 찾으니 이곳도 역시 변한 게 없어서 왠지 좀 마음이 짠했다.


 태안군 안면읍 꽃지 해수욕장에 들러 할미 할아비 바위를 구경하고, 백사장 항구에 가니 ‘대하랑 꽃게랑 인도교’가 새로 건설되어, ‘드르니항’으로 도보로 연결하게 되어 있었다. 장족의 발전이다. 백사장항은 안면도 대표 먹거리 터라서, 원체 많은 손님이 몰리는 곳이니 재정이 넉넉했으리라.


 태안군 [만리포 해수욕장]

유조선에서 나온 기름으로 백사장이 온통 기름투성이였던 만리포는 전국민의 정성과 손길로 일상을 찾은 지 오래인데, 낯선 조형물이 만리포 노래비 부근에 들어서 있었다. 이윽고 천리포 수목원, 천리포 백사장으로 해서 신두리 사구를 관람했다. 

 

태안군 [신두리 사구]

 우리나라 최대규모의 자연 모래언덕.

이어서 학의 날개를 편 듯한 학암포를 지나 태안발전본부 옆으로, 이원방조제를 지나 만대에 갔으나, 날씨가 뿌옇게 황사가 끼어 전망이 좋지 못해 유감이었다.

태안발전본부가 4호기만 건설되어 있고 5,6호기가 한창 건설될 때, 시운전반장-부처장-제1발전처장으로 근무한 태안 5년이 정말로 존재했던 건지, 나는 지금 남의 얘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무감각해졌으니 이게 무슨 일인가? 보령에서의 14년, 태안 5년. 이 시기 나는 기술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성숙기에 들었던 시간인데, 그토록 ‘내 발전소’라 믿고 휴일과 휴가를 모르고 산 보령과 태안 시절인데, 서부발전 퇴직 17년에 이제는 이게 내 공장이었는지 아닌지, 감각이 없어지다니, 이런 무감각한 냉정함은 어디서 오는 건가?

 현직에게 나라는 존재가 잊혀진다는 것은 자연현상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자연스런 이치인데, 지금 내가 애써 무관심한 듯 냉정한 것은, ‘어울리는 자리에 고운 모습으로’ 내가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암.


 태안군 [이종일 생가] 

태안군 원북면 출신인 옥파 이종일 선생 생가에 들러 국화 전시회도 구경하고, 옥파 선생을 기렸다. 이종일 선생은 일제강점기 때 정3품 중추원 의관이라는 높은 벼슬을 버리고 독립협회에 참여, 국권회복과 민중계몽을 위해 헌신한 인물. 1894년 보성학교 교장에 취임한 이래 경향 각지의 7개 학교장을 지내면서 교육사업에 전념하였고 1898년에는 한국최초의 한글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하였다.

또 3ㆍ1운동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직접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낭독하였다. 그 뒤 대한협회ㆍ자강회ㆍ조선국문연구회 등 구국단체를 조직하여 정신개조를 주장하고 근면ㆍ노력을 강조하였으며, 한글 맞춤법 연구에 이바지하였다. 

중요한 것은, 선생은 제2독립선언문인 ‘자주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 인쇄하다가 또 구금되어 옥고를 치렀다는 점. 세상에 누가 나라를 위해 이종일 선생님만큼 그렇게 자신을 희생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 국민은 이런 분을 잊으면 절대로 안 된다. 

요즘 세대의 말을 패러디한다면, “태어나보니 독립국가이더라”가 아닌 것이다. 

태안의 많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 같은데, 서울 종로구 ‘보성사터’(조계사 뒤)에는 이종일 선생의 또다른 동상이 서있어 그 부근 사무실로 출근하던 나는 반가워서 종종 선생님의 동상 앞에서 예를 올리며 묵념하곤 했다. 

태안에서 태어난 선생은 대한독립을 위해 그렇게 헌신하신 분인데, 끝내 오랜 주림 끝에 초가의 거적 위에서 생애를 마쳤다고 전한다. 가슴 아픈 일이다.


저녁식사는 태안의 토속음식으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알 꽉 찬 암 꽃게 찜에, 꽃게 간장 게장에, 장어 졸임에, 우럭포 찜에, 그리고 게국지. 거기에다 집에서 직접 기른 삶은 호박순, 빨간 상추, 하얀 상추, 머우, 청양고추, 아삭이 고추, 민들레 잎들을 하나하나 뜯으면서 쏟아 부은 ‘주인의 정이 담뿍 담긴’ 저녁상과 된장국이 곁들여진 아침식사로 태안의 토속음식을 제대로 맛보았다.

동행한 친구들이 다 좋아하였다.


[서산시] 해미읍성

해미는 1414년(태종 14)에 충청도 덕산으로부터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이 옮겨온 곳으로,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전한 1651년(효종 2)까지 군사적 거점이 되었던 곳이고, 해미읍성은 1491년(성종 22)에 축조되어 서해안 방어를 맡았던 곳이다.


 넓은 성안엔 동헌이 있고, 죄수들을 문초하던 곳도 있고, 민속촌같이 옛날 삶을 보여주는 곳도 있었는데, 무엇보다 천주교 성지로 이름난 곳이 이곳이다. 보령 오천면 갈뫼못 성지와 함께 해미읍성도 천주교 신자 박해의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큰 고욤나무 한 그루가 열매를 많이 달고 있었다. 저 열매는 서리를 맞은 다음 건포도처럼 검게 쪼들쪼들해져야 맛이 난다. 세상에는 교욤과 감처럼 절묘한 화합도 없다.


고욤


닭의 알 계란처럼, 

요것은 ‘감의 알’인가? 

비록 작은 고욤이지만

이 나무에 감나무를 접 붙여야

비로소 감나무가 되는 법.


그럼 감이 먼전 겨? 고욤이 먼전 겨?


부부도, 친구도, 알고 보면 

고욤과 감의 관계 같지 않을까?

서로 부족함을 메워주며 사는….


[서산시] 개심사(開心寺)

이윽고 해미읍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개심사로 향했다.

코끼리 중의 왕인 상왕산(象王山) 개심사는 654년(의자왕 14) 혜감(慧鑑)이 창건한 것으로, 처 음에는 개원사(開元寺)라 부르던 것이 개심사가 되었다. 

봄이면 겹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데, 특히 청벚꽃이 그 중에도 더 유명하다.

절로 오르는 산길 계단 옆으로 단풍이 꽉 들어차서 그 속을 걷는 기분 상쾌하고 즐거웠다.


개심(開心寺)


개심사는 문자 그대로

마음을 여는 절이다.


인간관계에서

마음을 열지 않은 관계란 

돈독하기 어렵다.


이나라 남북한도

동서(영호남)도

국힘과 민주당도

불교와 예수교도

마음을 열자. 활짝 열자.


 

개심사 연못 


못 중간을 가로지른 외나무 다리.

저 다리를 건너면서 

외로움을 느낄 건지, 아니면 마음을 열 건지, 

한 번 생각해보란다.


봄이면 개심사의 자랑인 ‘청벚꽃’ 피고 

연못에 갖은 꽃잎이 떨어지면 

그 풍경 자못 아름답다.

떨어진 꽃 잎의 처량함을 느낄 건지, 아님 마음을 열 건지,

결정하라! 결정하라! 결정하라!


서산시 [보원사지]


백제 사찰. 충남 서산시 사적 제316호.

3만평이 넘는 땅에 천여 명의 승려가 있었다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행하는 수륙대재가 유명하다. 수륙대제란, 국가를 위해 억울하게 희생된 원혼을 국가 차원에서 위무하는 불교 의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바다와 육지를 헤매고 있는 고혼을 위하여 나라에서 올리는 재.


보원사 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백제의 미소 마애삼존불’이 있다. 이 마애불은 뭐니뭐니 해도 삼존불이 확연하게 미소를 띤 표정이라는 점에서, ‘백제의 미소’라 부르고 있다.

 석공의 솜씨에 따라서, 돌에서도 이렇게 완연한 미소를 볼 수 있다니, 사람의 솜씨란 참으로 자로 잴 수 없는 무량함을 느낄 수 있다.

그래, 기왕에 웃는 표정을 지을 수 있는 동물인 인간으로 태어나, 저 불상처럼 얼굴에 미소를 짓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예산군] 수덕사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덕숭산 수덕사는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백제 위덕왕(威德王, 554~597) 재위 시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수덕사 경내 옛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와당은 백제시대 창건설을 방증할 수 있는 자료이다.

수덕사의 고려시대 유물로는 충렬왕 34년(1308)에 건축된 대웅전과 통일신라 말기 양식을 모방한 삼층석탑, 수덕사 출토 고려자기, 수덕사 출토 와당 등 있다. 임진왜란으로 대부분의 가람이 소실되었으나 수덕사 대웅전은 다행히 옛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다음백과).


이 대웅전은 굳이 화려한 채색 단청을 하지 않아도 이렇게 장엄한 고풍미를 보여준다.


[예산읍] 예당호 출렁다리


예산읍에서 한우 수육과 소머리 국밥으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참 맛있고도 저렴한 우리 토 속음식이다. 이어 우리나라 최대 호수인 예당저수지 출렁다리를 구경했다.


[아산시] 현충사

이순신 장군이 어릴 때 사시던 집이 현충사다. ‘충무문’ 한글 편액은 반갑게도 박정희 대통령 글씨이고, 장군의 집도 보았다. 이순신 장군이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임진왜란 때 일본 신민(臣民)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백일홍이 백일 동안 붉게 피다가 이제 꽃 다 떨어지고, 이 가을에 잎이 곱게 물들어 떨어진 모 습을 보니 우리들 모습같이 느껴졌다.


이쁘게 떨어지자


저 백일홍처럼 백살까지 붉게 꽃피다

저런 예쁜 색깔로 곱게 물들자

그리고는 말없이 조용히 떨어지자

마침 지나던 사람들이 사진 찍어주면 더 좋지만.


 모과나무에도 모과가 잔뜩 달렸다. 저 무거운 과일을 저토록 많이 달고도 버티는 나무가 대단하다 여겨졌다.


 모개처럼 익어서


잘 익은 모개

잘 생기지는 못 해도 둥글둥글 을매나 이뿌나

초딩 때의 박박머리같아

투박한 손으로나마 한 번 쓰다듬어주고 싶네

모개 삐져 말롸사 차로 마시면

고뿔도 떨어지는 모개처럼 익자 우리.

 

현충사 구경을 마치고 나오는데 주차장에 충무공의 친필 비석이 서 있었다.


必死即生 必生即死

필사즉생 필생즉사


우리도 이런 정신으로 후손 후배들을 가르치고

스스로 그렇게 살아야 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대체 뭣때매 사누? 어타 살낀데?


얼마 전 중앙일보 칼럼에 이런 글이 있었다.

“선생님에게 개인이 쓰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돈이 

생기면 뭘 하실래요?”

“사람들의 행동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꾸는 데 쓰겠어요.”

사람들의 행동을 바꾸겠다니. 그것도 돈(을 가지고 무언가로)으로 바꾸겠다니. 


당장의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사람들은 ‘현실을 바꾸겠다’는 꿈을 꾼다. 현실을 바꾸고 싶다는 것은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의 행동을 바꾸고 싶다는 말이다. 개혁가들의 과제는 결국 ‘사람들의 행동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문제로 수렴되곤 한다. 

그 엄청난 일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우리 친구들은 지금 ‘쓰기 어려울 정도로 돈이 많아서’ 놀러 다니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의 행동을 바꿀’ 큰 꿈을 꾸기도 어렵지마는, 저 세상으로 힝~해(서둘러) 갈 것도 아니고, 일단 고뱅이에 피가 돌 때에, 건전하게 우정을 다지면서, 산천경개도 즐기며, 살아온 인생의 가치를 더욱 굳건히 지키고, 많은 새로운 것을 배우고 생각한다.


3개 시, 3개 군을 돌면서 많은 것을 보고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었구나.

 집에 돌아오니 긴장감도 풀리고, 맥도 풀려서 파김치가 되었다. 여독(旅毒)이겠지?

 그래도 5일 동안 비운 가장(家長)의 자리 다시 찾아 역할을 해야지. 헛허!

 복닥거리는 이 세상살이, 찡개가매, 소잡아도 삐집고 들어가매, 부대끼매, 그러면서 또 힘을 내자.

 다음 여행이 기다리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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