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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릉도원 김수형 Dec 22. 2022

일본 여행기1

일본 여행기 1

   1979~1983년

 

下松市

하송시(下松市 Kudamastu 市)는 일본 역대 총리대신을 가장 많이 배출한 인재의 고장인 야마구치현(山口県)의 소도시(인구 약 5만)이나, 한전 보령화력발전소의 석탄하역기(Ship unloader)를 제작한 히타치 제작소의 카사도 공장(笠戶工場)이 있어, 나와 인연이 된 곳이며, 여기서  기술연수교육을 받던 중, 지방 역사학자들이 쓴 책에 특이한 기록이 있어 내 눈길을 끌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온조왕(溫祖王)의 형 비류가 건국한 비류백제가 일본을 세웠다”는 학설이 나온 것과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 같은 역사적인 사실이라 하겠다.

『주남지방역사물어 周南地方歷史物語』에 다음의 글이 있다.


“推古天皇 3年(595) 9月18日 靑柳補(지금의 下松市)의 老松에 큰 별이 내려앉아 7日 7夜間 빛났다. 3년 후 異國의 太子가 올 것을 守護하기 爲 하여 별이 降臨하였다는 예언에 따라 지명을 降松(Kudamastua)로 개칭한 것이 그 후 지금의 下松으로 쓰게 되었다.

그 異國의 太子는 다름아닌 백제왕 성명(聖名)의 셋째 아들 임성태자(臨聖太子)이고, 그가 이곳을 다스리게 되었고, 그 후손이 후에 이 땅을 지배한 호족(豪族)인 오오우찌씨(大內氏)라고 전해진다”


백제를 일본말로 ‘구다라(Kudara)’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이 깊은 이 下松市에는 지금도 「下松發祥地 七星降臨」이라고 크게 새긴 비석과 老松 한 그루 및 금륜사(金輪社)라는 신사(神社)가 시내 복판에 있는 작은 공원 안에 있다.

이 책은 또 이렇게 쓰고 있다.

“下松은 百濟津(Kudaratsu)에서 바뀐 말이라는 說도 유력하다” 

나는 어찌 한국과 이리 깊은 인연이 있는 곳에 연수교육을 받으러 온 것일까!



이등박문(伊藤博文) 생가

  1983年 2月 27日. 뜻 깊은 여행을 하였다.


하송시(下松市 구다마츠시)에 사는 한 젊은 일본인의 친절로 이 부근 지방을 두루 구경하다가, 이등박문의 생가에 닿게 된 것이다. 아마도 그가 작정하고 안내한 것 같기도 했다. 우리가 탄 소형 승용차가 겨우 들어갈 만한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니 자그마한 함석집이 나타났다. 

 ‘伊藤公 생가’라는 푯말을 세워두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 같은, 헛간 같이 지붕이 좀 높은 묘하게 생긴 옛집 빈 터에 마을 아낙 두 명이 아이들과 한가로운 한 때를 보내다가, 낯선 손님에게 눈길을 보내 주었다. 

이곳을 찾는 손님이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의아했다.


이날 일본지폐 1000엔짜리에 나오는 사진의 주인공, 한국을 꿀꺼덕 집어삼킨 영웅적인 정치가(?), 그 명성에 비해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것 같은 유적 관리에 가벼운 실망을 느낀 것이다.

그러나 기념관이 따로 있었다.

생가 옆에 잘 지은 기념관은 르네상스식 2층 건물로 그의 유물이 몇 점 보관되어 있었다. 

1000엔 지폐 제1호를 포함, 조선 통감시절의 예복이며, 이등박문에게 보낸 초대 조선총감 ‘寺內’(Terauchi)의 친필액자도 걸려 있었다.


 “하얼빈 역두에서 흉탄에 쓰러졌다”고 필기

된 그 유물관 안내서를 읽으면서, 고소함을 금치 못하였다. 나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니까.

식민지 지배자 통감을 저격해 죽인 안중근 의사는, 이 나라에서는 ‘일국의 영웅을 암살한 폭력배’로 표현되고, 우리는 ‘조국의 깡패를 쓰러뜨린 정신적 영웅’으로 받들고 있는 현실 아닌가?

거기에서는 왜정당시의 사람들은 감히 함부로 쳐다보지도 못했을, 그 위세가 가히 하늘을 찔렀을 그의 예복은 60여년의 세월속에 전시관 안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좀’에 파먹히고 있었다.


*2022년. 다음백과. 이토 히로부미.

이토는 메이지 유신 이후에 정부의 요직을 거쳤으며, 일본 메이지 헌법의 기초를 마련하고, 초대, 제5대, 제7대, 제10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아시아 진출과 조선

의 식민지화를 주도했으며, 일본의 근대화에 기여한 인물이다. 1909년 10월 26일에 중국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에게 저격당해 사망했다. 



날개 없는 비행기


  제2次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 천황이 항복을 발표하던 순간.

파나마 운하를 폭격하기 위하여 3대의 폭격기를 싣고 항진하고 있던 일본잠수함 한 척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남북 아메리카 대륙의 한 가운데 통로인 파나마 운하를 폭격해서 뭉개버림으로써 대서양 쪽 미국 군사력이 태평양 쪽으로 건너오는 시간을 길어지게 만들려는 작전임무를 띤 이 잠수함은, 천황의 항복성명 방송을 듣고, 이에 복종할 것이냐? 항명할 것이냐? 기로에서 헤매다, 결국 ‘명령으로 받아들이기로’ 선원들의 의견을 모아 결정했다.

잠수함에 실린 비행기 날개는 유압(油壓)을 이용하여 붙였다 뗐다 할 수 있기 때문에 비행직전에 잠수함 위에서 날개를 펴서 조립하고, 비행기 바퀴 부근에는 바퀴 대신에 두 개의 작은 배를 달고 있어서 비행기가 폭격임무를 수행하고 잠수함 쪽으로 되돌아와 물에 내려 앉으면, 잠수함이 수면위로 떠올라 다시 싣게 되는데, 그 때는 잠수함에 설치된 기중기로 들어 올려서 날개를 분해하여 다시 싣도록 설계되어 있다.

명령에 복종하기로 한 이상, 폭격임무를 포기하고 뱃머리를 일본으로 돌려 귀항하면서 세대의 비행기를 모두 물속에 쳐박아 넣는데, 날개를 붙이지 않은 채 엔진을 걸어 바다속에 수장시키고, 함장 이하 모든 수병들은, 죽기를 싫어하는 딱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치욕적인 항복을 택하느니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하고 자결하고 만다.


이상은 살아남은 그 水兵의 증언에 의해 방영된 NHK TV의 한 내용이다.

세계 지배를 꿈꾸던 日本은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에 이미 전투기, 잠수함, 항공모함 등 모든 전쟁병기를 자체 생산했다.

오늘의 거대한 중공업 회사들은 지금도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군수공장으로 변신할 수 있다. 이러한 기술은 그 대기업만의 힘으로는 절대 이뤄 질 수 없는 것으로 수많은 중소기업의 부품생산에 힘입는 것이다. 거리마다 골목마다 즐비한 일본의 중소기업들이 이를 증명해 준다.

국민총생산의 1%를 국방비로 사용하는 일본과, 국가 1年 총예산의 35%를 국방비로 사용하는 우리나라가 전쟁을 한다면 누가 이길 것인가? 어리석은 질문을 해 보기도 했다. 참으로 국민학교 1학년생같은 질문이지만, 날개 없는 비행기를 날려 동체 수장을 시킨 그들의 정신상태를 능가할 모진 마음가짐 없이는 “쪽바리”라고 놀려도 안 되고, 이길 수는 더욱 없다고 생각한다.



오사카(大阪)의 거지


  Nippon Conveyor주식회사 정문 옆, 내가 출근하는 길 옆의 작은 운동장 가 벤치에는 아침마다 한 사람의 노숙자 거지가 신문을 읽으면서 얻어온 아침 밥을 먹고 있었다.

신문을 읽는 거지!

문맹을 없앤 이 나라의 교육열이 오늘날의 부강의 초석이 되었으리라. 이 나라의 융성은 지식의 보편화로 달성되었다. 국가발전이 국민의 의식수준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일이라 하겠으며, 이 때문에 우리나라도 의식 개혁이니 인간 개조나 선진의식을 갖도록 스스로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출근하는 전철역 광장에는 ㅇㅇㅇ黨의 간판을 자동차에 치장하고, 몇 개의 스피커를 장착하여 시민들의 귀를 집중시키려는 일본 국회의원 선거운동이 한창이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좀체로 출마자들의 애원서린 호소를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고 바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지나던 시민 중 한 사람이 멈춰 서서 정견 발표를 듣고 있자, 그 후보 나으리는 몇 번이고 공손하게 절을 했다. 그 시민은 투표권도 없는 외국인인 바로 ‘나’ 였다.

일본시민들은 그 후보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굳이 서서 들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신문에서, 라디오에서, TV에서, 잡지에서, 그들은 필요한 정치 지식을 골고루 얻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무엇이 왜 좋은가, 그것은 이래 저래서 나쁘다는 둥 훌륭한 비판은 건강한 시민을 육성한다.

그것이 국민의식 수준의 제고다.

전동차 시간에 따라 모였다가 한 무리 차에 실려 직장으로 옮겨지는 중에도, 그들은 손에 쥔 책에서 신문에서, 그들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비판하기 힘든 세상사 대처법을 배우고 익히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아름다운 가슴을 내 놓은 포르노 배우의 선정적인 포스터가 유난히도 많이 붙어 있던 거리 오오사카의 아침은 바쁜 출근속에서도 한가로이 신문을 보면서 식사를 즐기고 있던 거지가 무척 사랑스러웠다. 이 나라 사람들도 거지는 보유하고 있으니까.


*2022년. 

이 글은 1982년에 썼는데, 40년이 흐른 지금은 한국 노숙자들도 글은 다 읽을 수 있다. 심지어 돈 통을 놓고 거리에 앉은 사람도 휴대폰을 보는 시대이고, 종이박스 수거인도 화물용 소형 자동차로 나르는 나라가 되었다.



한일합방 문서


한일 간에 크게 문제되었던 역사교과서 왜곡사건은 지금도 시정되지 않는 엄연한 분쟁거리다.

소련의 반체제작가 솔제니친은 그의 일본 잠행(?)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점잖게 일본을 꾸짖는다.


 “자기 억제야 말로 개인만이 아니라 민족이나 국가에 있어서도 최고의 원칙이다”.


일본은 강한 힘을 가졌을 때 그것을 억제하지 못하고 이웃나라를 군사적으로 정복하는데 그 힘을 투입하였다. 마카사(우리가 ‘맥아더’라고 부르는 미국 장군 이름의 일본식 발음)는 천황의 항복을 받으면서 무장해제를 시키던 순간 승리에 도취했을 테지만, 호랑이 새끼를 키우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일본이 미국의 핵우산 아래 무자비한 경제전쟁을 피도 눈물도 없이 승리로 이끌고 있는 비결은 90도로 꺾는 인사와, 편리하고 호기심 나게 만드는 자그마한 선물이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누가 부인하겠는가!

 잘못에 대한 반성은커녕 이를 은폐하려는 졸장부 나라에 대해서는 수많은 질타와 조목조목의 왜곡사실이 열거되었지만, 다음과 같은 교활한 왜곡사실은 다른 어느 조목보다 더 큰 왜곡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등박문과 함께 찍은 어린 황태자의 사진을 교과서에 싣고서 “한국 황태자가 일본 옷을 입고 있는 점에 유의하라”라고 써 놓은 대목 말이다. ‘침략’을 ‘진출’이라고 써놓았다고 그것을 고치라고 요구하는 것보다는 더 큰 왜곡임에 유의하여 그들을 대하여야 할 것이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삼천리 강산이 떠나갈 듯 노래 부른들, “‘그것은 내 땅”이라고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일본인들은 그 노래를 들을 때 콧방귀를 뀌겠다.

가락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고 가르치는 우리나라이지만, 임나(任那)가 신라와 백제를 신민(臣民)으로 삼았고, 임나는 일본이 세운 나라라고 가르치는 한, 대륙으로 침략하려는 욕심을 버리게 하지 못할 것이리라.

생전 처음, 일본에 와서, 일본책에 나온 한일합방문서 내용을 읽고, 무지하게 화가 났다.


 일한병합에 관한 조약(명치 43년 8월 29일 조약 제 4호)

 일본국 황제폐하와 한국황제폐하는 양국간이 특수히 친밀하게 지내고 상호행복을 증진하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기 위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하기로 하고 이에 양국간의 병합조약을 체결하도록 일본국 황제는 통감 寺內正穀을, 한국황제는 내각총리대신 李完用을 각기 전권위원으로 임명하여 합동협의 후 다음의 조약을 협정한다.


제1조 한국 황제폐하는 韓國全部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完全 그리고 영구히 일본국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의 사항을 수락하고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락한다.

제3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한국 황제폐하, 太황제폐하, 황태자전하와 그 후비 및 후예에게 각기 그 지위에 따라 상당하는 존칭, 위엄 및 명예를 향유하게 하고 保持하는데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

제4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 조 이외의 한국 황족과 그 후예에 대해서 상당의 명예 및 대우를 향유하게 하고 유지하는데 필요한 자금공여를 약속한다.

제5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훈공이 있는 韓人에게 영작을 주고 은금을 준다.

제6조 일본국 정부는 前記한 병합의 결과로서 모든 한국의 시설을 담임하고 동지(同地)에 시행하는 법규를 준수하는 한인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해 충분히 보호를 하고 또 복리증진을 꾀한다.

제7조 일본국정부는 성의 충실하게 신제도를 존중하는 韓人으로서 자격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한 한국에 있어서의 제국(帝國)관리로 등용한다.

제8조 본 조약은 일본국 황제폐하 및 한국 황제폐하의 재가를 얻어 공포한 날로부터 시행한다.

       위 증거로서 양 전권위원은 본 조약에 기명 조인한다.

       명치 43년 8월 22일 통감 자작   寺內 正穀 印

       隆熙 4년 8월 22일 내각총리대신 李 完 用  印


  이 조약문서는 국가 간에 맺어진 정당한(?) 조약으로서 효력을 발휘하므로 지금도 일본 외무성 금고안에 간직되어 있다는 것이다.



히로시마 평화공원

1982.11.30


히로시마에 ‘평화공원’을 만든 일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원자폭탄에 의한 일본 항복보다도, 다시는 전쟁을 하면 안 된다는 마음을 갖게 하기 보다도, 원자탄을 만든 자에 대한 저주와 증오가 앞서 있는 것 같다.

이 ‘평화기념관’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왜 그러한 전쟁이 있었는가를 알아야 하는 건데, 미국을 증오하는 마음부터 먼저 갖게 만드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원자폭탄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여기 있을 수 있었겠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원자탄에 의한 희생자보다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침략자의 군화발에 짓밟혀 죽었겠는가?

저들의 일본도(日本刀)에 찔리며, 찢기며, 공포와 기아 속에서 제나라, 제 이름도 가질 수 없고, 제 말도, 제 노래도, 제 글씨도, 제 문화, 제 민족, 제 역사도 모르며, 짓밟히고 노략질 당하고, 능욕당하며, 끝내 아부마저 해야 했던 한민족이었다.

마침내 그들은 ‘대동아전쟁’이라는, 정말로 누구나 공감하게 만든 꿈 같이 좋은 거짓 정책으로 조선인을 세뇌시켜, 가미가제(神風)특공대에서 목숨을 잃더라도 미군을 격퇴하려는 그 자살부대에서도 제일 쎄무시러운(억세고 다루기 힘든) 병사가 한국 출신이었다 하지 않은가!

안중근 의사 마저도 저 ‘대동아 공영’을 위해 격발했다는 식의 진술을 했다 하지 않은가.


일본인은 평화공원에서 평화를 갈망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보다 원폭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기 앞서, 전쟁책임에 대한 속죄부터 제대로 하고, 다시는 군국주의를 꿈꾸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원자탄보다 더 무서운 폭탄이 다음에는 도쿄와 오사카에 떨어질지도 모르니 말이다.



   구주(九州 규슈)


  九州는 일본 남쪽의 큰 섬으로 따뜻한 지방이며,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에 현해탄을 건너면 쉽게 교역이 가능하다. 

 구주에서는 오늘날에도 고대 우리 선조들이 건너 다니던 증표를 땅속에서도 보이고 있어, 옛 무덤이 발굴될 때마다 일본사람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까지도 놀라게 하고 있다.

 “일본문화의 원류는 한국”이라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나라로부터의 문화 외에도 또 다른 여러 방면에서 받아들인 문화들을 그들 나름대로의 고유의 일본문화로 승화시켜 오늘날 우리와 견주어 손색없는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아니, 다시 말하면, 그들은 우리보다 더 많은 문화재를, 더 정갈하게 관리하고 있고, 새로 자꾸 만들고 있다.


그들은 이집트 피라밋 면적의 두 배에 가까운 *세계 최대 무덤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을 가지고 있고, 하늘로 높이 솟아올라간 수많은 성(城)을 가지고 있고, 역사가 오래된 사찰도 부지기수이고, 새로 건축하는 웬만한 사찰은 규모가 대단히 크다.

九州에 있는 ‘야하다 제철소’는 현대의 문화재라 해도 과언이 아닐 대규모 공장이다. 전철역을 세 개나 지나야 끝이나는 어마어마하게 큰 이 공장은 일본을 세계최대의 철강 생산국으로 만드는 핵심 공장이었고, 그 중에는 1901年에 건립된 용광로가 있어, 우리의 포항제철이 1968년경 설립된 것과 약 70년 가까운 차이가 있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서글픔이 엄습했다.

 세계 최초의 철갑선을 만든 우리가, 100년 전에만 해도 그들을 가르쳐 주던 우리가…. 

임진왜란이며, 한일합방이며, 많은 수난과 수탈을 당하고, 좋은 것은 다 뺏기고, 천지에 바보처럼 동족끼리 남과 북으로 갈라져서 수백만 인명을 잃으면서 전쟁을 겪었는데, 6.25 때 이들은 또 이때를 놓칠세라 군수품 조달로 돈을 벌었다. 

일본의 철강생산능력은 년 1억톤인데, 포철 제품 200만톤이 일본으로 수출되자 이들은 입을 모아 “부메랑 효과를 두려워한다”고 했다.

삼천리 강토에 철도를 부설하고 많은 산물을 헐 값에 긁어가던 자들이 이제는 “한국을 개화시켰다”고 억지를 늘어놓고 있으니, 우리가 당시에 미개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를 식민지로 삼은 것은 한민족을 개화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지 않은가? 

많은 것을 한 번에 대량 수송하거나, 신속하게 군 부대가 이동하는 수단으로 부설한 것이 철도이니 말이다, 그런 식의 식민지배가 이어졌으면서도, 한국을 개화시켰다는 논리로 침략을 합리화하는 것은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야하다 제철소를 지나 일본에서도 대여섯 번째 크다는 야스카와(安川) 전기제작소에 도착하였다. 전철역 바로 가까이 위치한 安川電氣 본사 정문에는 일장기와 더불어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한국사람인 내가 온다고 저 야단으로 반가와 하는 줄 알았더니, 처음 오시는 손님에게 호감을 갖도록, 사원들이 분임토의를 하여 만든 아이디어라네! 그 얘기를 들으니 놀랍고 고마웠다.

회사 개요를 설명해 주던 사람들은 대체로 기술자 출신으로, 어떤 이는 “나의 아버지가 수풍(水豊)Dam 건설에 참여했다”는 둥 우리나라와 연관이 깊은 사람들이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한국을 다녀간 어느 기술자의 귀국보고서를 읽어보게 되었는데, 다음과 같이 소감을 붙이고 있었다.


*“가방을 사무실에 놓고 현장을 다녀오니 지갑이 없어지고 말았다. 한국에서 현금은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이 좋다는 교훈을 얻었다”.


공장견학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기 위해 역에 나왔을 때는 여러 명의 귀여운 여고생들이 차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검은 주름치마에 검은 저고리에 하얀 동정이 달린 것을 보니 한국사람임에 틀림없었다. 무척이나 반가웠지만 말을 걸 수 없었다. 동포이면서도 모른 체해야 하는 아픈 마음은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지!

같은 전차를 타고서도 줄곧 그 여학생들을 눈여겨보면서 동족의 타오르는 동포애를 금할 길 없었다. 전차가 움직이고 조금 지났을 때 창가에 큰 한글간판이 보여 황소 눈을 하고 바라보니 “어버이 김일성 수령동지 감사합니다”라는 조총련 계열 학교의 간판이 보였다. 이 학생들의 학교-조총련-민단-남과북-이데올로기-동포-동족 등 내 머리는 온통 복잡했다.

누가 이렇게 갈라놓았는가!

이들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았던들 미․소가 서로 한반도에 올라서진 않았을 것을.

누굴 원망해? 우리가 어리석지 않았다면 그렇게 안 되었을 텐데…

그렇다. 우리를 갈라놓은 원인제공자 일본에서 약간의 거리를 두고 앉은 저 학생들과 나처럼, 한편에는 태극기, 한편에는 조총련 학교와 그 문구가 있는 앞을 지나가는 전차속에는 사상이 전혀 다른 동족이 타고 있었다. 

우린 그렇게 그냥 가다가 그냥 헤어졌다.

그러니 철! 강철같이 뭉쳐야 한다! 


*2002년 현재

*민둥산 금성분의 중요성은 인류문명의 자산이자 중국과 일본의 역사 침략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기에 이 고분의 중요성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중요하다. 지금까지 금성분(전방후원분)은 일본에서 발생한 무덤이라고 주장을 하였으나 민둥산 고분으로 인하여 일본의 천황들은 백제인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게 된다.

한성 백제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전방후원분은 일본 보다 시대가 앞선 것으로 일본의 고대국가를 세운 천황은 모두 백제인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로서도 복원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일본의 인덕 천황능이 고분의 규모면에서 세계 최대로 알려져 있지만, 하남시 민둥산 고분은 길이가 680m로서 인덕천황릉 486m보다 훨씬 크다. 경제적 가치는 아파트 개발과는 비교가 되지 않으며,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로 국가적인 이익이 크다는 것도 상기해야 한다. 

---한종섭 역사·문화 신지식인(한성백제문화연구회장)


 *2022년 현재

1970년 전후하여 당시에는 현금을 도난당할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30~4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식탁 위에 휴대폰을 두어도 아무도 채어가지 않는 나라라고, 외국인들이 신기하게 여긴다. 


규슈 하숙집 할머니 

1983.3.12


부슬부슬 봄비인가 보다. 토요일 밤의 이 빗소리가 퍽 뭔가 그리워지게 한다. 

규슈의 엄청 크고 낡은 고가(古家) 이층에 홀로 자리잡은 내 하숙방은 춥고 썰렁하다. 이 하숙집은 값이 싸서 좋다. 우연히 알게 되어 들어왔는데, 주인 할머니는 67세. 다나카(田中) 요시에. 

같이 사는 가족 없이 혼자 살면서 무지하게 크고 썰렁한 2층 기와집에서, 나 말고도 몇 명의 하숙생을 뒷바라지를 해주며 사신다. 다른 하숙생들은 다 1층에 있고 나만 2층 다다미방에 있다.

이 할머니가 옛날 일정 때 한국의 충북 충주에서 18년 간 사셨단다. 한국사람들이 원수로 여기는 일본순사 나으리의 딸로 태어나, 18년 간 산 이 할머니는 일본보다는 한국의 모든 것이 더 좋다

고 하신다. 

내가 순사를 좋아할 리 없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자랐다는 할머니니까 나도 관심이 많았다.


할머니는 “충주에서 서울로 통하는 도로공사가 있어서 땅을 기부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를 의식하신 듯, “나쁜 짓 안 했어요”라고 말씀하셨다. 한국에 근무한 일본 순사가, 한국사람 기준으로, 나쁜 짓 안 했을 리 없지만, 난 이 할머니가 미운 마음은 없다.

할머니 친구가 가끔 놀러오시는데, ‘한국’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꼭 ‘조선’이라 부른다. 옛날 식민지의 추억으로 그러시나 하고 오해를 살만 했다.


규슈에는 왜정 때 한국에 살았던 사람들이 많다. 한국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그런 것도 있고, 오랜 옛날부터 규슈는 기술자가 많았던 탓도 있을 것 같다. 그 분들은 지금은 모두 70~80대에 들어섰고, 해방 40년이 다 되어 가지만 그들의 자녀에게서 기술을 배우러 내가 일본에 와 있는 것.

어느 날 할머니는 “뭘 먹고 싶으냐?”고 물어보시더니, 일부러 나를 데리고 재래시장에 가서 미역을 사다가 미역국을 끓여주셨다. 일본에서 먹어보는 한국 미역국. 맛은 좀 일본식이었지만 기분이 참 좋았다.

상인들에게 “한국 사람 왔다”고 나를 소개하시는 할머니는 마음이 무척 즐거우신 것 같았다. 한국과 인연이 깊고, 한국을 좋아하시는 할머니다. 



일본 3경(三景)

   1979년~1983

미야지마(宮島)

이곳은 내가 일본 3경을 처음 접한 곳이다.

1978년. 당시 해외여행은 꿈 같은 시절이었지. 영동화력 2호기 건설요원으로 연수교육을 받으러 간 것이 원자폭탄으로 유명한 히로시마 인근의 밥콕 히타치 구레(吳)공장. 그 때 구경한 곳이다. 宮島의 거대한 도리이(鳥居: 神社 입구에 세우는 하늘 天자 상징물)는 ‘일본인은 천손(天孫)’이라는 의미로 세우는 조형물로, 일본문화를 처음 접하면서 굉장히 충격을 받은 건축물이다. 

우리나라 왕릉의 홍살문과도 약간 닮은 점이 없지 않은데, 그런데 여기 도리이는 바다 속에 세워놓아서, 밀물이면 물 속에 다리가 잠기는 게 특징이다.


宮島 도리이의 그 밝고 환한 붉은 색깔에 먼저 놀랐고, 웅장한 규모와 균형미가 돋보이고, 조형미가 멋진 것에 두 번 놀라고, 상징성이 큰 것에 세 번 놀랐다. 

이로써 이후에도 나는 일본문화에 대해 계속 놀라게 되었다.

미야지마 도리이 사진은 우편엽서로 나와 있어서, 내가 첫 해외나들이에서 어린 내 아들에게 보낸 첫 외국 우편엽서가 되었다. 

그 수년 후에도 한 번 더 이곳을 관광한 적이 있었는데, 역시 이 도리이는 일본의 어떤 것보다 형상이 멋지고, 웅장하고, 구조가 특별하고, 더구나 나무로 만들었고, 수중에 잠기기도 하는 것이 매우 걸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츠시마(松島)

동경에서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센다이(仙台) 시에 있는 마츠시마(松島) 관광은, 함께 연수를 갔던 이O영, 양O삼, 최O환 선배님들과 동행이었다. 그 분들이 지도를 보시고 열차시각 등을 모두 조사하신 덕분에 우리 젊은 연수생들은 졸졸 따라다니며 구경한 곳이다.

이곳에서는 유람선을 타고 앞바다를 유람했는데, 센다이 화력발전소가 멀지 않은 곳에 보였다. 

바다 한 복판에 여기저기 자리잡은 ‘파도치는 형상의 바위’들은 내 혼자 생각에, 유명한 일본 명화인 가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의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라는 그림을 낳은 것이 아닌가 추측할 정도로, 바다에 서 있는 바위들이 파도에 깎인 모습이 파도를 똑 닮았다.

이제는 우리도 전국 해안에서 바다 양식을 하지만, 이곳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바다 양식을 하는 모습을 본 나는 선진 어업에 많이 놀랐다.


아마노 하시다테(天橋立).

이곳을 찾은 것은 1982년과 83년이 이어지는 겨울이었다.

당시 오오사카에 머물며 고정화력 시운전 요원으로 연수교육을 받던 나는, 열차를 타고 가서 이곳을 구경했는데, 이날 갑자기 눈이 얼마나 내리는지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광경을 눈으로 본 것은 아주 잠시뿐. 그야말로 마구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에 저 멋진 광경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눈 때문에 관광객은 아무도 그 자리에 오지 않았다.

 ‘하늘 다리’ 天橋立의 선경(仙境)을 감상하는 방법은, 저 경치가 내려다보이는 이곳에서, 경치를 뒤로 하고 서서, 상체를 구부려 양 다리 사이로, 거꾸로 내다보는 것이다.


바닷가에 자리잡은 일본3경을 모두 다 구경할 수 있었던 것은 한전에 다닌 덕분이었고, 그런 큰 행운을 누린 이도 많지 않을 것이고, 참으로 나에겐 추억이 깃든 일이다.

한전이여 For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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