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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릉도원 김수형 Dec 28. 2022

직업의식---‘프로선수 정신’으로 시작한다

직업의식--- ‘프로선수 정신’으로 시작한다

 

직장인은 입사하는 순간부터 아마추어가 아니다. 이 말의 뜻을 일찍 깨우쳤어야 하는데….

아마추어와 프로와의 경계선은 DMZ처럼 철조망 세워 존재하지는 않아도, 각오와 실행은 철조망보다 더 강해야 한다. 악착같이 해내야 하고, 경쟁을 피해도 안 되고, 멋진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 잘못하면 혼쭐도 나고 책임도 져야 한다. 누구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지 않고 느슨한 마음이면 ‘월급 도둑놈’이다. 직장은 장난이 아니다. 일은 진지하게 대하고, 처절하게 일해야 한다. 신입 때 그런 마음을 확고하게 가졌어야 했는데…

 

아버지의 한전 입사기념 선물

1967년에 한전에 취직하니, 가족들이 좋아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 때가 우리집이 끼니를 거르던 시절이라 더욱 더 기뻐했다. 마침 삼척화력발전소를 빤히 바라보는 ‘정라진’이라는 동네에 살던 때니, 주변에 발전소에 다니는 사람들이 좀 있어서, 한전 급여가 타 직장보다 많다고 잘 알려져, 사람들이 부러운 눈으로 축하해주었다.   

아버지는 언제 준비하셨는지, 보기에도 꽤 비쌀 것 같은 도장을 새겨서 선물로 주셨다. 선물을 마련할 처지가 아닌 데도 아버지는 “너는 앞으로 *도장을 찍을 일이 많이 생길 거야”라면서, 아들의 장래를 멀리 내다보시고 취직기념 선물을 주셨다.

아버지는 그렇게 아버지의 일을 하셨는데, 나는 취업을 하고도 학생시절의 치기를 아직 끊어내지 못하고, 껄렁껄렁한 태도로 회사에 다녔다. 역시 한전 취업이라는 것이 나를 들뜨게 만든 모양이었다. 다른 합격자 친구들은 발령받기 전에 발전소에 가서 실습을 받았는데, 나는 재건중학교 선생님 한다고 실습에 참여하지 않은 것부터 직장생활에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직장인이 되면 직장인으로서 할 일에 정신을 집중해야 할 일이지, 재건중학교가 다 뭔가? 중학교에 못 들어간 불쌍한 어린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보람도 있지만, 그건 아마추어다.


 “직장인이 된다는 것은 프로의 세계에 진입한 것이다”.


이런 생각을 그 때 하지 못한 철없음이 지금 무척 후회스럽다. 2주 동안 서울 연수원 교육을 받는 동안, 분명 ‘직장인의 자세’ 같은 것에 대해 좋은 말씀 많이 들었을 텐데, 그 후 고향인 삼척화력발전소에서 수습3개월을 받는 동안 농땡이를 많이 쳤다. 장난치고 놀던 학생 티를 벗지 못한 아마추어였다. 

수습 후 보직을 받고 교대근무를 하면서도 상사의 지시를 어기거나, 때로는 거부하기도 했고, 예절도 없이 함부로 까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부산화력 3,4호기 시운전 요원으로 쫓겨났다. 

“앗 뜨거워라!”. ‘조직의 쓴 맛’을 봤다. 

그 때, 다른 친구들은 안 그랬는데, 나는 왜 직장을 진지하게 대하지 못했는지, 인간이 왜 그렇게 진중하지 못했는지, 나도 정말 모르겠다. 그래서 부산화력 시운전 근무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성실하게 일했다. ‘된 변’ 본 거지. 그래 정신 바짝 차리고 내가 맡은 모든 기기를 걸레로 닦으며 근무시간에는 쉬지 않고 열심히 했다. 군대에 가서 또 정신적으로 많은 배움을 받았고, 우여곡절 끝에 다시 삼척발전소로 돌아가서도, 이어 여러 다른 발전소에 가서도 열심히 했다. 


선배님들의 아량 덕분에 탄 한전인상

그로부터 약 24년의 세월이 흘러, 1991년 12월 31일 부장 시절에, 한전 종무식에서 안병화 사장님으로부터 한전인상 대상(大賞)을 받았다. 

시상식 무대에 오르기 전에 강당에 앉아 있는데, 신입사원 때의 그 일을 포함해서 많은 일들이 지난 20여년 동안 저질렀던 많은 실수와 과오들과 함께 떠올랐다. 그 때마다 너그러이 용서해주신 회사, “그래 어디 한 번 놀아 봐라”는 듯 내가 하는 일을 적극 지원해주신 많은 상사분들, 그리고 일만 잔뜩 부려먹은 후배들에게, 고맙고-송구스럽고-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10년 후 한전은 분사(分社)하였고, 나는 한국서부발전 소속이 되었다. 분사되던 날, 그동안 너무나도 고마웠던 한국전력 본사 방향으로 100번 절을 했다. 

아이러니인가? 젊은 시절에 부산으로 날려간(?) 것은 운명이었던가? 거기서 인연이 되어 부부가 된 아내와 세 아이들, 그리고 형제자매, 부모님 봉양하고 거두게 해준 한전이 정말 고마웠기 때문이다.


직장인은 ‘프로’ 선수다. 

입사하는 순간부터 더 이상 아마추어도 아니고, 응석받이도  아니다. 쓸데없는 장난이나 쳐서는 안 되고, 뭘 모르면 안 된다. 내가 맡은 일을 쓱쓱 해내야 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 호락호락 도와줄 사람도 많지 않다. 게다가 늘 다른 사람, 다른 부서와 비교 평가받는 사람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직장내 피 터지는 경쟁에서, “이기느냐 지느냐?”의 문제보다는, “재직 중에 성심을 다해 일했느냐?”는 질문 앞에서, 적어도 부끄럽지 않게 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가 되어야 한다고는 했지만 그게 뭐 별 거야? 겸손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일하는 것이 프로 아니던가? 


나는 한전그룹 생활 38년을 늘 긴장 속에서 살았다. 주로 석탄화력발전소에 근무했으니, 교대근무 긴장감, 발전소 Trip을 막으려는 긴장감이었고, 문제점을 풀고, 문제점을 예방하고, 더 새로운 것을 구상하고, 더 효율적인 것을 찾아내고, 더 미래적인 것을 계획하려고, 더 잘하려고, 전사(戰士)와 같은 자세로 일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내 휘하의 사원들은 나보다 더 열심히 일하기를 요구했다.

한전인상 대상은 내게 한 직장인으로서 일생일대의 영예이자 멍에이기도 했다. 무거운 지구를 혼자 힘으로 떠받치고 있는 한전인상 동상(한전 구내 설치됨)처럼, 마치 “너와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침략의 무리들이 노리는 조국”이라는 군가처럼, 오지랖 넓은 마음으로 일했다.


아버지의 도장. 

아버지를 추억할 때마다 떠오른다. 미숙해서 엄청 혼나고 나서야 “앗 뜨거!”라 정신차린 ‘프로 직장인 의식’을 떠올린다. 

이처럼 이론은 훤히 아는데, 세 아이 직장에 들어갈 때 도장 하나 준비하지 못한 아빠이기도 하다. 미안하고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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