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3월 1일.
보령화력 1,2호기 효율과장 때. 문학을 좋아하는 직원 몇이 동아리 ‘글벗모임’을 만들어 ‘사락배’를 출간했다. 보령 발전소 준공 초기의 문제점들을 대부분 처리하고 정상화를 찾을 무렵이었다.
이 글은 보령화력발전소 글벗모임과 지방민들과 유대가 활발하던 시기에 썼던 것으로, 충청 서해안에 떡~하니 자리잡은 발전소에 대해 우리 직원과 주민들이 친숙한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쓴 것이다.
‘사락배’ 유래
士樂배(사락배)는 한국전력 보령화력발전소 직원들의 '글벗모임'에서 매분기 발간하는 문예지의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발전소 부근에 있는 마을 이름인 '사락배'에서 따왔습니다.
글씨로 쓸 때는 사락암으로 ‘바위岩’자를 쓰지만, 읽을 때는 암자가 '배' 자로 바뀌는데, 마침 바위가 배처럼 생긴 탓도 있지만, 아마도 "사락 바위 바위(岩)" 하다가 ‘배’로 준 것 같습니다.
保寧郡誌에는 ‘선비들이 즐기던 바위’라 소개되어 있습니다. 아니 이러한 적막한촌에 선비들이 모여서 즐겼다니 별로 믿기지 않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사락배’라는 이름이 붙여진 그 옛날로 가보면 그 뜻을 알게 됩니다.
이 마을 포구에는 太古적부터 서해바다의 조수가 밀려왔다가 몰려나가고 있었습니다. 마을 어귀에는 배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 하나 있어 곧잘 해동(海童)들의 놀이터가 되어 물이 들어올 때는 그 위에서 풍덩 다이빙을 했는가 하면, 학문을 연마한 선비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어 이 바위에 올라 시가(詩歌)를 읊조리는 유명한 바위가 되었습니다.
바위는 이처럼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모여들 만큼 절경(絶景)을 바라보는 곳에 자리 잡고 있었고, 주변 마을에는 이렇게 선비들이 많이 모여들 정도로 부유한 사람들이 살았고, 국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던 기관들이 많이 있던 번창한 곳이 보령이었지요.
중국 일본과 찬란했던 문화교류
서해바다 천수만이 시작되는 입구 바로 옆에 발전소가 있는 지역은 20미터가 넘는 수심을 가지고 있어 예로부터 아무리 큰 선박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데다가, 태안반도와 80여개의 섬들이 천연적인 방파제 역할을 해주고 있으므로 어떤 궂은 날씨에도 파도가 크게 치지 않는 그야말로 천혜의 항구조건을 갖고 있는데, 또 하나 태풍과 같은 천재(天災)가 없는 곳으로 유명하여 일찍부터 항구가 갖춰야할 삼박자를 고루 가진 지역입니다.
더하여 지리적으로는 중국과 가깝기 때문에 멀리 백제시대부터 당나라와 교역이 활발했고 일본과도 밀접한 거래를 텄던 중요한 항구가 이곳에 발달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士樂岩에서 매우 가까운 오천 항구입니다. 자연적으로, 이 부근은 상선이 많이 드나드는 무역항으로 발전하는데, 어부들이 이따금 건져 올리는, 그리고 무척 많이 바다에 묻혀 있다는 도자기 소문이 바로 활발했던 옛날의 상거래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항구도시를 더욱 크게 번창시키도록 불을 붙인 것이 바로 불교문화의 유통관문(流通關門) 노릇을 이곳 항구가 수행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 고대문화는 바로 불교문화라고 하여 과언이 아닐진대, 불교문화가 일찍부터 이 지역에서 크게 꽃피웠다는 사실은 그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문화가 융성했다는 것은 많은 사람이 살았다는 것이고, 물자의 왕래와, 학문과 정치가 발달했다는 것을 뜻하지요. 여기에는 자연 주민보호를 위한 군사시설이 들어오게 되지요. 문화란 어디서 훌쩍 혼자 건너뛰어 올 수는 없는 법으로, 이곳에는 사람이 많이 살았고, 또 학문과 새로운 기술과 정보가 번지는 큰 중심지였던 것입니다.
사락 바위에서 산 하나를 넘으면 바로 오천 항구이고, 이 항구에서 아주 가까운 곳 소성리에는 신라 진평왕9년(AD 590년)에 창건된 선림사(禪林寺)가 있는데, 이곳이 불교문화가 전래되는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찰입니다. 당나라에 왕래하는 승려들이 바로 이 절에서 묵어가며 배편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또, 지금의 보령시를 안고 있는 큰 성주산(聖住山) 너머에는 저 유명한 성주사(聖住寺. 구 오합사(烏合寺) 가 있습니다. 백제 법왕 때 초창(初創)되고, 신라 말 문성왕 때 중창(重創)된 이 절은 백제에서 일본에 불교문화를 전해주던 본사이며, 신라말기 선종구산(禪宗九山)의 하나였고, 고려 때는 불문(佛門)에서 손꼽는 성주사인데, 애석하게도 임진왜란 때 왜놈들의 손에 의해 그만 불타버렸습니다. 지금은 국보 제8호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와 4기의 석탑이 외로이 사지(寺址)를 지키고 있지마는, 이곳이 바로 백제문화를 일본에 전해주던 사찰입니다. 요즘 말하는 한류의 본거지이지요.
그 역사적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임진왜란 때 왜군들도 이 절만큼은 파손하지 않으려 했지만, 승병 4만명이 군사훈련을 받는 승병 훈련소가 된 사찰을 그냥 둘 수 없어 불태워버렸다는 말이 전해지는 곳입니다.
이렇게 선림사, 성주사 외에도 보령군 미산면의 백운사(白雲寺), 웅천면의 단원사(團圓寺) 등도 신라 때부터의 고찰로 오늘까지도 옛날의 번성했던 이 지방의 불교문화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옛 문화가 불교에 영향을 받은 바 매우 큰 것이 사실이고, 이것이 당나라로부터 전래되는 관문으로서 이 지방이 그 역할을 수행했으며, 백제에 문화를 전수하던 곳이라면, 우리 발전인들이 일하고 있는 보령화력 이 땅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진 곳이었던가 짐작하고도 남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보령은 군사 요충지
하나 더 덧붙일 것은 이미 백제 말기부터 신라에 이르기까지 수시로 침범하는 왜구들을 쳐부수기 위해 보령 남쪽의 남포읍성이 일찍부터 중요역할을 했는데, 고려 32대 우왕 6년에는 왜구들의 대대적인 침범으로 백성들이 얼마나 놀랬는지 무려 10년간 이곳에 사람이 살지 않았다 하니, 왜구의 난폭성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말 공양왕 2년(1390년)에 전라 충청지역에 들끓는 왜구를 소탕하기 위하여 왜적과 싸우는 군대인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의 최고 책임자인 도만호 김성우(都萬戶 金成雨)장군은 왕명을 받고 초토사(招討使)가 되어 고만(古灣)에 수군 본영을 설치합니다. 金장군은 지금의 대천 어항에서부터 시작하여 흑포, 무창포, 마량리, 장항부근 금강포구, 청라 벌판 등에서 왜구를 소탕 섬멸하였습니다. 본영이 주든했던 고만이라는 곳이 바로 지금의 보령화력발전소 진입로 왼쪽에 있는 주포면 고정리의 ‘고만’ 어촌인 것입니다.
*2022년 현재
고만은 어선 왕래를 위한 수로만 남기고 20여년 전부터 발전소 회처리장으로 바뀌었다. 머지않아 육지로 될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 태조께서 남포에 성을 쌓고 병마사(兵馬使)를 두었으니, 지리적으로 이 지방의 중요성을 짐작케 합니다. 그 후 임진왜란 때 역시 왜구에 의해 성은 허물어지고 거석 잔해만 남았습니다.
이처럼 보령은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했는데, 발전소 인근 지역 또한 매우 큰 해군기지가 있었습니다. 고려 때 오천항에 군선(軍船)을 두어 바다를 지키게 하였고, 조선조에는 군사영(軍使營)을 두어 백여 척의 군선에 3천여명의 수군이 주둔했다 하니 이곳의 번창함이 짐작됩니다.
*2022년 현재 오천성
수년 전에 영보정(永保亭) 건물이 성내 높은 곳에 새로이 재건되었다.
만세보령
이상을 정리한다면, 사락배가 있는 발전소 부근 지역은 외국과 무역을 하던 큰 항구도시였고, 중국과 교류하던 불교문화의 관문인 문화도시였는가 하면, 일본에 백제문화를 전해주던 성주사를 가진 고을입니다. 거기에 군사의 요충인 군사도시를 겸하였다는 결론이 됩니다.
그러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왜구는 왜 천년 이상 이 지방을 계속해서 노략질의 대상으로 집요하게 공격했을까요?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이 지방에는 갖고 싶은 좋은 물건과 먹고 싶은 좋은 음식, 뺏고 싶은 좋은 문화가 언제나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윤택하여 기름이 흐르는 이 지방에는 자연스레 ‘만세보령 萬世保寧’이라는 하나의 멋진 어휘가 탄생합니다.
결국 결론은 하나! 당시에 선비들이 많이 살만큼 행정기관이 많았고, 이들은 풍류를 찾아 나설 만큼 여유가 있었으며, 그 장소의 하나가 바로 오천면 사락바위(배)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 바위에서 내다보는 탁 트인 앞바다에는 천수만(淺水灣)의 아름다운 섬들이 점점이 깔려 있습니다. 월도, 삼형제도, 효자도를 비롯하여 멀리 삽시도와 가까이 원산도가 내다보이고, 한여 마을과 여수해 마을을 지나 오포리로 들어오면서 좌우로 아름답게 굴곡진 해안선, 곳곳의 절벽에는 수백 년 해풍을 견뎌온 향나무, 적송 등이 가관인가 하면, 풍부한 어종이 몰려오는 황금어장을 이루기도 하고, 조수가 빠져나간 다음에도 한여 마을과 사락배 마을 앞의 광활한 갯벌에는 온갖 해산물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고, 멀리 수평선에 떨어지는 저녁해는 하늘의 조화와 어우러져 기묘한 황혼을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가히 신선 놀음을 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로부터 바위이름은 사락배로 불리기 시작했을 것으로, 아마도 지금으로부터 600여년 이전부터 붙여진 것이 아닐까요? 그것은 고려 때 김성우 장군의 승첩 유적지에 기록된 이름들이 지금도 보령의 대부분의 땅이름, 동네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렇게 추측하는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오면서 이러한 멋과 풍류는 사락배가 지닌 명성과 함께 조선조의 선비정신으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조선 개국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닌 많은 성리학자(性理學者)들이 낙향하여 보령, 남포지방에 정착했습니다. 이들 학자들이 '보령은 명당'이라는 풍수설을 내놓게 되자 많은 씨족들이 모여왔다고 합니다.
토정 이지함 선생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토정비결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 아닙니까? 선생의 선조께서 묻힌 땅, 영의정 세 분이나 모셔진 곳에 함께 쉬고 있는 선생님의 유택은 발전소 진입로변 오른쪽에 있습니다.
우리들은 소장님을 위시한 많은 사람들이 해마다 1월 1일에 토정선생님 묘소에 가 참배하였습니다.
“이 땅의 주인이시여! 부디 발전소가 무고장 무사고 하게 하여 주시옵고 발전소에 근무하는 모든 직원들의 건강과 안전을 지켜주시옵소서.”
글벗모임
이러구러 세월은 흘러갑니다.
그토록 흥창했던 이 지방의 세력은 어느덧 쇠락의 길을 걸어 번창하던 마을들은 평범한 한촌(閑村)으로 되어 버립니다. 그러고서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 어느 날,
사락배에서 빨가벗고 물에 뛰어들던 아이들의 귀에는 공사판에서 돌을 나르는 소리, 돌을 깨고 다듬는 소리가 들립니다. 마을 입구의 좁은 물 허리에 물 막이 댐 공사가 벌어진 것입니다. 조수를 막아 갯벌을 농토로 바꾸는 이 공사로 많은 농토가 새로 생겨났는데, 그 때문에 사락배의 발뿌리는 논으로 변하여 물을 잃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고추 드러내고 자맥질하던 벌거숭이 아이들은 이제 육칠십 고령의 노인으로 바뀌었습니다. 사락배가 물을 잃었듯, 옛 선비들의 노래는 천수만을 나는 갈매기 울음처럼 갈 곳을 잃고 하늘을 맴돌고 있었습니다.
그러고서 또 팔구 년 전, 여수해 마을 앞의 그 넓은 갯벌에 지축을 흔드는 폭파음이 울리더니 오늘의 보령화력발전소가 들어섰습니다. 오포리 입구까지 밀려오던 조수는 좀더 멀찌감치서 멈춰서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갈 데 없어 방황하던 선비들의 노래는 발전소 직원들이 마련한 새로운 ‘사락배’라는 문예지 위에 뿌리를 내리고, 님들의 정신은 드디어 후배들의 뜨거운 가슴에 심어져 노래는 계속되게 되었습니다. 문학을 사랑하는 발전소 후배들은 어떤 간척사업에도 물을 잃지 않을 새 사락배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세월에도 바래지지 않을 노래를 부르기로 하였습니다. 이들은 ‘글벗모임’을 만들었고 정기적으로 ‘사락배’라는 제호의 문예지를 발간하면서 인근마을, 부근 학교와도 유대를 돈독히 하면서 글을 모으고 있으며, 발전소 부근의 명승고적 소개, 부락민들의 생활상 소개 등 지방문화와의 끈끈한 맥을 엮어 가고 있습니다.
1985년 3월1일에 창간호를 발간한 이래 오늘까지 18집을 만들었고 4회의 시화전을 열었습니다. 보령군 역사상 첫 번째 시화전을, 보령 시내에서 ‘글벗모임’이 해냈다고, 지방 문화인들이 말했습니다. 이렇게 이들의 정신은 문학을 통해 아름다운 삶을 꾸리려는 것입니다.
옛 선비들은 오늘의 후배들에게 이러한 정신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단절되었던 '사락배 정신'은 오늘날 다시 이어져 줄기차게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600년 오랜 세월을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시느라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