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콜렉션 투어 (a.k.a 1일 아트 동계 훈련)
아침 8시 8분에 눈을 겨우 떴다. 기어이 영하 8도. 날씨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결국엔 좋을거니깐.
오지의 버려진 군부대
치나티 재단(Chinati Foundation)은 한마디로 미니멀리스트 아티스트 저드가 마파에 설립한 현대 미술관이다. 저드는 미니멀리스트라 불리는 것도 미술관이라는 개념도 싫어했지만 그 두 단어를 쓰지않고 설명이 안되니..."Sorry Don."(도날드 선생님 죄송합니다.) 그의 작품들과 영향을 주고 받은 다른 작가들의 작품들이 영구 전시된 공간이다.
치나티 재단의 메인 게이트 부터 판자문. 매끈한 노출콘크리트 빌딩, 어제 칠한 것 같은 흰벽, 쾌적한 온도, 습도, 조명, 빽빽하게 전시된 고가의 작품들, 인스타에 등장하는 까페. 가진 자들의 놀이터. 미니멀/컨셉츄얼 아트의 성지인 디아 비콘의 큰 스케일 정도겠지 했다. 10배쯤 큰 것만 맞고 다 틀렸다. 이곳은 내가 알던 미술관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
350에이커의 벌판은 1940년대 이후 버려져 있던 군부대(Fort D.A. Russell)였다. 1978년 저드는 디아 재단과 함께 마파에 대형 작품들을 영구 설치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하는데 그게 치나티 재단이다. 무기고, 관사, 부엌, 창고, 체육관 등 34개의 옛 군대 건물들을 전시실로 사용한다. 건물들은 시간의 흔적을 애써 지우지 않았다. 입이 쩍 벌어지긴 한다. 오지의 포로수용소에 왔으니.
본격 투어에 앞서, 치나티 재단(Chinati Foundation) 투어 알아보기.
치나티 재단에는 도슨트가 함께하는 가이드 투어로는 전체 콜렉션을 돌아보는 Full Collection Tour(2마일, 4.5시간 소요), 도날드 저드의 작품을 집중으로 보는 Guided Tour: the work of Donald Judd(1마일, 2.5시간 소요), 3개의 주요 작품만 관람하는 Selections Tour(2마일, 2.5시간 소요) 가 있다. Outdoor Viewing이라는 자유관람도 있는데 건물 내부로는 들어갈 수 없다.(9시 부터 3시 30분까지 30분 간격) 예약 및 자세한 정보는 치나티 재단 웹사이트 https://chinati.org/에서
풀 콜렉션 투어는 전체 콜렉션과 특별전을 아우른다. 10시에 시작해 2시간 30분 동안 관람, 2시간 점심시간 후 2시간 정도 관람. 2마일 정도 되는 벌판에 펼쳐진 저드의 콘크리트 작품은 포함되지 않아따로 감상해야한다. 재단을 벗어난 곳에 있는 작품들도 있기 때문에 차량은 필수.
단순하고 거대하고 완벽한
오늘 투어의 참가자 8명이 모였다. 치나티 재단의 센터피스라 할 수 있는 100 untitled works in mill aluminum(100개의 알루미늄 박스)를 보러간다. 두개의 대포 창고에 나누어 전시되어 있다. 작품과 건축, 환경의 관계를 중요시하며 작품이 영구적으로 놓이는 최선의 공간과 시간을 만들고자 했던 저드. 생각이 실체가 되어 눈 앞에 있다.
작품을 위해 건물에 반원형의 철제 지붕을 덧대고, 자연광이 비치도록 양벽을 창으로 뚫었다. 시간에 따라 계절에 따라 창 밖의 풍경, 박스의 그림자, 알루미늄 면이 다른 그림들을 만들어낸다. 자연산, 날 것. 미술관에 양식 중인 작품에 없는 생명력이 있다.
박스의 규격(41 x 51 x 72 inches)과 재질은 같다. 내부의 형태는 다 다르지만 판넬들의 높이를 4인치로 통일하는 등 규칙이 있다. 지저분해 보이는 용접대신 나사를 보이지 않도록 안으로 박고 완성품 형태로 배송을 받았다. 완벽하게 만든 물체가 주는 미적 만족감. 저드에게 극한으로 들볶였을 Fabricator(작품 전문 제작자)님들 존경합니다.
미래에 온 것 같기도 하고, 과학문명이 기이하게 발달했던 과거의 문명이 남긴 유적같기도 하다. 이 한 작품만으로도 치나티에 올 가치가 있다.
자코메티의 조각처럼 길고 마른 도슨트는 15분 정도를 자유롭게 보게 했다. 마지막에 간략한 배경설명만 덧불였다. 각자의 여운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배려와 젠체를 하지 않는 태도도 치나티 다웠다.
저드와 윤형근이 함께 있는 방
윤형근이 저드에게 선물한 세 점의 작품과 저드의 시그니처인 합판 작품을 전시하는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1991년 인공 갤러리에서 처음 만난 저드와 윤형근. 첫 눈에 반했던 것 같다. 일사천리로 1993년 저드 파운데이션 윤형근의 전시가 열렸다.
사진 속 1928년생 동갑내기 두 거장은 환갑을 넘긴 노인이지만 소년들 처럼 수줍다. 슬프게도 이 사진을 찍고 몇 달 후 저드는 세상을 떠난다. 1994년에 하기로한 2인전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한다. 윤형근은 10년이 지나도록 그를 그리워한다.
"다들 죽었다. 이일(미술평론가)도 죽고, 한창기(문화보존자)도 죽고, 조셉 러브(미국 미술이론가)도 죽고, 도널드 저드(미니멀리즘 창시자)도 죽고, 황현욱(예술가출신의 갤러리스트. 인공갤러리 대표)이도 죽고, 나만 지금껏 살아있구나.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이 다 죽었구나." - 2004.5.8 윤형근
두분은 세상에 없지만 그들이 남긴 작품들이 나란히 있다. 모두가 돌아간 밤, 마파의 토산주 Sotol 한 잔 기울이며 깊은 이야기를 나누시기를...
세상 불친절한 미술관
U자형 관사 여섯동에 걸쳐있는 댄 플래빈(Dan Flavin)의 작품을 보러간다.
1) 오른쪽 문(나무 문인데 한 손으로 여닫기 벅찬 무게다.) 열고 끝까지 걸어간다. 2) 깊이 들어간 두개의 안쪽 공간에 설치된 각각 다른 색의 작품을 감상한다. 3) 다시 돌아나온다. 4) U자 난간을 조용히 걷는다. 5) 왼쪽 문을 열고 방 끝까지 들어가 두개의 안쪽 공간에 설치된 작품을 감상한다. 6) 돌아나온다. 7) 여섯동을 반복한다.
다보고 나니 영하의 날씨인데도 땀이 난다. 이런 불친절한 미술관을 봤나. 그럼 접근성 좋고, 대중적인 작품, 인증샷 스팟이 도배되어 있으면 친절한 미술관인가? 미술관은 미술에게 친절해야지. 작품이 작품 대접을 받는 곳이다. 고요한 각자의 방에서 빛의 팔다리를 쭉 뻗고 웃고 있다.
작품들의 집
저드와 친분이 있거나 혹은 치나티와 인연이 된 작가들의 콜렉션을 보러 간다. 작품들이 살고 있는 집을 가가호호 방문하는 기분.
시로 그린 그림 | 칼 안드레(Carl Andre)의 Words(1958–1972) 전시실. 구식 타자기로 손으로 반복적으로 써내려간 단어와 문장들은 읽으면 시가 되고 보면 그림도 된다. 범상치 않은 유리 진열장은 작가가 직접 디자인 했다. 저드의 친구답다.
유쾌한 마구간 | 저드에게 댄 플래빈을 소개해준 존 웨슬리(John Wesley)의 갤러리. 유머스럽고, 핑크, 하늘색이 주조를 이뤄 동화같은 천진난만한 알고보면 야하다. 오전내내 순례자들처럼 숨도 크게 안쉬던 사람들이 여기선 말도 하고 웃었다. 작품 영향도 있지만 점심시간이 되어서 였다.
이곳과 저곳의 대화 | 로니 혼(Roni Horn)의 Things That Happen Again, Pair Object VII (For a Here and a There, 1986–1988) 이라는 긴 이름의 작품. 구리 원뿔대의 인공미와 갈라진 벽 무너질 것 같은 실내의 낡음이 대조되어 강한 인상을 남긴다. 과거와 미래의 만남, 두 작품이 대화 중인 것 같기도 하고 미스테리하다.
On long-term loan from Judd Foundation, the Chinati Foundation, Marfa, Texas. Photo by Florian Holzherr. © 2020 Roni Horn, New York.
러시아 초등학교 | 책상과 책장이 쓰러지고 난장판이 된 교실. 러시아어 교과서들. 유리장에 스크랩된 어린이들의 사물들. 도슨트 설명을 못듣고 들어갔다. 군부대 이전 수용소이기도 했다는데 그때를 보존해 둔 건가. 관리가 엉망이라 깜짝 놀랐다. Ilya Kabakov의 School No.6(1993)이라는 작품이다. 이 방의 모든 것은 중고 매장 등에서 구입하고 만들어진 것. 러시아의 초등학교를 의도적으로 재현했다. 흙까지 체를 쳐서 뿌렸다고 해서 더 깜짝 놀랐다.
길에서 만난 저드의 친구들
체육관으로 가는 길에 만난 리차드 롱(Richard Long). 테니스 코트 자리에 현무암으로 수를 놓았다. 올덴버그와 부루겐(Oldenburg and Bruggen)은 1932년에 이 곳에 묻힌 말 Louie를 기념하는 조형물(Monument to the Last Horse, 1991)을 만들어서 선물했다. 우정도 아티스틱하다.
체육관이었던 Arena에선 저드의 시그니처 의자에 앉아보는 호사도 누렸다. 재단 외부에 있는 군병원에 설치된 Robert Irwin의 어둠에서 빛으로 걸어나가는 몽환적인 작품 untitled (dawn to dusk), 2016을 까지 보니 폐관시간이 겨우 30-40분 남았다.
2마일의 전력질주
경보선수 처럼 잰걸음으로 콘트리트 블럭 작품 15 untitled works in concrete(1980–1984)의 끝까지 갔다 중간쯤 와서 벌판을 대각선으로 달린다. 날카로운 마른 건초들의 가시같은 손이 찐득하게 움푹 패인 진흙바닥이 발을 잡고 늘어진 느낌이 몸에 생생하다. 꼭 투어 시작 전이나 점심시간에 여유있게 감상하시길.
어제는 동계 전지 훈련이더니 오늘은 야외 행군. 그동안 예술 소비를 쉽게 했었구나. 이틀간의 치열했던 마파 아트 투어는 전력질주로 끝이 났다.
어떤 이들은 가보지 않고도 혹하도록 글을 쓰던데, 하루를 보내고 난 감상이 이리 빈곤하다니. 눈물이 찔끔하도록 속이 상한다. 세상엔 직접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곳이 있다. 유니크해서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나 비유가 불가능한 곳이 있다. 치나티가 그렇다.
미국에서 반드시 가야하는 미술의 성지,
딱 한 곳만 고르라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마파의 치나티라고 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