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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 Feb 25. 2022

저드의 작품과 사는 집-더 블럭

이래서 저드가 아티스트들의 아티스트

드디어 저드를 만나는 아침. 온통 잿빛. 싸리눈도 왔던 것 같다. 온도는 영하 3도 까지 떨어졌다. 어제의 햇살 가득한 총천연색 마파는 꿈이었나. 있는 것 보다 없는 것이 많은 현실이 보인다. 파란 저드 팻말만 아니면 쓸쓸한 범죄 영화의 한장면이다. 지금은 양조장이 된, 사연이 많아보이는 사료공장 앞에 더 블럭이 있다.

더 블럭 투어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열린 문 틈으로 찍은 유일한 사진.




본격 투어에 앞서, 마파 저드 재단의 더 블럭(The Blcok) 투어와 더 스튜디오(The Studio) 투어 알아보기.


더 블럭 투어는 저드가 거주하던 집과 스튜디오가 있는 라 만사나 데 치나티(La Mansana de Chinati)-애칭으로 더 블럭(도시의 한블럭이라는 뜻)이라 부름-을 돌아본다. 더 블럭은 저드의 첫 대규모 건축 프로젝트로 3개의 메인 스튜디오와 초기의 작품들, 13,000여권의 도서가 있는 2개의 도서관, 2층 건물의 주거공간 등으로 구성. 1인당 $25, 1시간 45분 소요.


더 스튜디오 투어는 마파 다운타운에 있는 건축 스튜디오(Architecture Studio), 아트 스튜디오(Art Studio), 콥 하우스와 와이스 빌딩(Cobb House, Whyte Building) 등을 포함한다. 저드가 만든 가구들과 1950-60년대 초기 회화 작품과 함께 저드의 광범위한 모던 가구와 20세기 유명 아티스트, 디자이너들의 작품 콜렉션도 만나 볼 수 있다. 1인당 $25, 1시간 45분 소요.


모든 투어는 도슨트가 함께하는 가이드 투어이며 자유 관람은 없다. 예약링크 https://juddfoundation.org/visit/marfa/


치나티 재단은 저드가 만든 현대 미술관으로 저드 재단과는 독립적으로 운영된다. 치나티 재단 투어에 대한 설명은 다음편에서 자세히



저드가 저드했던

더 블럭 안은 AD(Architectural Digest) 잡지에 나올 법한, 미니멀하고 고급스러운 별장이 펼쳐질 줄 알았다. 흙바닥, 벽돌벽, 창고같은 건물. 소박하다 못해 초라하다. 수도원, 선교지의 학교. 하지만 조금만 눈여겨 보면 더 블럭 전체가 저드가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만든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게이트를 통과하면 있는 보이는 콘크리트 수영장과 정자, 정원, 2층 빌딩 앞 야외 테이블과 의자 모두 저드의 디자인이다. 마당 중앙 U자형 벽돌벽을 중심으로 비행기 격납고 였던 동쪽과 서쪽 빌딩은 대칭을 이루는데 그의 머릿 속에서 나온 구조다.

Courtesy of the Judd Foundation


불편하지만 완벽한

올리브 그린색의 두툼한 패딩과 그레이 비니를 눌러쓴 가이드는 원래 마당에서 설명을 하는데 날이 매서워 2층 건물로 들어가자고 했다. 이 건물은 육군 병참장교의 사무실을 개조한 것으로 1층에 부엌과 2층에 아이들 방이 있다. 집 안의 벽을 헐어 개방감이 있는 로프트(Loft) 구조로 만들었다. 화장실과 욕실을 없애 별도의 건물로 만들었다. 가구와 부엌의 선반과 카운터도 지역 목수가 제작한 것이다. 저드의 초창기 가구 디자인의 모델하우스이다. 최소 40년은 앞선 감각이다.


Courtesy of the Judd Foundation


계단에 쪼르르 앉아 저드의 생을 커버하는 20분 정도의 프리젠테이션을 듣는다. 저드의 두 아이들, 라이너(Rainer)와 플래빈(Flavin)도 이렇게 앉아서 저녁식사를 기다렸을까? 계단 옆의 데이베드에서 난로를 쬐며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저드가 살았던 시간이 이 공간에 남아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경이로운 도서관

계단 위에서 2층을 보고 마당을 가로질러 동쪽 빌딩의 첫 구역으로 들어간다. 앉아 있으면 예술적 영감이 쏟아질것 같은 도서관.


12칸씩 맞춰짠, 이음새가 없는 책장, 저드의 취향에 맞게 세심하게 제작된 가구들, 여백의 미를 살려 정리된 책들. 멀리서 봐도, 자세히 봐도 아름답다. 더 블럭 투어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

Donald Judd's library in Marfa, Texas. Courtesy of the Judd Foundation; Styling by David de Quevedo
Donald Judd's library in Marfa, Texas. Courtesy of the Judd Foundation


저드의 딸 라이너*에 따르면 저드는 도서관을 사랑했고 해외에 갈 때마다 책을 집으로 보냈다고 한다. 90년 초에 스튜디오 구역을 바꿔 도서관을 두 동으로 만들었다. 20세기의 책은 주제에 따라, 그 이전의 책은 나라별로 구분했다. 책을 읽는 시간만큼 책과 책상을 정리하는 데도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 같다.


저드의 꿈, 작품과 동거동락

두번째 도서관을 나와 바로 옆의 스튜디오 구역으로 간다. 초기 작품들의 전시실이다. 저드는 작품을 직접 만들지 않고 전문 제작자(fabricator)를 고용해서 진행했는데, 그가 직접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미대 1학년생의 습작처럼 빈틈이 보이는 초기 작품들은 신선했다.


Courtesy of the Judd Foundation


U자형 벽돌벽과 외벽의 좁은 통로로 서쪽 빌딩의 스튜디오로 간다. 저드는 전시를 위해 작품이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작품은 작가가 의도한 곳에 자리 잡고 ‘거주’하는 영구전시(permanent installation)를 할 때 가장 잘 감상될 수 있다고 믿었다. 작품이 있는 공간에서 일을 하고 생활하는 경험도 중요하게 여겼다. 더 블럭 중에서도 이 스튜디오는 저드의 생각을 현실화한 공간이다.


미술관에서는 날카롭고 차갑던 저드의 작품들이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해 보인다.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선과 구성은 노력의 산물. 영구히 전시될 작품을 고르고 생각하는 과정은 아주 긴 시간이 필요했다. 한 전시실은 2년이 걸리기도 했다고. 1993년 '다시는 바꾸면 안된다. 너무 일이 많다.'고 저드가 말하기도 했는데,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짐작이 간다. 두 개의 전시실 중간에는 저드가 거주하던 공간이 있다. 들어가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Courtesy of the Judd Foundation
Courtesy of the Judd Foundation


문도, 벽돌벽도 놓치지 않지

스테인레스 스틸과 플렉시 글라스로 된 Untitled와 합판으로 만든 박스들이 전시된 공간을 마지막으로 들렸다. 저드의 시그니처 작품들은 대형 미술관의 층고가 높은 큰 공간에 설치된 걸 주로 봐서 그런지 방 안에 있는 모습이 낯설었다. 입구의 거대한 회전식 문이 예사롭지 않았는데, 아티스트이자 건축가, 저드와 연인이기도 했던 루레타 빈시아렐리(Lauretta Vinciarelli, 1943 –2011)의 작품이라고 한다.


Donald Judd Spaces, Courtesy of the Judd Foundation


돌아와서 알았는데 벽도 그냥 지나칠 게 아니었다. 70년대 초에 벽돌은 가난해 보이고 스타일리시 하지 않고 미국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만연했다. 공장에서 찍어낸 알루미늄이나 플라스틱을 격이 있는 고급 자재로 여겼다. 저드는 아니었다. 전통 벽돌 기술이 사라지는 걸 안타까워해서 더 블럭의 벽돌벽들을 멕시코에서 훈련된 인력을 고용해 보수한다. 이래서 저드, 저드 하는구나.


예술적인 삶의 대가(代價)

도슨트였던 다이아나는 5년전 마파로 이주한 화가다. 작품만 해서는 생계가 힘들어서 파트타임으로 일한다고 했다. 저드의 삶도 여유롭지는 않았다. 작품을 팔거나 맞교환 하며 재정을 마련했는데 돈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그녀가 전해준 저드의 마지막은 처연했다. 93년에 몸이 좋지 않아서 뉴욕에 갔다가 암을 발견하고 94년 2월 세상을 떠났다. 마파에 작별인사도 못한 채. 그의 나이 66세 였다.


투어가 끝났을 때 추위에 손발에 감각이 없었다. 황급히 호텔로 돌아와 뜨거운 차와 피자 두쪽을 먹자 온기가 돌았다. 빨갛게 언 손가락으로 문들의 차갑고 육중한 쇠자물쇠를 여닫던 다이아나에게 팁이라도 주고 올 걸. 마당과 벽돌벽을 돌아보고 올 걸. 그제야 생각이 났다.


오후 세시, 눈이다. 1월의 마파를 찾은 사람에게 주는 상. 뛰어나가 온 몸으로 받았다.

마파의 눈구경 하고 가실게요.


*출처 : https://www.architecturaldigest.com/story/donald-judd-minimalist-furni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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