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_낯선 것
살인 충동
<석한의 이야기>
"이번 역은, 가산디지털단지입니다."
휘청, 끼익— 철길 위를 긁는 듯한 소리와 전철의 흔들림에 몸이 저절로 반응한다. 무릎이 꺾일 듯 휘어진 순간, 본능처럼 다리가 균형을 되찾는다. 잠결에 깬 나는 눈꺼풀을 들었다. 눈을 떠보니, 어딘가 낯선 구두가 내 발에 얌전히 놓여 있다. 오늘 처음 신은, 윤이 반지르르한 새 가죽구두. 발등엔 희미한 먼지와 주름, 남의 것을 빌린 듯, 생경하고 차가운 감촉이다.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마치 오늘의 나처럼.
얼마나 오래 서서 잠이 들었던 걸까... 딱딱한 가죽 안에서 축축이 땀이 찬 발은 무거워졌고, 허리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욱신댔다. 다시 등을 벽에 기대 보지만, 자세가 영 어색하게 느껴진다.
몸을 힘겹게 일으켜 다시 벽에 기대고 서니, 이제 비릿하고 눅눅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서울의 많은 지하철 노선 중, 유독 1호선에서만 나는 이 쇠이끼 냄새. 지하철 바닥 틈새를 떠돌던 오래된 물비린내, 누군가의 젖은 옷에서 배어 나온 먼지 섞인 땀냄새, 나는 이 악취들이 싫어서 마스크를 쓰고 다녔던 시절이 오히려 그립다. 사람들과는, 가능한 멀리 떨어져 있고 싶다. 벽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떨군 채, 나는 최대한 '이 전철 안에서 존재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고개를 숙인 시야 아래 구두코 위로 형광등 불빛이 번들거리는 모습이 낯설다. 불안한 시선은 전철 창 너머의 출렁이는 어둠으로 향한다. 나는 다시 전철 안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곳은 너무 익숙해서, 차라리 낯설게 느껴진다. 낡은 1호선만큼이나 허리가 굽어버린 노인들은 각자 자리를 넓게 차지하고 앉아 큰 소리로 정치 유튜브를 시끄럽게 틀고 있다. 그 옆의 아저씨는 붉은 얼굴로 만취가 되어 씩씩 거리며 중얼 거린다. 그리고 낡은 후드티에 커다란 헤드폰을 쓰고 눈을 감고 있는 학생들...
그리고 내 안에서, 이 모든 장면을 끊임없이 분해하고 적대하는 또 하나의 나.
불편한 마음을 애써 이겨내며 손 목 위의 시계로 눈을 돌린다.
11시 40분, 분명 친구와 8시쯤 헤어졌는데… '블랙아웃' 기억이 끊겼다는 것이다.
"제기랄"
입에서 굴러다니던 욕지거리를 참아내지 못하고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린다. '내가 뭘 잘 못했다는 거야' 오늘 점심 식사를 하며 받았던 냉소와 모멸, 불편한 정적 속에 던져진 비수 같은 말들이 가슴속에서 화염처럼 뜨겁게 타오른다. 정수리부터 눈가까지 핏줄이 팽팽하게 조인다. 목을 움켜쥐고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눈이 튀어나올 듯,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 나는 참지 못하고 질끈 하고 눈을 감는다.
하지만 이럴 때면 '빨갱이'를 연신 외쳐 되는 시끄러운 유튜브가 허락 없이 귀를 뚫고 들어오고, 아저씨들이 내뱉는 돼지고기 냄새와 소주 냄새가 섞인 채취는 코를 찌른다. 벽을 향해 몸을 돌리고 숨을 크게 뱉었다 들이키면서 마음을 진정시키며 기억의 뚜껑을 힘겹게 눌러댄다. 그러나, 그때마다 어린 시절의 그림자가 물처럼 스며든다.
30년 전,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후, 나는 일곱 살에 보육원에 맡겨졌다. 그 후로 7년을 보육시설에서 보냈다. 그곳은 지옥이었다. 해방의 날이라 믿었던 고모 집으로 향하던 날, 오늘처럼 1호선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전철은, 나를 구원의 문턱이 아닌, 또 하나의 폭력으로 이끌었다.
그날 나는 전동차 사이를 오가다 노랗게 머리를 물들이고 본드를 부는 나보다 몇 살 더 먹어 보이는 아이들과 눈이 마주쳤다. 나를 쫓는 그들의 눈을 피해 나는 다음 칸, 또 다음 칸으로 몸을 옮겼다. 그러나 결국 이름도 모르는 역 어귀로 끌려가 속옷만 입은 채 피떡이 되도록 맞았다. 지나가는 어른들은 내가 맞고 있는 것을 분명히 봤으면서도 마치 내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겼다. 나는 그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세상과 마주했다.
나는 흘러내리는 핏물을 입에 머금고 고모 집 주소가 적힌 쪽지를 손에 꼭 쥔 채 기어이 걷고 또 걸을 수밖에 없었다. 어둠이 깔린 늦은 저녁, 고모 집에 도착했을 때, 고모는 술에 취해 잠이 들어있었다.
수십 년이나 지났기에, 이제는 다 잊을 만도 한데...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마음속에 있는 괴물을 깨울 때면, 그 괴물은 기다렸다는 듯 내 목을 졸라 온다. 그럴 때면 나는 '사람을 죽이고 싶다'라는 충동에 휩싸인다. 나의 마음속의 괴물은 진정되지 않고 오히려 내 심장을 쥐고 흔들며 속삭인다.
'죽여버려. 사람 하나쯤 사라져도 세상은 변하지 않아.' 그럴 때면 충동을 참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에, '전철에서 내려야 한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나를 사로잡는다.
요동 치는 나의 마음을 조롱이라도 하듯, 한 남자가 자전거를 끌고 다가온다. 술 냄새, 진흙이 묻은 타이어, 붉어진 얼굴. 그가 자전거를 들고 휙 돌아서며 나의 정장 바지와 구두에 흙을 묻힌다.
"저기요…!"
마음속에 화를 억누르고 떨리는 목소리로 사과를 받으려고 그에게 말을 건네 보지만 그는 대꾸도 없이 나의 부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철을 빠져나간다. 나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를 쓰러 뜨리고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하지만 망설이는 사이 전철문은 이미 닫혀있다.
"이번 역은 석정입니다."
문이 열리자 나는 바로 승강장 벤치에 털썩하고 주저앉고 평소처럼 눈을 감은채 사람들이 모두 전철역을 빠져나가길 기다린다.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이제 석정역에는 어둠과 적막뿐이다. 마음의 괴물은 내가 진정한 것을 눈치채고 아쉽다는 듯 다시 심연으로 돌아간다. 나는 비로소 그로부터 자유를 얻는다.
‘석정역’.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일한 피붙이였던 고모가 정착한 곳이다. 서울도, 경기도도 아닌 애매한 경계에 걸쳐 있어, 행정구역조차 이따금 헷갈리는 동네. 주변에 학교 하나 없이, 아이들 웃음소리 대신 들리는 건 주말마다 등산을 마친 취객들의 고성방가와 다툼 소리다. 그 소란함이 이곳에선 오히려 일상처럼 느껴진다.
고모는 지독한 알코올 중독자였다. 나를 맡겠다고 한 이유는, 오직 아버지가 남기고 간 천만 원도 채 되지 않는 유산과, 매달 나오는 국가 지원금이 필요했을 뿐이다. 내가 집에 온 이후에도 고모는 아침부터 밤까지 술에 젖어 살았다. 하루의 시작과 끝이 소주병으로 이어졌고, 취기가 깨어 있는 순간은 손에 꼽았다. 그런 고모 곁에서, 나는 보육시설을 나왔음에도 여전히 어른들의 무관심 속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다. 보호는 없었고, 관심은 없었고, 그저 살아남는 일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고모에게도, 단 하나 고마운 점이 있다면—그토록 나를 미워하고 구박하면서도, 다시는 지옥 같은 보육 시설로 돌려보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만큼은, 지금도 고마웠다. 어쩌면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보호였는지도 모른다.
대신 고모는, 나를 과거에서 잘라냈다. 단호하게, 잔인하리만큼 분명하게.
고모가 처음 보육 시설에 찾아온 날, 그녀는 나를 꿰뚫어 보는 눈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이제 고모 따라가서 살면 돼. 근데 한 가지만 약속해. 여기 있는 애들이랑은, 앞으로 절대 연락하지 마. 보육원에도 얘기 다 해놨어. 약속 어기면, 난 너를 여기에 다시 버릴 거야.”
그날 이후, 고모는 내게서 보육원의 기억을 통째로 지워버렸다.
함께 울고 웃던 보육원 친구들, 형제나 다름 없던 아이들과의 기억도,
그 모든 시간은 고모의 말 한마디로 ‘없던 일’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나는, 고모를 따라가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 악마 같은 원장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고모가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그 인연 하나에 기대어 나는 그녀를 선택했다. 그렇게 이 동네와의 인연이 시작된 지도, 어느덧 20년. 고모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나는 이곳을 벗어난 적이 없다. 아니, 벗어날 수 없었다. 보육원 친구들과 인연을 끊으라는 고모의 말에 철저히 따랐던 나는, 결국 의지할 곳 없이 홀로 이 동네에 남았다.
전철역을 빠져나온 나는, 익숙한 듯 발길을 돌려 불 꺼진 석정역 철재 상가 골목으로 향한다. 밤이면 누구 하나 걷지 않는 그 골목. 사람들이 자주 오가는 길보다 이쪽이 훨씬 마음이 놓인다. 이 길을 택하면 집까지 15분은 더 걸린다. 그래도 좋다. 고양이나 쥐 한두 마리쯤 마주칠 뿐,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거나 인사를 건넬 필요가 없으니까. 이곳은, 말없이 숨 쉴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이다.
어린 시절, 술에 취한 고모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눈은 풀리고, 입은 비뚤어졌고, 손엔 언제나 벨트가 들려 있었다.
“식충이 새끼…”
그 말이 들리는 순간 나는 집을 빠져나와 달렸다. 그리고 숨었다. 철재상가 골목 깊숙한 구석. 폐건물의 계단 밑, 높게 쌓인 철판 더미 사이. 쇠 냄새가 진하게 배인 틈 속에서, 나는 쭈그려 앉아 어둠이 짙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렇게 밤을 버티고 나서야, 숨을 죽이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래서일까. 이 길가에 아무렇게나 놓인 녹슨 철제들, 차가운 쇳내음,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 누군가에겐 낯선 풍경이겠지만, 내겐 오히려 나를 감싸주는 낯익은 고요와 안도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향’이 있다면, 아마 이런 냄새일지도 모른다.
가방 안에서 진동이 울렸다. ‘아뿔싸.’ 급히 여자친구가 선물해 준 가방의 앞주머니를 뒤적여 휴대폰을 꺼낸다.
"어디야? 도대체 전화를 몇 번 했는지 알아?" 울먹이면서도 분명히 화가 섞인 목소리. 그 말에 오늘 하루의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잠시 물러나고, 나는 습관처럼 말했다.
"누나…" 곧바로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려는 찰나, 그녀가 먼저 말을 잇는다.
"석한 씨… 많이 걱정했어. 저녁은… 먹었어?"
그제야 눈에 들어온다. 무심하게 쌓인 철재 더미 위로, 하얀 눈이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누나, 미안해요. 그냥… 기만이한테 연락 와서, 잠깐 앉아 있었어요."
걱정시켰다는 죄책감에, 나도 모르게 어설픈 변명을 흘려보낸다. 그녀는, 한숨 섞인 따뜻한 목소리로 답한다.
"괜찮아. 오늘… 많이 힘들었을 것 같아서. 저녁 조금 챙겨서 석한 씨 집 앞에 놔뒀어."
짧은 말인데도, 속이 저릿했다. 그녀가 남긴 따뜻함은, 차가운 철재 틈 사이에서 이질적일 만큼 선명하다. 그 따뜻함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몰라,
나는 또, 진심을 말하지 못한 채— “고마워요.” 하고, 마음을 접었다.
그리고 '세상과 단절되고 싶다'는 나의 의지를 표현하듯, 휴대폰을 아무렇게나 가방에 쑤셔 넣는다.
그러나 가방에서 손을 빼려는 순간—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기어올랐다.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심장이 몸속에서 울리는 북소리처럼 거칠고 빠르게 요동친다. '쿵, 쿵, 쿵.'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둠 속, 철재 상가 특유의 눅눅한 공기 사이로 누군가의 ‘시선’이 스며든다. 나는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더 깊고 좁은 골목 안으로 몸을 숨긴다.
철판 더미와 녹슨 기계 틈. 숨소리조차 삼킨 채, 한 번 더—정확히 한 번 더—주변을 확인한다.
정적. 그리고 고요.
조심스레, 다시 가방 안에 손을 넣는다. 그 순간— 가방이 손에서 미끄러졌고, 무릎에 힘이 풀려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입에서는 짧고 날카로운 숨이, 비명처럼 터졌다.
뼈마디가 닿은 감촉, 온기, 아니 차가움.
살갗 아래로 느껴지는 정체 모를 감촉.
분명 가방 안에서 '그것'이 내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