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낯선 것 04화

4화_폐기처분

단편소설_낯선 것

by Liu Ming
폐기처분


<기만의 이야기>

"석한아. 지민이 아빠가 만일 차갑게 대하시더라도..."

엄마는 근심 어린 석한의 표정을 살피며 말끝을 흐린다. 계란말이 접시를 석한 쪽으로 밀며, 마치 석한의 친엄마라도 되는 양 다정한 눈빛을 보낸다. 석한은 엄마와 눈을 마주친 뒤,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 눈치를 살피듯 작은 목소리로 “감사합니다.”라고 답한다.


잠시 후, 그는 구깃구깃한 상품권 한 장을 내밀었다.

“회사에서 받은 건데… 아주머니 드리려고요.” 순간 속이 울컥 뒤집혔다.


‘아주 꼴값을 하고 있네... 대단한 효자 나셨어.’

나는 신발을 아무렇게나 구겨 신고 현관문을 나섰다. 빌라 복도에 퍼진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찌른다. 전봇대 불빛은 꺼져가며 힘겹게 깜빡거린다. 담배를 입에 물고 석한이 '친구'라고 각인하여 선물한 지포 라이터로 불을 붙인다. 담배 연기와 입김이 섞여 뿜어져 나오자, 오한이 뼛속까지 파고든다.


‘쳇, 돈 많은 아빠만 있었어도 이런 동네는 벌써 떠났을 텐데.’


모두가 이 동네를 떠났다. 힘 없이 깜박거리는 불 빛을 보며 가래침을 '퉤'하고 아무 곳에나 뱉는다. 바닥에는 가래침인지 껌인지 모르는 검은 것들이 얼룩덜룩 벌레처럼 붙어있다. 이 모든 것들이 나를 비웃는 듯했다.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


석한을 처음 본 건 중학교 시절, 교회였다. 그는 한 주도 빠짐없이 어른들 사이에 껴서 점심을 먹고 갔다. 반년쯤 지났을까, 그런 석한을 항상 가여워했던 엄마는 나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어느 날 갑자기 석한을 집으로 데려왔다.


"석한이라고 했지? 우리 기만이랑 동갑인 것 같은데... 아줌마가 밥 해줄게. 언제든 와"


나는 펄쩍 뛰었지만, 엄마는 나의 반발을 아예 듣지도 않았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엄마는, 마치 자신의 그림자를 보는 듯 석한을 애처로워했다.


석한은 처음 우리 집에 와서는 현관에서 신발조차 벗지 못하고 서성였다.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는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내 옆에 다가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미안한데… 식판 없어?”


알코올 중독자인 고모를 다시 만나서 살게된지 반년이 되지 않은 석한은 보육원에서는 식판만 써봤다며, 엄마가 기껏 차려준 밥상 앞에서도 자기 앞에 있는 국과 밥만 건드렸다. 엄마는 억지로 불고기와 반찬을 그의 밥 위에 올려주며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나한테는 공부하라 잔소리만 하더니, 이 새끼한텐 왜 저래?’


그날 이후 내 식탁, 내 자리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이 점점 더 눈에 거슬렸다. 몇 번이나 엄마에게 다시는 집에 부르지 말자고 소리쳤지만, 그럴수록 엄마의 모성애를 자극할 뿐이었다. 엄마는 늘 이렇게 말했다.


"기만아, 우리 밥 먹을 때 가끔 숟가락 하나 더 놓는거잖아. 넌 왜 그렇게 싫어하니…"


석한은 공부를 꽤나 잘했기에, 심지어 아빠마저도 나를 석한과 비교했다.


"야, 이 자식아. 고아인 쟤도 공부를 저렇게 잘하는데, 너는 잘하는 게 뭐냐? 너한테 쓰는 학원비가 아깝다"


나는 가슴속에 응어리가 쌓여갔고 석한을 볼 때면 분노를 느꼈다. 모든 게 석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럴수록 석한은 나의 자리를 꿰차고 들어왔다.


석한은 반대로 빚을 갚듯 나에게 헌신했다.

마치 엄마에게 고마운 것을 어떻게든 나에게 갚으려는 듯 발버둥쳤다.


내가 곤경에 처하면 맞서 싸워줬고, 숙제가 있으면 챙겨 줬으며, 하다못해 간단한 청소까지 함께 했다. 석한과의 불편한 동행이 익숙해지게 느껴질 때 즘, 우리는 고등학생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석한에 대한 엄마의 애정이 깊어질수록, 반대로 나에 대한 아빠의 비난이 거세질수록,

나는 석한에 대한 분노가 쌓여갔고 그와 멀어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어느 날, 나는 학교 급식 줄에서 석한과 마주 섰다. 그날따라 아빠에게 욕을 잔뜩 얻어먹은 터라, 속은 이미 뒤집혀 있었다. 마침 내 옆에, 늘 착하게만 굴던 석한이 있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나를 향해 ‘고맙다’는 말을 삼키고 있었고, 그 태도가 오히려 더 나를 질리게 했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던. 석한은 나에게 화를 낼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밑도 끝도 없이 큰 소리로 일부러 주위에 들리게 소리쳤다.


“야, 너… 고아원 출신이지?”


순식간에 웅성거림이 퍼졌다. 아이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고, 숟가락을 내려놓고 우리를 바라봤다.

석한은 식판을 들고 서 있다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나는 연거푸 독침을 쏘아댔다.


“그래서 맨날 우리 집에 빌붙어 밥 얻어먹고 다니는 거냐?

고모는 알코올 중독자라며? 야, 네 밥도 결국 세금으로 주는 거잖아!”

나는 얼어붙은 석한에게 다가가, 그의 국그릇에 일부러 침을 뱉었다.

아이들은 조용하다가 이내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석한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들고 있던 식판을 덜덜 떨며 기어코 국물을 바닥에 흘렸다. 그리고 대답조차 못 하고, 식판을 팽개치듯 내려놓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 뒷모습이 초라하고, 비참하고, 무엇보다도 내 발밑에 짓눌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바로 그의 뒤를 쫓아가 화장실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그의 가슴팍을 벽에 밀치고 낮게 속삭였다.


“이 새끼야. 내가 네 약점 쥐고 있는 거 알지?

입 다물고 내 말 잘 들어. 안 그러면 내가 평생 너 따라다니면서 소문낼 거야. 오늘처럼.”


그날, 나는 분명히 알았다.

이 녀석의 가장 아픈 곳이 어딘지.

그리고 그 비밀을 움켜쥔 내가 이제부터 이 관계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그날 이후, 석한은 내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랐다.

귀찮은 심부름부터 시험 때 필요한 커닝 페이퍼, 심지어 성인이 된 뒤에는 큰 돈까지도.

나에게 늘 미안한 것이 있고, 또 비밀이 있는 그는 나에게 ‘호구’ 그 자체였다.


‘그래, 네 인생은 내 발밑이야. 고아 새끼 주제에 감히 고개 들지 마라.’


물론 나도 안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그래서 더더욱, 내 밑에 있어줄 누군가 필요했다. 성인이 된 뒤에도 그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 술자리가 끝나갈 때 즘이면 석한을 부르고 늘 내 앞에 앉혔다.


“야 석한아, 네가 오늘 술값 계산해라.

우리 엄마 없었으면 지금 밥도 못 먹었을 거 아냐? 네가 나한테 평생 갚아야지.”


나는 술자리가 무르익을수록 일부러 여자애들 앞에서 더 큰소리로 웃었다.


“우리 석한이, 술은 잘 마시네. 고아 새끼라 주량으로라도 버티는 거냐?”


사람들 앞에서 모욕당하면서도 그는 억지 미소만 지었다. 그 모습이 나를 더욱 흥분시키고 또 자극시켰다.

계산이 끝나면 나는 일부러 그의 뒤통수를 퍽 치며 말했다.


“잘한다, 우리 호구. 역시 착하지. 내 친구 맞네.”


그럴 때마다 석한의 눈은 잠깐 흔들렸지만, 그는 끝내 나를 밀어내지 못했다.

나는 안다. 그 이유를. 바로 우리 엄마 때문이다.


나는 석한이 영원히 내 밑에 있길 바랐다. 그래야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는 것 같았으니까.


그런 석한이 지민과 결혼하겠다고 상견례를 하겠다고 우리 집에 찾아온 것이다. 나는 석한에게 상견례를 마치면 한턱 크게 내라고 으름장을 놨다. 나는 석한과 지민의 상견례 날에 맞춰 평소 가보고 싶었던 최고급 한우 식당을 예약하고 석한이 오든 말든 친구들과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지글지글' 기름이 튀며 익는 고기와, 그리고 입에서 녹듯 없어지는 소고기 맛에 감탄하며 이번 생에 자발적 호구가 나를 찾아와 준 것에 그리고 이 호구를 길들인 나의 능력에 다시 한번 스스로 뿌듯함을 느꼈다.


"야! 언제 오냐?"

약속시간에 늦은 적이 없는 석한이 두 시간이나 내 연락에 답이 없다. '싹수없는 자식, 문자에도 답이 없다니, 뭔가 잘 안 된 것이 분명하구나!'라고 생각한 순간, 드디어 '호구'라는 이름이 스마트폰 화면에 뜨며 전화벨이 울린다.


세상의 모든 불행을 어깨에 지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석한의 모습이 떠오르자, 내 입꼬리가 다시 제멋대로 올라간다.


이미 소고기로 배를 채우고 와인 두어병을 비워낸 뒤였다. 최고급 특수 부위도 프랑스산 레드 와인도 질린다는 생각이 들 때 즘, 석한이 넥타이를 목 끝까지 조여 맨체 문을 열고 들어온다. 나는 일부러 손을 흔들며 석한을 향해 소리쳤다.


“야, 왔다! 상견례 마치고 오시는 우리 사위님~!”


와인잔을 내 옆으로 급하게 당기고 종업원을 불렀다.


"여기요! 소주 한 병이랑 맥주 잔 하나 주세요!"


어차피 석한은 자신을 위해서는 그 어떤 것에도 돈을 쓰지 않기에 소주 한 병이면 충분했다. 석한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지도 않은 채, 술잔부터 집어 들었다. '콸콸콸' 대충 따른 소주가 맥주잔에 흘러넘치지만, 석한은 내가 병을 내려놓기도 전, '벌컥벌컥' 소주를 한 번에 들이켠다.


석한과의 술자리는 아무 말도 할 필요 없이 그저 맥주잔에 싸구려 소주를 가득 채워주기만 하면 된다. 나는 그런 석한을 보며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래, 이래야지. 늘 착하고, 늘 당하고, 늘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호구 새끼.'


종업원은 다시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기름이 지글지글 튀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나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야, 너 진짜 괜찮겠냐? 지민 누나는 네 주제에 과분하지 않냐?

불쌍해서 너 데려가려고 한거야, 고아 새끼가 어디서 감히…”


석한의 불끈 쥔 주먹이 탁자 위로 순간 올라 왔다가 다시 멈칫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연거푸 술잔만 비우고 또 비웠다. 나는 그의 절망을 느끼며 더 기분이 좋아졌다. 그 고요가, 그 침묵이, 오히려 나를 더욱 우쭐하게 만들었다.


“야, 오늘은 네가 다 쏴라. 사위님이니까 체면 세워야지?”


나는 일부러 계산서를 석한 앞에 밀어놓았다. 석한은 잠시 망설이더니, 천천히 지갑을 꺼냈다. 나는 늘 이런 이유로 석한을 옆에 두었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하지만 사실은 호구라는 이름으로. 오늘은 절망하는 모습까지 보게 되니, 특히 그 점은 나를 더욱 황홀하게 만들었다.


'그래, 이게 바로 네 자리야. 내 발 아래의 쓰레기통.'


석한은 끝내 고개를 숙이고, 잔을 채워 들이켰다. 술이 목구멍을 넘어갈 때마다, 나의 웃음은 점점 더 커졌다. 밤이 깊어가자 석한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석한은 이제 몸을 가눌 수도 없을 만큼 술에 취했는지 습관처럼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으슥한 골목을 찾아들어간다.


그리고 몇 발자국 떼지도 못하고 먼지가 가득 쌓인 에어컨 실외기 위에 걸터앉더니 잠이 든다. 주변에는 전단지들과 쓰레기뿐, 석한의 머리카락 위로 흰 눈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이미 만취해서 잠이 든 석한에게 나는 마음껏 삿대질을 하며 욕을 퍼붓는다.


"우리 집에, 우리 엄마한테…

고아 호구 새끼 주제에냥 쓰레기처럼 살다 죽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몸이 반즘 접혀 앉아 있는 석한을 보니, 파람이 절로 불어진다.

석한이 보물처럼 애지중지 꼭 끌어안고 있던 '황진단'을 소리 없이 챙긴다.

차갑게 얼어 있는 황진단을 손에 넣자, 되려 심장이 뛰기 시작하며 가슴이 뜨거워진다.


‘다 뺏었다. 넌 이제 끝이야. 너한테 남은 건 빈 껍데기뿐이야.’


남은 건, 추위 속에 버려진 석한.

그리고 어둠 속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또 다른 그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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