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낯선 것 02화

2화_안전벨트

단편소설_낯선 것

by Liu Ming
안전벨트


<지민의 이야기>

토요일 아침 10시. "아빠! 빨리 좀 나가자니까!"

나는 안방에서 여전히 꾸물거리는 아빠를 향해 다소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석한이 몇 달 전 어렵게 예약한, 상견례로 소문난 종로의 한정식집은 골목 안 깊숙한 곳에 있어서 늦게 가면 주차가 어렵다. 게다가 오늘은 토요일, 눈까지 내려 도로는 이미 정체가 시작됐을 것이다.


아빠에게 석한에 대해 이야기하기까지 한참을 망설였다.

그는 진중하고 성실하며 감정 표현에 서툴다. 석한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오늘도 12시 넘어서 끝나?”라고 물을 때면, 그는 공장 유니폼 위에 야간대학 책가방을 멘 채, 고된 하루가 피곤할 텐데도 단단해 보이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리려 애썼다.


그는 서울에 있는 회사에서 사무직으로 일을 시작하게 된 뒤, 그제야 비로소 나에게 처음으로 먼저 연락을 했다. 스스로 가진 게 없다는 이유로, 누군가에게 신세를 질 것 같으면 애초에 관계를 시작하려 하지 않았다.


나는 그 후 그의 많은 '처음'을 함께했다. 그의 첫 놀이공원, 첫 수영장, 첫 자전거까지... 나는 마치 세상에 서른 살로 태어난 아이와 함께 하는 것처럼 그에게 세상을 열어줬고, 그는 나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찜질방에서 수건으로 양머리를 만들어 씌워줬을 때, 그는 "누나, 나도 평범한 사람이 된 것 같 않아요?"라고 하며 나를 향해 환히 웃었다.


그의 밝은 웃음을 본 순간, 나는 생각했다. 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그리고 아빠의 반대에 부딪힐지라도 사람과 평생을 함께하겠다고 결심했다.


“아빠,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 공부도 잘했고…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고…

하여튼 지금은 서울에 있는 건실한 회사에서 십 년 넘게 성실하게 일하고 있어.”


아빠가 혹시라도 반대할까 걱정됐기에, 머릿속의 단어들이 뒤죽박죽이 되어 튀어나왔다. 아빠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지만, 같은 동네인 석정동에 사는 고모 밑에서 자랐다는 말에 내심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럼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고모 집에서 계속 자랐다는 거니?"

나는 아빠가 석한을 인정할 것 같은 기대감에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건 아니고… 부모님은 일곱살에 돌아가셨고, 고모가 데리러 오기 전까지는 희망 보육원에서 있었데."

그 순간, 아빠의 표정이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아빠는 어지간한 일에 목소리를 높이는 적이 없었다. 하지만, ‘희망 보육원’이라는 단어에는 매우 놀라며 격양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아빠가 근무했던... 동대문에 있는 그 희망 보육원 말이냐?

아빠의 격양된 반응에 당황하여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나에게, 아빠는 점점 두려움, 분노, 걱정이 가득 찬 얼굴로, 미간이 찌푸려지고 얼굴이 붉어지며, 목소리를 높여 명령하듯 말했다.


“지민아. 그 보육원… 거기서 있었던 일들, 너는 모른다.

희망 보육원 관련된 사람은… 절대 안 돼. 다신 입 밖에 내지 마!”


경찰 출신인 아빠는 내가 소개한 사람이 석한이 아니더라도, 그 사람의 직업이나 신분이 안전한지부터 따질 거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엄마를 잃고 난 뒤 그것은 점점 더 심해졌다. 그래서, 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 감정과 미래를 자기 마음대로 정의하려는 아빠가.


희망보육원.

석한은 보육원 이야기를 좀처럼 하지 않았다. 그래서 기억나는 일이 몇 가지 없다.

어릴 적 사진도 없고, 생일을 언제 축하받았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한 번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혹시 생일마다 미역국 먹었어요? 저는 보육원에서 보내는 생일이 싫었어요. 더 많이 맞았거든요…”


또 한 번은—

밤늦게 헤어지던 길목에서 내가 “혼자 집에 가면 무섭지 않아?”라고 묻자, 그는 그냥 조용히 말했다.

“보육원에 있을 땐 밤이 제일 편했어요. 자는 동안에는 그래도 부르지 않았거든요.”


‘아무도 부르지 않는 시간만이 편했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었다

그는 심각한 말들을 하면서도 입으로는 애써 웃음 짓고 있었다. 나는 의 호기심 때문에 그의 트라우마를 굳이 자극하고 싶지 않았고, 또 마음 한편에서는 자세히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저 내가 노력하면 그의 상처도 치유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아빠가 불필요한 걱정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오랜만에 '희망 보육원'을 검색하였다. 오래된 뉴스를 보니, 그 보육원은 몇 년 전, 결국 폐쇄됐다. 뉴스에서는 ‘아동 정서 학대와 운영 부실’이라는 말이 나왔지만, 아빠가 말했던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석한은 단 한 번도 자세히 말한 적 없었다. 서로 옛날이야기를 하게 될 때면, 그저 오래된 물처럼, 침묵이 고일뿐이었다.


내가 아는 평소의 아빠였다면, ‘그 아이 힘들었겠구나’ 했을 텐데

나는 아빠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또 인정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아빠에게 지지 않고 목소리를 높여 대들어 보기도 했고, 몇 주씩 침묵의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석한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아빠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그렇게 몇 개월 동안 나의 투쟁과 조용한 시위를 말없이 지켜만 보던 아빠는

어느 날 결국, 식탁 위에 놓인 엄마 사진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민아, 계속 그렇게 고집부릴 거니? 휴우— 우선 다시 한번 말하지만 결혼은 절대 허락할 수 없단다.

이건 돌아가신 네 엄마가 살아 있었다 해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딸과 계속 이렇게 지낼 수는 없으니… 밥은 한번 먹자. 하지만 딱 거기까지야"

아빠는 애써 입꼬리를 올려 나에게 미소를 보이려 했지만 여전히 언짢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마치 돌아가신 엄마의 부탁을 들어줬다는 듯, 그의 눈은 사진 속의 엄마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석한과의 약속이 있는, 첫눈이 조용히 내리던 아침. 나는 평소보다 조금 더 오래 거울 앞에 섰다. 먼저 엄마가 생전에 좋아하던 레이스가 주렁주렁 달린 흰색 블라우스를 꺼내 입었다. 그리고 외할머니한테 물려받았다는 작은 진주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누가 봐도 유행과는 동떨어진 옷이었고, 음 걸어보는 진주 목걸이는 영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오늘만큼은 엄마가 내 곁에 있는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아빠는 마치 감정을 꾹 눌러둔 사람처럼 말없이 옷장을 열었다. 그리고 습관처럼 은퇴 전 근무하러 가실 때 입으시던 검은색 등산복들을 주섬주섬 꺼내 입는다. 며칠 전 퇴임식 날 입었던 새 정장이 옷장 안에 드라이까지 되어 버젓이 걸려 있는데도, 아빠는 기어이 등산복을 골랐다.


“아빠, 등산복 말고… 그냥, 정장 입는 게 좋지 않을까?”

나는 조심스레 말했지만, 아빠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등산복을 꺼내 입고 거실을 서성이는 아빠를 보며 마음이 시큰했다. 엄마가 살아 있었다면 아마 이 자리에 함께 있었겠지. 그리고 아빠에게 여보 그 옷 좀 벗어요. 지민이를 위해서라도 깔끔하게 입고 가.라고 따끔하게 잔소리도 하며… 그리고 엄마는 항상 나의 편이 돼줬기에 어쩌면 석한을 반갑게 맞아줬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여주는 자리에 엄마가 없는 것도 속상한데 아빠의 등산복이 나를 더 슬프게 만든다.


나한테서 등을 돌리고 말없이 등산복 지퍼를 끝까지 올리는 아빠를 보며, 결국 나는 말없이 현관문을 나섰다. 아파트 주차장 구석에 도색이 반즘 바랜 우리 차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도 아빠는 엄마의 것들을 치우지 않고 그대로 뒀다. 엄마가 앉던 레이스가 달린 흰색 방석 그리고 백미러엔 햇 빛에 바랜 가족사진과 십자가가까지.


잠시 후, 문을 ‘쾅’ 하고 닫으며 차에 오른 아빠는, 여느 때와 달리 “안전벨트 했냐”는 말도 묻지 않는다. 엄마가 세상을 떠나던 날, “벨트 안 해도 돼”라는 말을 건넨 걸 평생 가슴에 묻고 사는 아빠는, 그 뒤로는 목적지가 어디든 내 안전벨트를 손수 매주시곤 했다. 그런 아빠가 오늘은, 내 쪽으로 단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오직 앞만 바라보고 있다. 무표정한 얼굴 너머로, 수천 가지 생각이 떠돌고 있다는 걸 나는 안다.


우리는 같은 차 안에 앉아 있지만, 마치 서로 다른 시간 속에 있는 사람들처럼 창밖만 바라본다. 서로에게 말을 거는 일 없이, 차창 너머로 흘러가는 눈발만 조용히 따라간다. 삼십 분쯤 지났을까.

“하여간 나는, 그놈이 1분이라도 늦으면 그냥 집에 간다.” 아빠는 또 그런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아빠는 내가 아빠처럼 마음이 단단하지 못하다는 것을 아실까. 그동안 아빠가 했던 서운한 말들이 비수가 되어 나는 괜히 고개를 돌려 반대쪽 창밖을 본다. 눈가에 차오르는 뜨거운 물기를 아빠가 보지 못하게 조심스럽게 삼켰다.


그리고 무릎 위의 핸드폰을 열어 석한이 보낸 이른 아침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누나, 길이 미끄러워요. 천천히 오세요.’

짧은 문장이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배려는 늘 내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그는 분명 식당 문이 열기도 전에 도착했을 것이다.

차가운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고, 문 앞에서 묵묵히 기다리고 있을 그 사람.

그렇게 다정하고 성실한 사람을, 보지도 않고 단호하게 미워하는 아빠가… 야속하다.


눈발 너머, 빨간색 십자가가 뾰족뾰족하게 건물들 옥상 위에 빼곡하다.

‘양석한.’ 그를 처음 만난 건, 벌써 20년 전. 우리 둘 모두 아직 중학생일 때다.

평생을 석정동 작은 아파트 단지에서 살아온 우리 가족은 엄마의 영향으로 동네 한편에 자리한 조그마한 개척교회를 다녔다. 어느 주말, 교회에서 자신을 중학교 1학년이라고 소개한 소년. 그는 한눈에 봐도 자기 발보다 작은 운동화를 신고 있었고, 얼굴에는 연한 반점들이 군데군데 번져 있었지만, 언제 깎았는지 모를 덥수룩한 머리에 어울리지 않는 긴 속눈썹을 갖고 있었다.


너무 앙상해서 50kg도 채 안 돼 보였는데 어깨가 움츠려 들어 있어서 실제 체격보다 더 왜소해 보였다. 그렇게 작고 말 없는 소년은, 마치 투명인간처럼 예배당 한 구석에 용히 앉아 있었다.


작은 개척 교회에서 말이 없는 소년에게 오지랖을 부릴 만큼 한가로운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반년이 넘도록 매주 같은 옷을 입고 나타나 꼭 점심까지 먹고 집에 돌아가는 그를 보며, 교회 사람들은 서서히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그를 눈여겨보게 된 건, 그 무렵부터였다.


처음엔 조용한 동정이었고, 이윽고 호기심으로 변해갔다. "어디에 사니, 부모님은 뭐 하셔, 누구랑 살고 있니?" 누군가는 그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누군가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시작된 질문들에 석한은 점점 더 고개를 숙였고, 그는 습관처럼 대답 대신 낡은 운동화 끝만 바라보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소문처럼 퍼져있 조각들이 하나씩 맞춰졌다. 석한의 부모님은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셨고, 긴 시간 보육 시설에서 지내다 중학생이 된 후에야, 고모와 겨우 연락이 닿아 함께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안타깝지만 그 고모라는 사람은 동네에서 알코올 중독자로 유명했다.


어릴 적 석한은, 지금보다도 훨씬 말이 없었다. 석한이 교회에 오고 몇 해가 흐른 어느 주일, 목사님은 설교 중 “하나님의 말씀이 잘 자라기 위해선 마음의 텃밭이 잘 가꿔져 있어야 한다.”라고 하시며, 불쑥 석한의 이름을 불렀다. 말이 없는 소년에게, 처음으로 무언가를 물은 순간이었다.


그는 당황한 듯 고개를 떨구고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목사님… 저는 마음이 없어요.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그건 석한이 교회에서 말한 가장 긴 문장이었다.

그리고 짧지만 깊었던 그 한마디는, 이상하게도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았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2학년. 엄마가 돌아가신 해. 나는 신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당신이 뭔데, 엄마를 마음대로 데려가나요?”

더 이상 교회를 나가기 싫었다. 목사님의 설교도 위선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아빠의 바람대로, 나는 엄마가 생전에 다니던 교회를 계속 다녀야만 했다.


마음이 젖은 사막처럼 질퍽거리고 다시 갈라지기를 반복하던 시절. 교회에서는 ‘마니토’라는 수호천사 프로그램이 유행했다. 익명의 누군가가 마니토가 되어 선물을 주거나 비밀 편지를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나의 마니토가 석한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석한은 늘 가난했지만, 어디선가 용돈을 마련해 시내 문구점에서 산 편지지에 삐뚤빼뚤,

그러나 꾹꾹 눌러쓴 글씨로 처음으로 나에게 편지를 건넸다.


“누나,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이 손편지뿐이에요.

누나 같이 좋은 사람이 슬퍼하는 게 슬퍼요 누나가 행복해지면 좋겠어요.”


나는 짧은 편지를 읽고, 조용히 석한을 바라보았다.
‘마음이 없다’ 던 소년이, 가장 따뜻한 방식으로 마음을 건넨 순간이었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모든 걸 가졌음에도 내게서 엄마를 뺏어간 하나님보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지만 나에게 그가 가진 전부를 선물한 석한이 보고 싶어서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


석한의 고모는 그가 스무 살이 되던 해,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세상을 떠났다.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석한은, 산 아래 허름한 반지하 빌라로 이사를 갔다. 그리고 가 더 이상 교회에 나오지 않게 됐을 때, 나는 제일 먼저 그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는, 주머니를 탈탈 털어 처음 먹어본다는 파스타를 내게 사주었다.


나는 알고 있다. 석한에게 나는 세상의 전부라는 것을.

하지만 아빠는 희망 보육원에서 자랐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두렵다. 아빠의 반대로 인해 석한과 혹시 멀어지게 될까 봐.


석한이 몇 달이나 고민하며 고른 한정식 집, 고급스럽게 장식된 나무 빗살문이 스르르 열린다. 석한은 마치 잘 훈련된 기계처럼 벌떡 일어나서 아빠의 의자를 빼주려고 재빠르게 다가선다. 아빠는 무심하게 손사래를 치면서 다가서는 그를 제지한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양석한입니다."

석한의 정중한 인사에도 아빠는 묵묵부답, 간단한 대답조차 하려 하지 않는다.


'오늘 아빠는 왜 저러실까.'

내가 아는 교양 있고 다정한 아빠는 이 자리에 없다. 아빠 얼굴을 한 로봇이 아빠 대신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석한은 젓가락을 들었다 놨다가를 반복할 뿐 아까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다. 무엇이라도 먹으면 좋을 텐데… 불안함에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그가 애처롭다.


석한은 갈라진 입술을 잘근 씹으며, 마치 면접관을 바라보듯 아빠의 입만 바라보고 있다. 나는 그런 석한과 아빠 사이에 앉아 두 사람을 번갈아보며약속된 듯 흐르는 적막에 차마 무슨 말을 꺼내기가 어렵다.


석한은 침묵을 깨기로 결심한 듯 뻣뻣하게 팔을 움직여 앞에 있는 물을 조금 마셨다. 그리고 마치 최종 면접장에 들어온 신입 사원처럼 주먹을 무릎에 올리고 결연하게 아빠를 바라보며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저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것을 알기에 저보다 지민 씨를 더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제 목숨과 바꿔서라도 열심히 일할 자신이 있습니다.”


석한의 떨리는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간절함에 나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차오른다.

나는 그 말을 들은 순간, '어쩌면 이제는 아빠보다 이 사람을 더 믿고 싶어 졌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빠는 대답이 없다. 한 번도 양복 재킷을 벗지 못했던 석한의 얼굴에서 굵은 땀이 뚝뚝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방 안에는 무거운 적적만이 감돈다.


아빠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식탁 위에 멈춘 손등은 굳어 있었고, 고개를 떨군 채 긴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 석한은 마치 재판의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입술을 깨물고 눈을 깜박였다.


아빠는 눈을 테이블에 올려둔 채,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희망 보육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네가 더 잘 알 테지.
정확하게 말하겠네. 자네 말처럼, 내 딸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만나지 말게.”


아빠는 희망의 문을 굳게 닫아버렸다. 석한은 마치 맹수 앞에서 살기를 포기한 초식 동물처럼 목에 힘이 꺾인 채 고개가 아래로 떨구어졌다. 그가 만약 지금처럼 침묵으로 일관하지 않고, 차라리 소리라도 지르며 항변했다면 나의 마음이 덜 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석한은 연습한 것처럼,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아빠에게 허리를 90도로 숙인 채 매끄러운 단 보자기에 포장해 온 황진단을 내민다.


'내가 아빠 건강 때문에 힘들어한다는 말을 기억했구나.'

보자기를 쥔 두 손은 차가운 물에 담근 듯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의자를 밀며 일어났다. 그리고 식당문을 쾅, 소리 나게 밀치고 나가버렸다. 그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아빠 쪽으로도, 석한 쪽으로도. 나는 그 둘 사이에 선 채, 몸이 굳었다.


그렇게 어느새 나는 혼자가 되어 있었다. 밖에선 눈이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오늘 아침, 나는 진주 목걸이를 걸며 엄마의 축복을 빌었다. 5년 전 오늘처럼 첫눈이 소복이 쌓이던 날, 조심스럽게 시작했던 우리의 관계를 아빠가 이렇게 찢어놓을 줄은 몰랐다. 문밖으로 나가는 아빠의 뒷모습은 여전히 단호했고, 석한은 아직도 허리를 굽힌 채, 손에 쥔 보자기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나를 올려다보는 순간— 그 눈빛 속에는, 나를 향한 미안함과, 이미 오래전부터 짊어져온 무거운 체념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눈을 외면한 채, 그대로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하얀 세상 위에, 아빠의 검은 뒷모습이 점점 작아져 간다.

그리고 아빠가 내게서 멀어져 가는 걸음만큼, 목에 걸었던 진주 목걸이가, 싸늘하게 식어가는 것만 같았다.


엄마와 차 안에서 헤어지던 그날처럼,
오늘도 나는 안전벨트를 매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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