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낯선 것 03화

3화_예물 시계

단편소설_낯선 것

by Liu Ming
예물 시계


<우식의 이야기>

"여기 빨리 계산해 주세요." 신용카드를 내밀며 식당 직원을 재촉했다.

'석한과 두 번 만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 생각뿐이었다.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돌이켜보면 지민은 어릴 때부터 무엇을 갖고 싶다고 조르거나 고집부리는 일이 없었다. 특히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지민은 마치 아내의 빈자리를 대신하기로 결심한 사람처럼, 절망에 빠진 나를 어른처럼 일으켜 세웠다. 그렇게 어른스러운 지민이 몇 개월 동안 마치 어린아이처럼 석한을 만나달라며 졸라댔다.


하나밖에 없는 딸의 간절한 부탁을 도저히 모르는 척할 수 없었다. 오늘의 약속을 허락한 후, 나는 수도 없이 되네였다. '지민이가 상처받으면 안 되는데...' 오늘 내가 한 행동은 분명히 딸을 위한 최선이었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식당을 나서니 차가운 겨울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겨울 비인지 눈인지 모르는 것이 차 앞 유리에 쌓이고 있었다. 차창에 부딪히는 눈을 머금은 빗소리는 잔잔했지만, 마음은 결코 그렇지 못했다. 낡은 차에 올라타 히터 조그를 부서질 듯 급하게 오른쪽으로 돌리고 조용히 숨을 골랐다. 방금 전, 식당에서 마지막으로 스쳤던 딸의 슬픈 얼굴이 나의 가슴을 여전히 짓눌렀다.


나는 식당 입구 쪽으로 다시 차를 옮겨 세웠다. 지민이 나오는 걸 놓치지 않기 위해, 마치 잠복이라도 하듯 시선을 고정했다. 식당 창문 너머로 보이는 둘의 시간은 마치 허공에 멈춰 버린 듯했다.


당장이라도 식당 안으로 들어가서 외로이 서 있는 지민의 손을 잡고 억지로라도 끌고 나오고 싶었다. 하지만 지민이라면 그 남자를 홀로 식당에 두고 나를 따라서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숨을 고르고, 백미러에 걸린 아내의 사진을 바라봤다.

'당신이 있었다면, 지금 식당에 외로이 서 있는 우리 딸을 어떻게든 데리고 나왔을 텐데...'


'어렵게 키운 딸을 최소한 안전한 사람에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 그게 그렇게 큰 욕심인 걸까.'

아내가 만약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면, 제발 사랑하는 딸의 마음을 돌려 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러나 나의 간절한 마음과 달리 차창 위의 눈은 두껍게 쌓여만 갔다.


지민이 세상에 나오기 전, 나는 경찰 시험에 합격했고, 곧장 강력계에 자원했다. 가 처음에 상경하여 자리 잡은 동대문구에서 범죄를 막고, 약자를 보호하며 범죄자를 벌할 수 있는 자리. 내가 평생을 꿈꿔온 일이었다. 아내도 지민도 그런 나를 보며, 내가 경찰인 것을 항상 자랑스러워했다.


그렇게 만족스럽던 강력계에서 청소년과로 옮기기로 결심한 것은 지민이 열 살쯤 되던 해였다. 오늘처럼 눈이 내리던 어느 날, 열 살도 되지 않은 소년 하나가, 지구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소년은 겨울인데도 얇은 반 팔을 입고 있었으며, 한눈에 봐도 온몸에는 여기저기 멍이 들어 있었다. 머리는 언제 잘랐는지 모를 더벅머리였지만 속눈썹이 유달리 길어보였다.


그 아이는 몸을 덜덜 떨며 말했다. "선생님이요... 또... 또 때렸어요... 온몸에 물... 물을 뿌리면서..."


지구대 안의 경찰들은 모두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했다. 하지만 나는 지민과 비슷한 나이의 소년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갔다. 먼저 소년을 지구대 안쪽의 빨갛게 익은 라디에이터 앞에 앉혔다. 그리고 지민이 평소 좋아하던 따뜻한 코코아 한 잔을 소년의 손에 쥐어줬다.


소년은 그저 살기 위해 경찰서를 뛰쳐 들어왔던 것이 분명했다. 한 겨울에도 슬리퍼를 신고 맨 발로 눈 길을 헤집고 왔을 만큼. 나는 파랗게 얼어붙은 소년의 발을 보며, 평소 잠복할 때 갈아 신던, 신사용 양말 하나를 꺼내서 발에 씌워졌다. 소년은 몸이 따뜻해지는 만큼 마음이 진정되었는지 메마른 입술 어렵게 땠다.


"아저씨... 제가 있는 보육원에 악마가 있어요... 도와주세요."


소년의 떨리는 목소리에,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안개처럼 내 눈앞을 가렸다.


우리 집은 매우 가난했다. 물려받은 것이 튼튼한 몸 밖에 없다고 자주 말씀하셨던 아버지는 다른 집 농사일에 더위와 추위를 가리지 않으셨고, 동네에 불이 나든 홍수가 나든 제일 먼저 뛰어 나가셨다. 설사 다른 사람이 보기에 허드레 일일지라도, 그에 맞는 품 삯을 받을 수만 있다면, 마다하시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 어느 날, 아버지는 이웃집 지붕을 수리해 주시다가, 발을 헛 딛으며 지붕 아래로 떨어졌다. 럼에도 병원에서 치료할 형편이 되지 못했던 우리 집이었다. 버지는 다리를 크게 다치고도 병원에도 한 번 제대로 가보지 못했다. 그 후로 절뚝거리는 아버지에게 더 이상 품 일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믿을 것은 튼튼한 몸 밖에 없다고 하셨던 아버지는 움직이기도 불편한 몸에 자주 괴로움을 토하셨다. 아버지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기까지는 반년이 걸리지 않았다. 집에 주로 누워 계셨던 아버지는 틈만 나면 나와 동생을 불러서 이해가 되지 않는 벌을 주셨고,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을 때는 자주 회초리를 드셨다.


특히 어머니와 크게 싸우신 후에는, "감히 나를 무시해!"라고 하시며, 분이 풀릴 때까지 집 안의 모든 것들을 닥치는 대로 부수거나, 더 이상 부술 것이 없을 때는, 동생과 나를 방에 가두고 문을 걸어 잠근 채 마치 가축을 패듯 매질을 하셨다.


어린 시절 비교적 눈치가 빠른 편이었던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우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날이 서거나 딱딱한 것들을 여기저기에 숨겨 두었다. 손이나 발로 맞는 것이 몽둥이보다는 훨씬 맞을만했기 때문이다.


자기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덩치가 큰 사람한테 이유 없이 자주 맞아본 사람들은 그 두려움을 이해하겠으나, 나보다 일곱 살이나 어렸던 동생은 그러한 이유로 항상 나보다 훨씬 겁에 질려 있었다.


결국, 동생은 아버지에게 머리를 잘못 맞고 그만 열 살도 되기 전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문을 걸어 잠근 마지막 밤, 동생은 나에게 애절하게 말했었다. "형... 무서워, 도와줘..."

그 마지막 날, 동생이 나를 바라보던 눈빛은—

오늘 지구대로 뛰어든, 눈물을 머금은 소년의 눈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나는 겁에 질린 아이들의 눈빛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동생이 산에서 실족사를 했다고 군청에 신고하고 집에서 간단히 장례를 치렀다. 그 시절에는 부모가 하는 말이면 의심쩍을지언정 모두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나는 장례를 치르는 동안, 억울하게 죽은 동생의 한을 마음속에 대신 품을 수밖에 없었다.


장례식이 끝난 다음 날 새벽. 나는 정든 고향을 뒤로하고, 살기 위해서 집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 후로 무작정 서울로 홀로 올라와 동대문에 있는 공장에 취직을 했고, 지금의 아내를 운 좋게 만나며 경찰 시험에 합격했던 것이다.


눈앞의 소년은 이십 년 전에 죽은 동생과 놀랄 만큼 닮아 있었다. 동생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약자에게 폭력을 일삼는 자들에 대한 분노가 마음속에 뒤엉켜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나는 당장이라도 소년의 손을 잡고 희망 보육원에 쳐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강력계에 근무하고 있는 내가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동 학대는 시청에 신고가 되어야 했고, 또 경찰에서도 청소년과 에서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할도 아니고, 보호자도 아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지구대에 있던 다른 경찰들은 애석한 상황을 듣고, 시청으로 전화를 걸어 조치에 나서고 있었다. 내가 죄책감에서 잠시나마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지갑 속에 남아 있던 얼마 안 되는 현금을 꺼내, 그 아이의 주머니에 조용히 넣어주는 것뿐이었다.


그 순간, 소년과 눈이 마주치며 깨달았다. 내가 건넨 건 연민이 아니라, 싸구려 동정심일지도 모른다는 걸. 그렇기에 더더욱—나는 그 아이에게, 비겁한 용서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아저씨가 당장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어.

하지만 곧 시청에서 다른 아저씨들이 조사를 하러 갈 거야.

그리고... 어린 시절, 아저씨도 너와 같았단다. 지금은 힘들겠지만... 공부..."


소년은 체념하는 것에 익숙한 듯, 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가 주머니에 넣어준 돈과, 신겨줬던 양말을 벗어서 나에게 돌려줬다.


나는 소년에 대한 미안함에, 어떻게든 개인적으로 소년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려 애썼다. 소년과에 있는 동료 경찰들에게 사정을 털어놓기도 했고, 또 시민단체에 전화를 돌려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아이의 지옥 같은 삶에 내가 처음 발을 들이게 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내 선의나 노력과는 무관했다.


어느 날, 동대문 강력계로 사건 하나가 접수됐다. 사건이 일어난 곳은 희망보육원. 그곳의 교사 중 한 명이 당직실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는 것이었다.


우리 팀은 곧장 수사에 착수했다. 현장은 잔혹했다. 머리는 둔기에 의해 심하게 함몰돼 있었고, 혈흔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특히, 한쪽 손목은 너덜너덜하게 찢겨 있었고— 온몸엔 마치 여러 방향에서, 여러 사람의 손에 의해 찔린 듯한 각기 다른 깊이와 형태의 자상이 남아 있었다.


열두 대의 감시 카메라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전부 멈춰 있었다. 녹화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오직 아이들의 진술뿐이었다.


하지만 그 대답은 놀라울 만큼 똑같았다.

“모릅니다. 저는 방에 있었어요.”


아이들은 누구도 나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지 못했다. 대신, 그들은 서로를 슬쩍슬쩍 바라보며, 말없이 눈빛을 교환하고 있었다.


우리는 진술을 하고 있는 대부분의 아이들 몸에서 멍과 화상 자국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학대 사실이 살인사건과 연관되어 있다고 본 우리는, 아이들에게 캐물었다. 점점 질문은 더 조여들었고, 우리는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아이들은 입을 다물었고, 아무런 증언을 하지 않았다.


"괜찮아요."
"넘어진 거예요."
"실수예요."

두려움은 침묵을 만들었고, 침묵은 증거를 지웠다. 공포가, 더 큰 공포를 낳고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말이 없었고, 조용했다. 허기진 듯 말라 있었지만, 오랫동안 자신을 가둬온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눈은 또렷이 기억했다. 눈빛 속에는 두려움과 분노, 그리고 약속된 침묵을 동시에 읽을 수 있었다. 결국 사건은 아무런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채, 미제로 종결될 수밖에 없었다.


보육원을 마지막으로 찾았던 날, 나는 눈 내리던 날 지구대로 뛰어들어 왔던 그 소년을 다시 찾아보려 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대신, 그날 내 기억에 남은 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키가 190은 족히 되어 보이는 보육원 원장이었다. 그는 불쾌할 만큼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와 악수하던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섬뜩함을 느꼈다. 그의 손에서 느껴지던 질퍽질퍽함은 마치 진흙 속에서 가시덤불을 움켜쥔 것 같았다.


몇 년 후, 결국 보육원은 폐쇄되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여러 보육원으로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후로, 그곳 출신 선생님들이 하나둘씩 죽어나갔다. 양재천 산책로 옆에서 얼굴이 망가진 채 발견되었고, 입 안엔 싸구려 과자가 가득 들어 있었다. 그것은 아이들에게 저녁 대신 먹이던 것이었다.


사건은 연쇄적으로 발생했고, 범인을 잡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확신했다.

그건 우연이 아니라, 복수였다. 분노가 일으킨, 아주 조용하고 치밀한 인과.


그렇기에 지금, 딸의 곁에 있는 이 남자—석한—이 그곳 출신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나를 불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석한은 이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곳’을 통과한 사람이었다. 그 사실 하나면 충분했다.


석한을 향한 미움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딸을 지키기 위한, 지난날 지키지 못한 동생과 아내에 대한 죄책감의 연장선이었다.


지민은 따뜻하고, 여리다. 아내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면 못 지나친다. 그런 딸이, 자신과는 너무 다른 세상에서 자라온 석한에게 이끌린다는 사실이 불안했다. 그리고 나는 오늘 느낄 수 있었다. 지민이 그 남자의 말 없는 인내를 얼마나 애틋하게 느끼고 있는지를. 하지만 그는 그 인내가, 고통에 대한 침묵의 대가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경험으로 느껴온 사람이다.


차 안이 입김으로 서리가 벌써 가득 찼다. 나는 손목시계를 바라봤다. 아내가 결혼식 날 해준 예물 시계. 시곗바늘이 식사를 시작하던 시간에 맞춰 멈춰져 있었다.


불안한 마음에 참지 못하고 차문을 열었다.

눈은 여전히 조용히, 천천히, 그리고 무겁게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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