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로프 팔메 암살, 그 이후
- 울로프 팔메 암살, 그 이후 1
1986년 2월 28일, 스톡홀름의 중심가 스베아에서 몇 발의 총성이 울렸다.
늘 그랬듯 경호원 없이, 아내와 단둘이 영화를 보고 나와, 지하철을 타기 위해 거리를 걷던 울로프 팔메를 향한 총알이었고, 그로써 팔메는 이승에서의 운을 다하고 말았다.
그의 아내는 그 저격범의 얼굴을 보았고, 이를 바탕으로 범인의 몽타주가 만들어졌다.
스베아가는 스톡홀름의 가장 중심에 있는 거리이고, 심지어 그날 그 시각에는 영화가 끝나고 많은 사람들이 영화관에서 나온 후였으므로, 사람들이 몇 명이라도 있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웨덴 검찰은 그날의 증거나 아내 외의 추가 목격자를 단 한 명도 찾아내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 암살은 아직도 범인이나 배후는커녕, 단순 증거 하나 찾지 못한 채 영구미제사건이 되어버렸다.
울로프 팔메가 암살당했을 때, 스웨덴 정부는 팔메수상의 장례식을 평소 그의 의도대로 간소하고 평범하게 치르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스웨덴 국민 전체의 자발적인 국상이 되었고, 그가 암살당했던 장소인 스베아 거리는 그를 기리는 국민들이 한 송이씩 들고 와 쌓인 장미꽃(장미꽃은 사회민주당을 상징하는 꽃이다.)으로 산을 이루었다. 팔메를 잃은 스웨덴 국민들의 슬픔이 얼마나 깊은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대목이다.
팔메를 기리는 국민들의 발길은 끝도 없이 이어졌고, 그를 기리는 장미꽃은 스톡홀름 시내 한가운데에 산처럼 쌓여만 갔다. 이에 교통방해 등 질서문란을 우려한 스웨덴 정부는 강제로 장미꽃산을 정리해 버렸고, 국민들은 강하게 반발하고 비판하였다.
한국의 군사독재 시절, 한 대통령과 그 영부인이, 대통령이 이끌던 사람들에 의해 시기를 두고 차례로 총살당해 죽었을 때, 일주일 간의 강압적인 국상이 되고, 막대한 세금과 엄청난 양의 꽃장식으로 화려하고 성대하게 치러졌던 장례식이, 후일 오히려 국민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것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평소 냉소적이고 이성적인 스웨덴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감정적이고 격정적이 되는 모습을 그때 처음 보았었다. 그때까지도 막연하게 미국의 자유방임주의를 신봉하고 있던 많은 스웨덴 사람들까지도 오히려 팔메의 위대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어려서부터 한국이 미국의 도움을 많이 받았음을 들어왔고, 힘없고 못 사는 개발도상국의 국민으로서, 막연하게 미국을 선망하고 미국의 자유주의를 신봉하던 사람들 중의 하나였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설사 자신이 스웨덴이라는 사회민주제도의 따뜻한 보호 아래 살고 있는 상황 하에서도 크게 변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때 아닌 팔메 수상의 죽음은, 일반 서민으로써 누리고 있던 복지정책의 수호자를 잃었다는 상실감을 가져다주었고, 그 정책이 얼마나 인간적이고 위대한 정책이었는지를 여실히 깨닫게 해 주었으며, 울로프 팔메 덕분에 누리고 있던 복지의 이상적 실체가 오히려 그의 죽음으로 충격처럼 위대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 울로프 팔메 암살, 그 이후 2
물론 사민당은 팔메의 죽음 후에도 극도의 기민성과 능률성을 보이며, 일사불란하게 당내 차순이었던 환경부 장관을 자동으로 수상으로 임명하면서, 팔메의 빈자리가 스웨덴의 기본 정책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을 스웨덴 국민들에게 안겨주었다. 그러나 진정 커다란 변화는 그때부터였다.
그때까지 팔메는, 자국 내 보수당의 정략과, 입바른 팔메를 눈엣가시처럼 생각하고 의도적으로 스웨덴 내에 팔메에게 불리한 여론을 조성하던 주변국가들의 정치공작에 의해, 많은 미움을 사고 있던 게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에 합세하는 언론과, 이에 휩쓸려 아무런 이유 없이 팔메와 그의 정책의 공을 깎아내리는 서민들이 스웨덴 내에서도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복지제도가 흔들릴 가능성과 그 불안감을 맛본 시민들은 일제히 사회민주주의로 되돌아선 것이다.
그것은 그때까지 미국과 같은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며 최고의 인기몰이를 하던 제일 보수야당의 당수가, 팔메 수상의 죽음 직후에 자진사퇴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올바르고 정당한 이념으로 약자를 우선시하고, 세금을 통한 사회분배로써 모두에게 평등한 발전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애쓰던 울로프 팔메의 정치이념이 얼마나 위대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울로프의 죽음으로 이를 모든 국민들이 깨달아, 자민당의 입지는 최소로 줄어들 것을 그 자신 역시 그제야 깨닫고, 그의 죽음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팔메가 죽은 후 한국에서 살고 있던 한 한국친구에게서 들었던 얘기가 기억난다.
그 친구는 팔메의 죽음을, 이상을 추구하다 현실의 벽에 부딪쳐 실패한 한 이상주의자의 죽음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한 나라의 수상이 경호원도 없이 거리를 누비다니 죽을 짓을 자초한 거지.'
팔메의 죽음을 간단한 비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그의 말에, 나는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와 답답함을 느꼈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잘못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고, 그에게 길게 설명해 봐야 그는 나의 분노를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의견은 분명 그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팔메의 죽음을 보도한 한국의 언론은 당시 군사독재 정권에 의해 조정당하는 허수아비였을 것이고, 한국의 독재자는 울로프 팔메를 직간접적으로 죽이고 싶어 한 것으로 보이는 미국 정부의 꼭두각시였을 뿐만 아니라, 스웨덴 수상의 위대한 죽음이 독재자 자신의 위상을 위협할 것이 두려워 팔메의 죽음이 비웃음거리가 되는 상황을 진심으로 반겼을 것이었다.
실제로 미국의 언론 역시 팔메를 현실성 떨어지는 이상주의자로 보도했고, 스웨덴의 사회민주정치는 실패한 복지모델이라고 떠들어 대었다. 이는 당시 사회주의의 물결이 일고 있던 중앙아메리카를 강력하게 저지하려던 미국의 입장으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스웨덴의 사회보장제도가 실패한 정치모델이라는 미국뉴스는 스웨덴에서도 방송되었고, 스웨덴사람들은 하루아침에 날벼락처럼 영웅을 잃은 슬픔과 함께, 정치적 패배국의 국민들로 낙인찍히는 아픔까지 감내해야 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의 선거에서 스웨덴의 사회민주당은 참패하였고, 스웨덴은, 노동자들의 월급과 사업주들의 이익을 난도질하여, 이런저런 명목의 도둑세금으로 국민들의 돈을 빼앗아 가는 유럽 여러 나라들의 기다란 명단에 합류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