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단 Apr 28. 2024

법이 늙었다 18

울로프 팔메 암살과 그 배후

    - 울로프 팔메 암살, 그 이후 3


  울로프 팔메의 죽음은, 사실상 세계 각국의 주목을 끌게 되었고, 그때까지 스웨덴이라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나라와 그 수상 울로프 팔메의 정치적 이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세계 각국의 정상들은 스웨덴 정치가들이 하는 말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고, 그중의 일부는 스웨덴의 인권주의와 보편주의에 입각한 이상정치체제를 몹시도 껄끄럽고 불편해하였다.

 그 증거로써, 그 후 스웨덴의 가장 인기 있고 입바른 정치가들은 대거 암살당하고 만다.


 1988년 12월 팬 에이엠 103 항공기의 추락으로, 팔메의 추종자이자 협력자였으며 유엔 이사국장이었던 베른트 컬숀이 죽임을 당했고, 그로써 인종차별국가 남아프리카는, 나미비아에게 주기로 했던 독립을 아주 먼 훗날로 미룰 수 있게 되었었다.

 2003년 당시 스웨덴의 유력한 차기 수상이었던 외무부장관, 안나 린드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무차별 공격을 비판하였고, 한 TV좌담회에서 이스라엘의 샤론은, 사람생명을 푸줏간 고기처럼 도륙하는 도살자라고 맹렬히 비판하였다. 그리고 2003년 9월 11일 그녀는 칼로 배를 22번이나 찔려 온 내장을 드러낸 채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어째서 세계의 내로라하는 정상들이, 스웨덴이라는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나라의, 수상도 아닌 정치인들의 발언에, 그토록 신경을 곤두세우고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영향력과 파장이 생각보다 깊고 넓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항상 바른말을 하는 나라 스웨덴의 정치인 아무개가, 어느 나라의 아무개를 비판했다는 자체만으로도, 당사국으로서는 머지않아 닥쳐올 변화의 물결을 예상하고 벌벌 떨만한 충격이 되기 때문 아닐까?

 실제로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정책과 오스트레일리아의 백인우호주의는, 팔메의 죽음 이후, 세계 각국의 비판과 유엔의 압박으로 수세에 몰려,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팔메가 예언하고 그래야만 한다고 주장했던 대로.


 그렇다면 스웨덴의 사회민주제도는 과연 미국이 떠들어대는 것처럼 실패한 것일까?

 스톡홀름대 교수로 역임하고 있던 최연혁 교수가 2006년에 발표한 스웨덴 사민당 패인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사민당은 팔메의 죽음 후 선거에서 실패했으나, 그것은 스웨덴 국민들의 사민당 자체에 대한 불만이라기보다는, 그 당시 울로프 팔메 이후 그 자리를 이어받은 사민당 수상의 호사스러운 사생활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과 정치결과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새로 정권을 잡은 우파인 자유민주당 역시 팔메의 복지제도의 유지를 천명하고 있어, 시민들은 사민당의 복지제도의 골격과 틀은 민주당이 집권당이 되어도 계속 유지되어 나갈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후에 스웨덴이 대부분의 서민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럽연합에 가입하게 되면서, 스웨덴에 새로이 많은 종류의 세금과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많은 법제가 생겨났고, 그들의 확고한 노후를 보장했던 노후연금도 대폭 삭감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웨덴은 여전히 대부분의 다른 나라들보다는 비교적 사회보장이 잘 되어있는 나라이고, 그 큰 틀은 울로프가 구축해 놓은 사회보장제도 안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았다.

 스웨덴 사람들은 '복지는 우리의 자식이며, 우리는 이를 죽이지 않을 것'이라면서 그들의 원칙을 포기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고 있다.



    - 울로프 팔메 암살과 그 배후


 울로프 팔메는, 사실 국제무대에서 솔직하고 거침없는 발언들로, 많은 다른 나라의 정상들을 자극하였고, 특히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정책을 적극 지지하고 있던 영국의 대처 수상과 유럽 왕족들을 긴장하게 하였었다., 또한, PLO를 공격하고 탄압하는 이스라엘과, 이를 지지하는 미국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런 그가 경호원 없이 아내와 단둘이 영화를 보고 나와 평범하게 지하철을 타기 위해 거닐던 스톡홀름 시내 한 복판에서 총살을 당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팔메의 암살에 대해 공개적으로 명쾌하게 밝혀진 배후가 없는 가운데, 여러 가지 추측들이 나돌고 있다.


 우선 암살을 당하기 전, 팔메는, 사회보장제도가 스웨덴 자국 내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그의 사회보장제도는 곧 세계적 추세가 되리라는 믿음을 TV공개석상에서 밝힌 바 있다.

 그는 '영국 대처 수상과 미국 부시의 시대는 곧 갈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살아남기만 하면 된다.'라는 말로 스웨덴의 사회민주정치가 세계 정치 모델의 대안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의 사회보장제도가 당시 소련의 공산체제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같은 부류의 사회제도로 보고, 이의 확산에 정치적 위협을 느낀 자본주의 국가 우두머리들의 정치적 공작의 일환으로 울로프 팔메가 암살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물론 유대인들의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세계 여러 나라에서 국제적 기업들을 경영하고 있던 사업주들의 모국인 미국이 그중 하나였고, 그 미국이 중앙아메리카에 소련과 같은 사회주의의 물결이 일고 있음을 몹시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으며, 그 중앙아메리카에서 여러 정치적 음해공작으로 사회주의를 주장하던 정치인들을 몰락하게 했음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일 것이다.


 울로프 팔메는, 미국 소련과 같은 강대국들의 패권주의를 비판하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미국의 베트남전쟁에 반대해 데모를 벌이는가 하면, 소련의 프라하 침공에 반대하는 항의 시위에서 시민들과 함께 행진하기도 하였으며, 남아프리카의 유색인종차별주의에 반대하여 남아프리카에 대한 경제적 제재 조치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는 '인종차별국가는 재정비되어서는 안 된다. 없어져만 한다.'라고 말하여, 남아프리카나 호주의 인종차별주의정책에 강하게 반대하였다.


 또한 그는 아프리카 민족회의인 ANC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인 PLO에 정치적 경제적 지원을 하여 이스라엘의 눈밖에 나는 행동을 하기도 하였다.


 또 다른 정황으로는, 팔메가 당시, 스웨덴에 당연시되고 있었던 입헌군주제도, 즉, 아무런 하는 일 없이 세금만 낭비하는 스웨덴의 왕족들과 그에 따른 입헌군주제를 없애려는 생각으로 국민들을 설득하고 있었고, 대다수의 스웨덴 국민들도 스웨덴에서 그즈음에 왕이 없어지는 것을 당연히 일어날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점이다.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입헌군주제의 필요, 불필요를 토로하는 수업을 하게 하였는데, 대부분의 스웨덴 학생들이 입헌군주제의 불필요성을 주장하고 있었고, 미디어매체에서도 대대적으로 입헌군주제의 불필요성에 대해 다루기도 했었다.

 이는 자국 내 군주나 귀족들을 위협하는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입헌군주제를 고수하고 있던 다른 많은 나라들도 위협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이에는 물론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 일본 등 입헌군주제를 고수하고 있는 많은 국가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고, 그들의 막강한 채권자였던 미국과 이스라엘도 그에 한몫하였을 것이었다.


 유럽의 왕실이나 귀족들이 예로부터 그 품위유지를 위해 유대인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었음은 유럽의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법적으로 땅을 가질 수 없었으므로 자신들의 부를 대부분 보석이나 금은장신구에 투자하고 있었고, 이를 탐내던 왕족들은 그 값비싼 보석과 장신구들을 빼앗은 대가로, 왕족들의 토지를 기반으로 살아가던 소작농들에게서, 유대인들이 직접 세금을 징수할 수 있게 함으로써, 대다수의 국민들이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었다. 그 이자율 또한 만만치 않게 높아서, 유대인들이 나라도 없는 소수민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를 뒤흔드는 부유한 민족일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유럽왕정을 위해 대신 그들이 거둬들인 엄청난 세금과 그 높은 이자 덕분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 때문에 유대인들이 유럽 서민들에게 예로부터 뿌리 깊은 미움을 사 왔고, 세계 제2차 대전 중 독일에서 발생한 대대적인 유대인 학살도 그 일환이었음은 대부분의 유럽인들이 알고 있는 바일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치들이 자행한 유대인 학살에 어떤 합리적 이유가 있었다고 말할 수 없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울로프 팔메의 암살에 대해 책을 쓴 저자들 중 일부는, 팔메를 암살한 배후가 미국, 영국, 러시아, 이스라엘, 남아프리카나 호주 등 패권국들 중 하나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었고, 자신들의 추측 때문에 자신들마저도 어려움을 당할지 모른다는 우려에, 그 책의 출판을 오래도록 미루기까지 하였다. 또한 그들이 울로프의 암살 배후로 어떤 세력을 특정 짓거나 하지도 않았고, 단지 몹시 에둘러 암살 당시의 국제적 정황과 배후의 가능성들만을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이 글로 인한 위험성을 예상을 안 한 것은 아니나, 그러려면 우선 많은 이들이 이 글을 읽게 되어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그 어떤 어려움도 감내해야 하고, 감내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시작하였다.

작가의 이전글 법이 늙었다 17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