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한양도성 축성, 그 변화와 기술 1

조선시대의 성곽 축조는 한양도성이 대표적인 축성이었고, 태조 때의 성곽 축조, 세종때 재정비와 이후 지속적인 관리가 이루어졌으며, 특히 임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북한산성의 수리를 통해 수도를 방어하기 위한 체계를 갖추어 왔다. 이러한 성곽의 축조과정에서 축성기술의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고, 시대상황의 변화에 따라 도성 수축과 운영도 달라지게 되었다.


1. 태조의 도성 축조

한양도성은 궁궐과 대묘의 수리 이후 태조 4년(1395)에 도성축조도감(都城造築都監)을 만들어 판삼사사 정도전으로 하여금 성기(城基)를 정하도록 명하였고, 다음해 1월 9일 민정 11만 8천 70명을 징발하고 개기제를 올리고 축성을 시작하였다. 48일만인 2월 28일에 1차 성역을 마쳤는데 총 길이 59,500척에서 토성이 약 70%, 석성이 약 30%를 차지하여 초축 당시의 도성은 험한 산지를 제외한 대부분이 토성이었다. 뒤이어 1차 축성 시 무너진 곳과 미진한 곳에 대한 2차 축성을 8월에 시작하여 49일 만인 9월 24일에 마무리하고 4대문과 4소문의 이름을 명명하였다. 흥인지문은 태조 6년(1397)에, 숭례문은 태조 7년(1398)에 각각 완성되었는데, 성곽의 축조 이후 연차적으로 성문이 완료되었다. 이후 풍수해로 무너진 곳을 재축성 하였고, 태조 7년 5월 경기좌도와 충청도 주군으로 하여금 도성을 보완하게 하여 성의 둘레가 9천 7백 60보(步)가 조금 넘었다고 기록함으로써 태조 연간의 도성 수축이 마무리 되었다.


2. 세종의 도성 재정비

태조 이후 세종 때에 도성에 대한 재정비가 이루어졌다. 세종 3년(1421) 10월에 도성수축도감(都城修築都監)을 설치하고, 유정현·이원·김승주로 도제조(都提調)로, 박자청·전흥·이명덕·이천(李蕆)·조계생(趙啓生)으로 제조(提調)를 삼고, 부사(副使)와 판관(判官) 등을 두어 대대적인 도성의 축성 준비를 하였다.

같은 해 10월 25일에는 도제조인 평양 부원군(平壤府院君) 김승주(金承霔)가 말하기를, “모두 돌로 쌓는 것이 가하고, 그렇게 될 수 없다면, 사현(沙峴)으로부터 남산(南山)에까지 외국 사신들이 볼 수 있는 데만 돌로 성을 쌓아야 한다.”라고 하여 도성을 모두 돌로 쌓아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후 도성 공사에서는 모두 석성으로 바꾸어 쌓는 계기가 되었다.

12월에는 우의정 정탁으로 도성수축도감 도제조(都城修築都監都提調)를 삼고, 제조(提調) 33명과 사(使)·부사(副使)·판관(判官)·녹사(錄事)를 합하여 1백 90명을 더 두어 축성 조직을 더 강화하였다. 실제 부역 인력은 경기, 충청도, 강원도, 황해도, 전라도, 경상도, 평안도, 함길도 등에서 총 32만 2천 4백 명이었다. 공장(工匠)이 2천 2백 11명이 참여하였다. 다음 해인 1422년 1월 15일 도성 수축이 시작되었고, 2월 23일에 완료되어 한 달도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에 진행되었다. 공장의 참여는 중앙과 각 지방의 관청에 소속된 공장을 총 동원한 것으로 보이며, 태조 때의 토성을 석성으로 쌓음에 따라 석장의 참여가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써 도성의 역사(役事)는 38일 만에 마쳤다. 태조 때의 토성과 일부 무너진 석성에 대하여 전부 성을 돌로 쌓았는데, 험지(險地)에 위치한 도성 부분은 높이가 16척이고, 그 다음으로 높은 곳이 20척 높이이며, 평지에 위치한 도성은 높이가 23척이었다. 이는 태조 때의 평지성 높이인 25척보다는 2척이 낮다. 성곽 축성에 사용된 쇠가 10만 6천 1백 99근, 석회(石灰)가 9천 6백 10석이다.’라고 하여 성곽 축조에 쇠와 석회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쇠의 사용은 돌과 돌을 연결하는데 사용된 나비은장, 돌의 수평을 맞추기 위한 철편 등으로 보이는데, 이는 발굴과 수리에서도 확인되었다. 단순한 돌의 쌓기에 이렇게 많은 쇠의 사용은 의문이 들게 하는데 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겠으나, 돌의 가공에 사용된 정 등의 연장이나, 장비 등에 사용된 쇠가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2010년부터 숭례문 좌우성곽을 복원을 시행하는데 전통 인력가공방식을 적용하였고, 돌의 다듬기 정도는 고운정과 거친정 등 정다듬 가공을 주로 하였다. 가공에는 쇠로 만든 정을 사용하였다. 인력가공작업으로 마모되거나 부러지고 휘어지는 등 정의 끝이 쉽게 무뎌졌는데, 이들을 대장간에서 정벼르기라는 재가공 작업을 하였는데, 사용된 정만 1인당 하루헤 수십개가 넘었다.

석회의 경우 주로 여장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장돌이 조선말의 정형화된 형태의 여장이 아니라 작은 돌을 사용하여 돌 사이의 접착과 공간 충진을 위해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9세기말 숭례문 사진에서 좌우 성곽 여장에 작은 돌을 쌓고 강회몰탈을 이용하여 여장을 형성하였는데, 세종 당시의 여장과 유사할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석축의 돌 틈에도 일부 석회가 사용된 것이 확인되었다.

장충동.png 장충동지역 성곽(세종 연간 축성 양식)
인왕산.png 인왕산구간 성곽(세종 연간 축성 양식)

수축이 완료된 도성은 영조척으로 60,892척으로 현재의 도성 길이 18.3km와 같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세종 3년(1448) 12월의 기사에서 “각도 주현(州縣)의 민호의 많고 적음을 병조·공조·금화도감에서 함께 마감하여 척수를 분정(分定)하고, 각각 나누어 받은 곳에 만일 무너진 곳이 있으면, 금화도감에서 그 무너진 척수(尺數)를 검사하여, 그 수축할 군인의 수를 헤아려서 해조(該曹)로 전보(傳報)하여 계문(啓聞)하고, 해당 주현관(州縣官)에게 행이(行移)하여 농사 틈에 군정을 뽑아 거느리고 와서 수축하게 하고, 금화도감이 검찰(檢察)을 전장(專掌)하게 하여, 영구히 항식(恒式)을 삼게 해달라….”는 내용에서 수축 구간의 분담과 책임공역, 지속적인 도성관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태조 때의 축성은 토성과 석성이 7:3으로 문지 등 중심공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토성으로 쌓았다. 또한 민정을 동원하였으며, 단기간에 공사를 진행하였다. 이는 농번기를 피해 민정을 통원하였기에 시간을 끌기 어려웠을 것이다. 동원된 민정은 강제노역으로 음식과 잠자리를 알아서 해결해야하는 어려움이 따랐다.

세종 때의 도성 재정비는 토성이었던 것을 모두 석성으로 쌓았다. 또한 공장 2천여명을 동원하였고, 쇠 10만근, 석회 9천석 등을 사용하였다. 이는 태조 때의 미약한 공장조직이 어느정도 체계를 갖추었고, 안정된 물자지원도 가능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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