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한양도성 축성, 그 변화와 기술2

숙종 때의 방어체계 변화에 따른 도성 정비


숙종 때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도성 방어에 대한 의식이 고취되면서 도성 뿐 아니라, 북한산성의 축조 등 방위를 위한 논의가 있었다. 숙종 24년(1698) 4월 19일 궁성 및 도성 축조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20일에는 궁성과 도성의 무너진 곳을 삼군문에 명하여 수리하는 문제를 논하였다. 숙종 30년(1704) 2월 3일에는 도성방어를 위해 북성을 쌓거나, 현 도성을 개축하는 등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2월 15일에는 도성의 그림을 그려 돈대의 설치나, 동대문지역에 해자 설치 등 구체적인 방어계획에 따른 도성의 수축방안을 논의하였다. 이후 숙종 30년 3월 25일 삼각산에 고유제를 지냄으로서 축성이 시작되었다. 오군문이 각각 지역을 분담하여 진행하였는데, 먼저 일정규격의 돌 떠내는 일이 먼저 시작하였고, 9월 이전에 각 군문에서 7~8천 덩이를 만들었으나, 여름철 가뭄으로 일시 중지 되었다가 다시 시작되었다. 9월의 실록기사에서 국초에는 도성의 성벽이 없어 서둘러 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었으나, 지금은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으므로 형편을 보아가며 점진적인 수축을 하자는 주장이 더 강하였다. 또한, 성첩의 기존 돌도 다시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숙종 31년에도 수축이 계속되었는데 8월 21일에 수어청에서 도성 동편 120보를 개축하였고, 8월 30일에는 어영청에서 도성 서편 75보를 개축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숙종 35년(1709) 10월 5일 숙종실록에는 여장만을 수축할 것을 계청하고 어영청과 훈련도감에서 수축을 담당하였다. 숙종 37년에는 돈의문의 누문공사가 시작되었고, 10월에는 어영청에서 동서남북의 체성 440보와 여장 4,866보를 완성하였다. 이후에도 무너진 곳과 여장을 새로 쌓았다. 숙종 30년 2월 좌윤 윤취상(尹就商)이 아뢴 내용에서 ‘지금은 여장(女檣)이 모두 무너져 한 곳도 완전한 데가 없어…’라 하여 여장이 대부분 무너져 원형이 남아 있지 않았음을 지적하였고, 이후의 축성에는 여장 수축 내용이 더 많이 나타난다.


숙종 때의 도성 수축은 왜란을 겪으면서 전반적인 방어체계를 다시금 둘러보는 계기가 되었다. 수축의 방법도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특히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홍이포’라고 하는 공성무기의 위력을 실감하였고, 이후 전쟁은 조총과 화포를 주로하고 궁시와 창검을 보조무기로 하는 형태로 바뀌게 되면서 성벽도 옹성과 포루를 곳곳에 설치하고 성돌도 크고 다양한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또한 숙종 때의 축성 시 성벽이 쉽게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돌의 크기를 가로 세로 각각 2자 크기의 정방형으로 가공하여 수직에 가깝게 쌓아 올렸다. 돌의 마찰을 극대화하여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한 방법이면서, 돌 크기를 규격화하여 가공과 쌓기에서 시간과 공력을 줄이려는 노력의 결과로 보여 진다. 이 밖에도 축성의 주체가 태조 때의 민정, 세종 때의 군정이란 징발적 성격에서 숙종 때에는 오군영으로 바뀌었고, 오군영이 분담하여 쌓았고, 책임구역도 나누어 설정하였다.

서대문인왕산구간.png 서대문과 인왕산간 성고가 현황(숙종연간의 축성 양식)
숙정창의문구간.png 숙정문과 창의문간 성곽현황 (숙종연간의 축성 양식)


숙종 대에 축성한 성곽은 현재에도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현재 남아 있는 성곽을 기준으로 숙종 연간의 축성방식을 보인 성곽은 주로 북악과 성북동 지역, 숭례문 서측 지역(현 상공회의소), 혜화문과 흥인지문 지역 등에서 나타난다. 전체적으로 보면 태조 연간이 11%, 세종연간이 48%, 숙종연간이 34%이다. 세종 때 토성을 석성으로 축조하는 대대적인 공사로 인해 가장 많이 남아 있고, 태조 연간의 성곽은 남산지역에 주로 남아 있다. 이로 미루어 숙종 때의 수축은 태조와 세종 연간의 성곽이 무너진 곳에 대한 수축으로 권역별로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2025년 8월 1일 한양도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대상으로 선정되어 2027년이면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것으로 보인다. 한양도성과 연계된 북한산성과 탕춘대성 등은 조선시대의 도성을 방비하기 위해 쌓은 성으로 630여년간 재축성과 보수 등을 거쳐 지금까지 잘 남아 있다. 훼손되어 없어진 부분도 있지만, 시대별 양식과 당시의 축성기술이 잘 남아 있다. 이를 잘 보존하고 연구해서 그 가치를 후세에 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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