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이후 도성의 연례적 수리
영조 이후 도성의 연례적 수리
도성은 영조 때에도 지속적으로 수축되었다. 영조 19년(1743)에 각 군문에서 분담하여 허물어지는 대로 다시 수축할 것을 명하였고, 영조 21년(1745)에는 삼군문에서 지역 분담을 보고하였다. 숙정문(肅靖門) 동변 무사석에서 돈의문(敦義門) 북변까지 4천 8백 50보를 훈국(訓局)에 분수하고, 돈의문에서 광희문(光熙門) 남촌 집들의 뒤까지 5천 42보 반을 금위영에 분수하고, 광희문에서 숙정문까지 5천 42보 반을 어영청에 분수하였다. 특히 영조 연간에는 여장에 대한 공사가 많이 나타나는데 9월에는 금위영 내 남소동 근처 여장 퇴락처에 대한 공사를 9월 19일부터 개축을 시작하겠다고 계하였고, 11월 2일에는 훈련도감에서 창의문 북변 체성 20보 개축처와 여장, 돈의문 북쪽 여장 퇴락처 98타를 수축하였다. 영조 연간에 각종 문헌에 총 30여건에 대한 수축기사가 있었고, 정조 연간에는 무너진 체성의 보수가 10여 차례 나타나고, 헌종 10년(1844) 5월에 훈련도감 구간의 여장 1,574타, 금위영 구간 1,627타, 어영청 구간 1,598타를 마쳤다고 하여, 여장의 상당부분을 수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종 때에도 무너진 구간에 대한 수축이 지속되었고, 특히 8월에서 10월에 공사한 것을 보면 여름철 장마로 인한 붕괴가 주요 원인이며, 도성은 이처럼 계속해서 무너지고 수축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유지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도성 수리와 관련한 특기할 만한 기록으로 『승정원일기』에 ‘도성 축성에서 외면은 석축으로 내면은 흙으로 메워쌓는다’라는 내용이 전한다. 이로 미루어 조선시대의 성곽 뒤채움에 흙이 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고, 실제로 도성의 성곽 발굴에서도 뒤채움은 흙과 잡석이 섞여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각자성석의 기록으로는 순조 때의 여장이 대부분이지만, 각자가 없는 여러 형태의 여장도 많이 남아 있어 어느 시기의 것이 가장 많은지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숙종 이후의 여장이 대부분이며, 숙종 때 여장이 완전한 곳이 없다는 기록에서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또한, 영조 22년(1746)에 여장에 회를 사용한 기록이 나타나는데, 여장돌이 쉽게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회로 접착하는 역할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여장은 체성에 비해 쉽게 무너지는 문제로 인하여 숙종 이후 여장에 대한 수축이 많이 나타난다. 현재 남아 있는 사례 중 세종 이전의 여장 원형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의 여장은 숙종 이후의 여장으로 판단된다. 각자성석(刻字城石)으로도 여장의 축조 시기를 판단해 볼 수 있는데, 각자성석 중 여장에 남아 있는 사례를 보면 총 19개의 연대를 알 수 있는 각자가 남아 있는데, 인왕산~북악산~숙정문 구간에 17개가 있으며, 이 중 15개가 순조 연간 것이고, 2개가 철종 연간이다. 광희문 지역에도 2개가 있는데 순조 연간의 각자이다.
"嘉慶十二年 (순조 6년) "
한편 현대의 여장 수리는 높이 30cm 내외의 여장석 4단을 쌓고 옥개석을 올리는 형태로 정형화되었다. 이는 여장의 쌓기 형태가 여러 가지가 나타나다가 가장 효과적인 축성방법을 선택한 것으로 보여진다. 인왕산구간의 순조 연간 여장은 총안 윗 돌을 凸의 거꾸로된 형태로 가공하였는데 이후 이러한 형태는 사라지고, 고종 때에 쌓기와 가공의 단순화를 통해 여장의 정형적인 틀이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여장의 다양한 형태는 숙종 이후 지속적인 여장의 수리를 하였고, 그때마다 형태가 조금씩 변화되었다. 당시의 여건과 기능자의 수법, 관리자의 요구가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다양한 형태와 양식의 여장을 찾아 보고, 각자성석에 나타난 연대를 감안하면서 살펴본다면 또다른 성곽 축성의 역사가 흥미롭게 느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