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 머묾 함양 (삼일 함양 여행)

2025.4.11~4.13.(금-일)

by 준환

함양은 경상남도에 있다. 대전에서 경부고속도로와 갈라진 중부(대전 통영)로 올라 금산과 무주 경계를 이룬 금강을 지났다. 동이나 서로 치우치지 않고 아래로 곧장 달리면 서쪽 진안고원과 북쪽 덕유산, 남쪽 지리산을 병풍처럼 두른 곳에 작은 분지 함양이 있다. 남원, 산청, 합천에 가리어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 나도 이쪽은 처음이었다.


이월 군산 가족여행 중 제안, 아내는 친남동생이 회사 휴양소에 당첨되어 처가와 함께 주말 삼일 머물자고 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불참할까 하다 먼 거리 아이와 둘만 보내는 게 마음에 걸려 함께 나섰다. 비록 가운데 날은 비가 예보되었으나 출발일과 돌아오는 날은 맑음이다.



첫날 함양 한옥, 맑음


세 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 맞이한 숙소는 한 채 한옥이었다. 백오십 년 된 옛것을 깔끔하게 수리한 집. 안은 천장 나무 서까래와 그사이 기다란 주광색 등이 하나인 양 잘 어울렸다. 후원 대나무 숲이 커다란 액자처럼 보이는 큰 유리문과 창호 문 안쪽으로 촘촘한 쇠 그물 방충망도 원래 것에 비해 두드러지지 않았다. 과거와 현대가 조화 이룬 모양.


창 너머 보이는 뒤편 대나무 숲, 낮과 저녁


밖으로 나갔다. 처마에서 떨어진 빗물에 모래땅이 일정한 간격으로 패였다. 작은 돌로 쌓은 야트막한 축대와 가지런히 지붕 받친 서까래까지 곳곳에서 대칭과 질서가 주는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본채와 사랑채 방 다섯 칸, 과거 곳간이었던 별채 식당, 담뱃잎 건조장이던 억새 띠 두른 지붕 목욕탕으로 이루어진 옛 가옥은 우리 여덟 식구가 오롯이 차지하기에 호사였다.

※ 관리인이자 숙수님은 목욕탕 억새 지붕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고 소개했다. 수년에 한 번 교체하고 그때마다 문화재청에서 지원받는단다.


뒷마당, 사랑채와 목욕탕


지금보다 컸던 집은 수십 년간 버려졌었다. 한옥스테이로 쓰기 위해 보수하며 잔존물을 최대한 활용하려 했다. 방마다 쓰지 않는 아궁이는 메워 마감되었다. 사용 빈도가 적었던 사랑채는 과거 것 그대로, 본채는 일부, 곳간과 목욕탕은 주춧돌과 대들보를 빼고 전부 새 재료를 썼다. 세심한 노력 끝에 예전 모습으로 돌아갔다.


본채와 사랑채 뒷모습


종일 비치는 햇살, 길게 늘어뜨린 지붕 아래 사랑채 마루에 앉았다. 담 너머 앞은 군자정, 거연정, 동호정이 줄지은 남강천이 흐르고 등 뒤로 천 미터 넘는 황석산이 자리한 전형적인 배산임수 땅에 있다.


사랑채에서 본 남강천 방향


천천히 걸어 거연정에 갔다.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전시서가 1640년경 서산서원을 짓고 그 곁인 지금 위치에 억새로 만든 정자를 처음 지었다. 1872년 전시서의 7대손들이 억새로 된 정자를 철거하고 훼철된 서산서원의 재목으로 재건립하였으며 1901년 중수하였다.

※ 네이버 백과사전 참조

정자 둘레로 네 곳에 지붕을 지탱하는 기둥을 세우려 독특한 긴 막대 모양 주춧돌을 괴었다. 성긴데 없이 빽빽하게 이어 붙인 나무판 틈새로 시원한 바람이 솔솔 스미었다. 위에 다리 놓인 옥색 남강천은 깊이를 알 수 없으나 한 사람 키는 넘는 것 같았다. 널찍한 바위와 굽이쳐 흐르는 내, 오래된 나무 정자, 봄 초목까지 이곳에서는 양반들뿐 아니라 누구라도 풍류를 즐길 성싶었다.


거연정


식구들과 긴 식사를 마치고 호젓한 밤 아내 동생과 사랑채 마루에 앉았다. 둘만 이야기 나눈 건 인연으로 맺어진 지 십 년 만이었다. 그동안 여러 어려운 일에도 힘든 내색 없이 홀로 내면을 깊게 키우고 있었다.



둘째 날 상림원 그리고 지안재, 흐림과 비


재잘대는 소리에 눈을 떴다. 이놈의 새들. 도시에서는 만나지 못한 소란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마당 작은 동산에 꼽힌 대나무 관이 물을 뱉어냈다. 얼마나 머금었는지 어제부터 종일 한 방울씩 쉬지 않고 떨어뜨렸다.


마당 작은 동산


상림원은 한옥에서 이십여 분 거리이다. 전날 취기가 가시지 않아 아내에게 운전을 부탁했다. 차를 몰았다면 누리지 못했을 경치. 산 여기저기 분홍빛 불이 붙었다. 봄이 다가와 연녹색 잎사귀를 피워낸 나무 사이사이 도드라진 크고 작은 벚꽃이었다. 다만 가로수는 며칠 이십 도 넘는 기온에 이미 절정을 넘겨 비가 되어 사그라들고 있었다. 질 때가 더 아름다운 몇 되지 않는 꽃.


상림원은 천여 년 전 신라 진성여왕 때 최치원이 만든 숲이다. 넓고 푸른 잔디밭, 박물관과 아기자기 조성된 수로, 다양한 수종, 이끼 덮인 정원까지 잘 꾸며졌다. 다만 날이 궂어 오래 돌아보지는 못했다.


잠시 산 중턱 와인밸리에 들렀다가 지안재로 갔다. 함양에서 지안재~오도재~지리산 제일 관문으로 이어지는 1023번 지방도로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로 선정되기도 했다. 특히 'S'자 모양 굽은 도로로 유명한 지안재는 불과 1.2㎞에 남짓한 짧은 고갯길이 잘 단장된 정원 같다.(이름은 제한치(蹄閑峙)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말발굽도 쉬어 간다'는 뜻을 담았다는 얘기도 있다.) 옛날 내륙지방과 남해안 상인들이 교역을 위해 넘었던 육상교통로를 따라 지안재에 섰다. 더 가고 싶었으나 이곳에 닿은 것으로 만족했다.

※ 지리산 둘레보고 등 홈페이지 참조


지안재


종소리는 숙수님이 밥을 알리는 신호다. 창문 열어 빗소리 들으며 뜨끈한 아랫목에 누워 몸을 지지다 언니네는 본채, 동생네는 사랑채에서 서둘러 나왔다. 이번은 어떤 음식이 기다리고 있을까. 저녁 여섯 시가 다가올 때까지는 설렘이, 일 분을 넘길 때마다 조급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마주한 식사는 담뿍 담긴 정성과 사랑이었다. 식객이 만들었다면 준비만도 반나절이 넘었을 텐데 그리 번 시간은 느긋하게 먹고 이야기 나눌 수 있었다.

두 번의 저녁과 두 번의 아침 식사.

숙수님은 신선한 재료로 매번 성심껏 음식을 만드셨다. 어제 만찬은 수육과 육개장, 오늘은 대구조림과 아롱사태 찜이었다. 아침 누룽지와 갓 구운 빵에 이어 마지막인 내일은 무엇일까. 어느 것이든 어느 곳보다 맛깔스럽다. 김숙수님은 정년을 넘겼다기에는 앳되셨다. 이십 년 한 곳 시골 직장살이, 그간 사정이야 알기 어려우나 시간 흔적이 얼굴에 곱게 남았다. 지금부터는 촉탁직으로 십여 년을 더 건강히 할 수 있다는 말에 두터운 자신감과 행복이 묻어났다. 저렇게 나이 들어야 하는데. ‘두 번의 저녁과 두 번의 아침 잘 먹었습니다.’


첫 아침


저녁 여덟 시 노래자랑을 시작했다. 일찌감치 자리 펴고 누운 할머니가 흥겨워 일어나실 수 있도록 조카와 아이는 계속 노래하며 춤을 췄다. 비록 이루지는 못했으나 “할머니가 즐거우시면 좋겠어요.”라며 귀에 속삭이는 두 손자에 진심으로 행복해하셨다.


짧은 함양 여행. 이번은 떠나고 싶지 않던 오래된 한옥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언제 올지 모르지만, 다시 봐요. 함양.

※ 지도 주소 명은 아름지기함양한옥. 이십 년 전부터 육 년 전까지 한옥스테이로 운영되었고 그 이후는 특정 기업 직원을 대상으로 매주 한 팀만 받는다. 백오십 년 전 평민 부호가 남긴, 따뜻한 남향 가옥을 나도 언젠가는 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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