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 년 희망과 절망, 부활의 기억, 경복궁

by 준환

몇 년 전, 갓 휴직하고 매주 금요일은 나들이 겸 서울에 있는 역사관광지에 갔다. 두 달 정도 이어진 짧은 여행 가운데 두 번째는 경복궁이었다. 그전까지 왕궁이라는 것 외에는 다른 지식이 없었으나 장소 하나하나에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익히 알고 있듯 현재 경복궁은 처음 세워진 그대로가 아니다. 태조 4년(1395년) 왕이 거처하는 제 일 궁궐인 법궁으로 창건된 후 성종 대까지 약 팔십 년에 걸쳐 증축하여 비로소 완성되었다. 중종과 명종 대에는 두 차례 화재로 소실된 강녕전, 교태전, 자경전 등이 복구되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선조 25년)으로 전소했다. 약 이백오십 년 간 버려진 궁은 고종 2년부터 중건이 시작되어 이십여 년 지난 1888년에 마무리된다.


광화문과 흥례문, 그리고 근정전


경복궁 동십자각 사거리 가까운 주차장에 차를 두고 옆문으로 들어가니 텅 빈 공간이 나타났다. 광화문과 매표소인 흥례문 사이에 있는 곳은 광화문광장만큼 넓어 보였다. 오백 년의 기억을 따라가기 전, 한 차례 쉬어 가라는 의미인 듯 도심 한가운데 보기 드문 크기에 감탄하며 천천히 걸었다. 흥례문과 근정문을 지났다. 흙길은 화강암 포장으로 바뀌었고 양 가장자리에 대신들의 품계를 나타내는 비석들이 세로로 섰다. 정9품과 종9품에서부터 안으로 갈수록 한 품계씩 높아져 1품 앞까지 수십 미터 길이였다. 월대에 선 왕이 수백 명을 앞에 두고 국가 의식이나 외국 사신 맞이 행사를 주관한다고 상상하니 규모가 짐작되었다. 왕이 묵는 근정전은 이단 석축의 월대와 삼십사 미터 높이 중층 건물로 이루어졌다. 남성미에 근엄함이 느껴지는 건물 천장 가운데 금박 입힌 목조 용 두 마리가 있다. 발톱이 일곱 개인 ‘칠조룡’은 중국 황제를 상징하는 오조룡보다 많음을 감안하면 조선 후기 긴 세도정치를 끝내고 왕 중심 질서를 강화하려는 노력이 느껴졌다.


뒤편 사정전은 왕이 신하들과 함께 정사를 돌보며 편전으로 사용하던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내부 바닥이 마루였기에 주로 여름 동안 사용했다고 한다. 더 뒤로 왕이 침실로 사용한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이 더 있으나 비슷하여 들어가지는 않았다.


경회루


경회루는 경복궁 중앙에서 왼쪽, 왕의 처소 인근에 있다. 태조는 4년(1395) 경복궁 창건 때 연못을 파고 누각을 세웠다. 지대가 습해 건물이 기울자 태종은 12년(1412) 대규모로 준설하여 동서 128m, 남북 113m에 이르는 네모난 크기로 재 조성했다. 성종은 5년(1474) 경복궁을 중수하면서 지금보다 작지만 호화로운 경회루를 완성했다. 이름은 태종 대 하륜이 공자와 애공의 고사를 본떠 지어졌다.

※ [동문선] 제81권 [경회루기] 참조

「공자께서 노나라 애공의 물음에 답하였다. “정사를 잘하고 잘못하는 것은 사람을 잘 얻고 잘못 얻는 데 있다.” 하셨다. ‘경회’라는 것은 '군신 간에 서로 덕으로써 만나는 것'을 의미하니(이하생략)


평소 사신 접대와 궁중연회, 기우제나 무과시험이 치러졌다. 다만 그뿐만은 아니었다. 숙직 날 몰래 구경 나온 종9품 구종직이 밤 산책 나선 세종을 우연히 만났고,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옥새를 넘겼으며, 연산군은 삼천 명의 기생들과 쾌락을 누리기도 한 장소였다.

※ 세종 앞에 불려 간 구종직은 춘추 한 권을 술술 읊었다. 총명함을 인정받아 궁을 임의로 활보한 데 대한 처벌 대신 종5품으로 갑작스레 승진했다.


경회루는 경복궁에서 아름다운 곳 중 하나다. 커다란 목조 건축물은 멀리 북악산을 배경으로 연못 가운데 있다. 그 모습이 자연과 인공 구조물 사이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았다. 물에 비친 누각은 원래의 화려함이 선명하게 비쳐 또 다른 경회루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다. 위로는 연결된 돌다리를 통해 올라갈 수 있는데 사월에서 시월까지 예약했을 경우만 입장이 가능하다.


태원전


야트막한 언덕, 나무 사이 길을 따라 북쪽으로 갔다. 태원전은 고종 대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빈전으로 쓰기 위해 처음 지었다고 한다. 그전까지는 궁궐 일부를 빈전이라 이름 붙여 왕과 왕비, 대비 사후 발인 전까지 임시로 관을 모셨다. 이곳은 또한 태조의 어진과 인조 아버지인 원종의 것을 모시는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태조와 원종을 함께 둔 건 인종이 반정을 통해 집권한 데 대한 정치적 정당성을 갖기 위함인 듯.

※ 빈전은 국상(國喪) 때, 상여가 나갈 때까지 왕이나 왕비의 관을 모시던 전각이다.


건청궁


경복궁 후원 향원정을 지나 건청궁에 갔다. 전체 162.5칸은 장안당, 곤녕합, 복수당 세 부분으로 나뉘며 근정전과 그 부속 건물을 대신하여 왕의 처소와 편전, 외교관 접대 장소로 이용되었다. 왼쪽 필성문이라는 작은 아치형 벽돌문 입구로 들어가면 고종이 편전과 침실로 사용한 장안당이 나온다. 담너머 향원정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쪽으로 방 한 칸이 돌출되었다. 아래는 사람 키만 한 높은 돌기둥이 받치고 있어 마치 연못가에 걸친 것처럼 보였다. 장안당에서 가장 처음 우리를 맞이하는 건 ‘추수부용루’ 파란 글씨가 새겨진 편액. 선선한 가을날 정자의 연못에 핀 연꽃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란 글귀에서 풍류와 여유가 느껴졌다.(사실 연꽃은 여름인 7, 8월에 핀다) 정남향 전각은 하늘로 한껏 올라간 처마가 상당히 길었고 무언가 달랐다. 다시 살펴보니 처마와 문틀, 기둥 모두 단청 아닌 나무색 그대로였다. 왕의 거처라기보다는 사대부의 아흔아홉 칸 한옥을 조금 더 크게 지은 모양으로 고졸한 멋이 있어 화려한 다른 전각에 비해 오히려 도드라졌다. 건청궁 오른편에 집옥재가 있다. 중국풍 벽돌 건물은 고종의 서재이자 외국 사절 접견소로 사용되었다. 향원정과 건청궁, 집옥재는 본래 왕들이 거처하던 곳에서 멀리 궁 북쪽 빈터에 새로 짓거나 기존 건물을 중수했다. 일부는 신문물을 반영한 외국 양식으로 지어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영향에서 벗어나려 했던 고종의 의지가 담겼다.


건청궁에서 마지막은 곤녕합이다. 명성황후가 머물던 처소는 황후의 생활공간이라기엔 소박했으나 벌어진 여러 사건은 결코 작지 않았다. 대원군 실각을 시작으로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개혁에 이어 을미사변까지 곤녕합이 중심에 있었다. 황후를 네 차례 접견한 영국의 지리학자 비숍 여사는 1895년 비극이 일어난 날의 남겨진 기록을 모아 이렇게 적었다.

「모든 일이 끝나기까지에는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 처소 2층에 몇 명의 시녀들과 함께 있던 왕비는 머리채를 잡힌 채, 칼을 맞고 쓰러졌다. 궁내부 대신인 이경직은 왕비를 보호하려 함으로써 오히려 그가 왕비인 것을 그들에게 알려준 셈이 되었다. 그는 두 팔을 잃는 등 부상에도 베란다까지 기어가 왕비를 바라보는 가운데 장렬하게 죽었다. 왕비는 침입자들을 피해 달아나다 넘어져 칼에 찔려 상처를 입었다. 그때 한 일본인이 그에게 덤벼들어 가슴을 마구 찔렀다. … 일본인들은 왕비를 널빤지에 올려놓고 비단으로 싸서 녹원의 소나무 숲으로 옮겨가 나뭇단에 등유를 부은 뒤 시신을 불태웠다. 남은 것이라고는 뼈 몇 마디뿐이었다. 44세 나이의 왕비는 한 우방국 공사의 피비린내 나는 음모에 자극을 받은 자객들의 손에 그렇게 죽어갔다. 그녀는 영리하고 야망이 있으며 음모적이고 매력 있고 아름다웠던 왕비였다. …」 (황후의 행적은 잘잘못에 대한 논란이 있으나, 이방 낭인이 시해한 사실은 분노를 일으킨다.)

※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이사벨라 L. 버드 비숍저, 집문당 참조


아픈 기억을 간직한 곤녕합은 담담히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 고종이 기둥에 주련으로 남긴 새로운 조선에 대한 미완의 의지도 함께였다.


부속 건물


궁녀들이 살던 전각 여기저기, 궐내 음식 만드는 소주방, 군사들이 대기한 호위시설과 임금의 국정을 보좌하는 궐내각사, 왕세자 내외가 머문 자선당까지. 경복궁은 빈듯하나 가득 차 있고 한산한듯하나 치열한 곳이었다. 오백 년에서 처음은 풍요와 희망, 중간은 상실과 퇴보, 마지막은 부활을 위한 몸짓이 담긴 경복궁은 예전과 다른 감회로 다가왔다.

※ 경복궁 가이드북을 일부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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