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월, 군산에서 머문 삼 일

2025.2.22.(토)~2.24.(월)

by 준환

해가 바뀌고 얼마 되지 않은 한가한 주말 어디로 가고 싶었다. 기차를 타고. 코레일 해랑열차는 이박삼일 여행지를 지나는 동안 아침 식사와 간식, 침실을 제공했다. 말 그대로 움직이는 호텔이었다. 다만 가격은 여느 동남아시아 여행보다도 비싸 선뜻 예약이 어려웠다. 강원도 산간 열차, 정선아리랑열차는 민둥산을 지나 아우라지까지 간다. 설경을 즐길 수 있으나 이월 늦은 한파가 끝나지 않아 가족과 함께 가기 무리였다. 결국 또 다른 서울 출발 기차, 서해금빛열차를 골랐다. 용산에서 익산까지 모두 세 시간 반. 이번 목적지는 그 길에 있는 군산으로 정했다. 바다, 기차여행, 무엇보다 국내에 드문 식민시대 정경을 간직한 도시란 점이 기대되었다.



첫 날


뚜벅이 여행인 탓에 각자 배낭을 멨다. 윗도리와 속옷을 여벌로 하나씩만 담아 이렇게 나선 적이 있을까 싶도록 단출했다. 종일 걸을 테지만 산뜻한 기분을 느끼고 싶어 새 신발을 신었다. 몇 달 전 사둔 황톳빛이 청바지와 제법 잘 어울렸다. 덩달아 아이도 새 신발을 신었다. 첫 기차여행을 기념 삼아 신발이 나오도록 환승역마다 사진을 찍을 거다. 누가 보면 여행 온 일본인이나 중국인으로 알겠지.


군산까지 버스, 지하철, 고속열차, 일반열차 무려 다섯 번을 갈아탄다. 이제 시작인 지하철 좌석에 앉아 벌써 눈을 감은 아내. 그 모습에 미안함이 들었으나 눈과 손이 자유로워지는 편이 좋았다.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가끔 창밖 풍경을 바라보는 시간. 목적지까지 여행이 주는 한가로움을 즐기고 싶었다.


주말 고속열차는 항상 만석이다. 이 주 전 빈자리가 거의 없어 객실마다 떨어진 좌석을 끊었다. 낯선 사람과 함께 앉은 아이 곁에 서려 했으나 비좁은 통로에서 오가는 승객에 이리저리 부딪혀서 하는 수 없이 밖으로 나왔다. 간이 좌석은 일반 자리만큼 안락했다. 진작 이렇게 할걸.


원거리 이동 후는 항상 잘 차려진 한 끼를 기대한다. 네 시 군산 도착. 명절날 제천 처가에서 맞는 첫 끼 점심상처럼 푸짐한 식사를 하고 싶었다. 이층 게스트하우스 방에 짐을 풀고 내려와 신을 신는데 주인이 물었다. “이른 시간인데 식사는 아닌 것 같고 어디 가세요?” 붙임성 좋게 먼저 말을 건네 왔다. 이런저런 팁을 알려주려는 눈치였다. “식사하러 가요. 저희 열두 시에 나와 기차를 탔거든요.” “어디 가시게요?” “OO갈비 가려 구요.” 두 번째 날 예약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추천한 곳이다. “거기 배고파요. 먹어도 배고파요.” 무슨 말이지? 조금 후 이해했다. 양이 매우 적었다는 뜻. 그래서 동네 주민들이 자주 가는 곳으로 추천받았다. 주인은 입구까지 따라 나와 가는 길을 세세히 알려주었다.


월명동 문화거리를 지나 추천한 가게로 갔다. 서울 고급 식당에 비할만한 반찬과 찌개가 한 상 가득했다. 갈빗대와 목살을 섞은 양념 갈비 역시 양이 넉넉하고 맛도 흠잡을 데 없었다. 우리 식구가 고기 사 인분은 드문 일. 냉면과 밥까지 먹어 더 들어갈 수 없을 때가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심으로 대접받은 느낌이었다.

다섯 시 넘은 시간, 박물관과 역사관은 문을 닫아 내일 다시 오기로 했다. 바닷가를 향해 잠시 걸어 당도한 황해. 군산에 막 도착했을 즈음은 바닷물이 물러나 펄이 그대로 드러났었다. 일부러 가져다 놓은 것처럼 배가 진흙에 걸려 쓰러지지 않고 서 있는 모습이 퍽 신기했다. 이제는 가운데부터 조금씩 물이 차올라 배들 일부는 그 위에 떠 있었다. 바닷가를 좀 더 거닐려다가 석양 무렵부터 부는 찬바람이 매서웠다. 이월 말 혹한은 남쪽도 지나치지 않았다.

※ 지역주민 말에 따르면 바람은 오전이 잔잔하고 늦은 오후 세진다고 한다. 그래서 초봄까지는 날씨가 많이 차다. 항구 특성과 큰 조수간만차 때문이란다.


추운 날씨는 그동안 우리 가족이 여행에서 거의 가지 않던 카페로 발길을 이끌었다. 부둣가 1930년대 무역상사였던 건물은 예전 그대로였다. 마루 복도를 지나 나무로 짜인 창틀과 하얗게 칠한 회반죽 벽이 아늑한 다다미방에 앉았다. 마치 시간여행 온 것 같았다.


숙소에 들어와 따뜻한 온돌에 누웠다. 찬바람에 웅크렸던 몸이 펴져 노곤했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한 예능프로그램을 보며 낄낄대다가 아내가 물었다. “마라톤 도전에는 관심 없어?” 출연자가 뉴욕 마라톤에 참가해 삼십 킬로미터를 넘어섰을 때 힘겨워하는 장면이 나왔다. 손댄 일은 끝까지 하는 편이지만 그 긴 거리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 오죽 힘들면 몸이 뿜는 도파민으로 버틴다지 않는지. 그러고 보니 운동이 부족하긴 하다.


초저녁잠에서 문득 깬 새벽 세 시, 어제 하루를 정리했다. 문 너머 건넌방에서 코고는 건지, 앓는 건지 어느 아저씨가 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 목소리도 있었는데 아마 우리처럼 가족인 듯했다. 늦었지만 모두 하루 고생했다는 말이 하고 싶었다.



둘째 날

게스트하우스 주인의 따뜻한 아침 식사를 대접받고 문을 나섰다. “오늘은 어디 묵으세요?” 사실 오늘 머물 일본식 가옥 게하에서 이 박하려 했다. 환송에서 한 번, 가는 데가 좋은 곳이라는 여유로운 말에 다시 한번 미안함이 들었다.


게하 일 층은 컵 공방이다. 잠깐 문 앞에 멈춰 잠시 안을 들여다보았다. 곧 불이 켜지며 주인의 아내가 문 열어 안내했다. 창에서 바라보이는 곳은 물론 문 닫혔던 안쪽 보관실까지 도기가 가득했다. 작업대 위에는 초벌 된 흰 그릇에 일본만화 앤과 토토로가 있었다. 선반 진열대에는 유약을 발라 한 번 더 구워진 것이 놓였다. 빨간 머리 앤을 만지며 머뭇거리는 아내, 예전 강릉처럼 컵을 통해 군산을 기억하고 싶었나 보다.


군산은 만경강과 금강 사이 뾰족하게 돌출된 곳에 있다. 백제 때는 바다에서 수도로 이르는 군사 거점, 고려와 조선 시대는 무역과 조공의 주요 해로였던 곳은 대한 제국 말기 호남평야에서 난 곡물 수탈을 위한 기지가 되었다. 일본인들 관리 아래 금강 변을 따라 갯벌 일부를 메워 무역회사와 검사소를 세우고 철도까지 놓았다. 화강암 기초와 입구, 적벽돌로 쌓은 벽면, 기울기 급한 삼각형 지붕. 그때 남긴 일본식 건물은 이제 국가 유형문화유산으로 관리되고 있다. 일제강점기 잔재 앞에서 예전부터 가졌던 질문이 떠올랐다. 이것들은 우리문화유산이며 보존할 가치가 있는지. 국어사전에 따르면 문화유산은 역사와 전통의 산물로서 고유한 문화적 특성과 국민 생활 변화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유무형의 국가유산이라고 한다. 국민 생활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또 우리 인력과 자원으로 만들었기에 문화유산으로는 인정할 수 있을 듯하다. 다만 이제는 단절된 타국 생활양식에까지 구태여 ‘우리’를 붙이기는 어렵다고 느꼈다. 대한 제국 말기부터 1945년까지 재현되어서는 안 될 역사의 박제가 아닐지. 구조선식량영단군산출장소, 군산세관을 지나며 든 생각이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은 선사시대부터 해방 전까지 군산의 변천을 기록했다. 특정 도시를 주제로 한 것이라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3층 “1930년 시간여행 속으로” 전시장은 동시대 번화가였던 영동상가에 온 듯했다. 기차 역사, 소학교, 쌀 창고, 잡화점에 들러 잠시 그때로 돌아갔다. 거리를 배경으로 가족사진은 흑백에 선명하지 않아 더 예스러웠다.


강을 따라 부전교를 지나 전쟁사 박물관으로 갔다. 2차대전 때 미군 수송함이던 것은 우리 군에서 한동안 사용하다 퇴역했다. 일 층은 금강 하구 일대에서 벌어진 최무선 승전지, 진포대첩을 담았다. 함 내 병영이 그대로 보존된 이 층은 좁은 통로에 천장이 낮아 미군보다 작은 우리나라 사람이 지나가기에도 불편했다.


일요일 낮 이름난 식당은 대기 줄이 길었고 재료소진으로 점심 장사를 마친 곳도 있었다. 다시 숙소 근처로 한참을 걸어 맛 기행에 나온 생선 집으로 갔다. 모둠 하나하나가 좋았으나 서해 특산물인 서대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황금빛 노릇노릇한 빛깔만큼 고소한 맛으로 꽉 찼다.


아침 게하를 나오며 세라믹 핸드페인팅을 예약해 두었다. 강릉 컵 박물관처럼 컵이나 접시를 하나씩 앞에 두고 잠시 그릴 것을 떠올렸다. 갓 태어나 보를 두른 아기, 웅이, 꼬맹이를 각자의 것에 연필로 스케치했다. 모래가 들어간 물감을 연하게 묻혀 살짝살짝 색칠하고 공방 선생님의 손길을 기다렸다. 처음보다 더 생생해진 그림, 일 주 뒤 유약을 바르고 재벌이 끝나면 세련된 도자기로 완성된다.


여행지에서는 새로운 인연이 기대된다. 가장 먼저 채색을 끝낸 내 곁으로 게하 주인이 다가와 섰다. 여행 취향을 이야기하다 내 지난 두 달 반 살이 기록에까지 이르렀다. 게하 입구에는 이곳에 묵었던 여행객들이 쓴 책 몇 권이 작은 선반에 놓여있었다. 그것을 보여주며 읽어보고 싶다는 말에 선뜻 한 권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내 것도 같이 놓인다고 하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공방을 나서며 군산에서 이들과 맺은 인연이 쭉 이어지길 기대했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은 규모가 상당히 크다. 과거에는 강점기 주인이던 포목상 이름을 따 히로쓰 가옥으로 불렸다. 2층 목조 주택은 건물 두 채가 ㄱ자로 붙어있고 그 사이 정원이 있다. 흙 마당에는 편편한 돌로 된 징검다리 길이 집을 둘렀다. 그 위를 따라가며 봄비 내리는 날 툇마루에 앉아 땅과 나무, 석등으로 떨어지는 모습이 참 운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 층은 온돌방과 식당, 부엌, 이 층은 다다미방이 있다고 하나 들어갈 수는 없었다.


네 시가 넘어가며 여지없이 찬 바람이 불었다. 아내는 미련 없이 돌아가고 아이와 둘이 걸었다. 동국사는 일본 승려가 지은 절로 국내에 있는 여느 절과 사뭇 다르다. 사각기둥, 단청 없는 나무색 그대로가 단아했다. 언뜻 보면 일본 가옥과도 유사한 모양. 정원 한 편에는 평화의 소녀상이 놓여있었다. 십 대 앳된 아이 목에 누군가 목도리를 둘러주어 슬프지만 추워 보이지 않았다.


절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일제강점기군산역사관이 있다. 폐관인 다섯 시까지 조금 남아 문을 당겼으나 열리지 않았다. 혹시 하는 마음에 문을 두드리니 관리자가 문을 열고 어디에서 왔는지 물었다. 멀리 서울이란 대답에 바로 열어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일부 영상 시설은 꺼두어 전람이 어렵다는 친절한 설명과 함께. 태평양전쟁 위안부와 광부, 학도병 사진, 그들의 기록물 들에 그때 분위기가 생생히 느껴졌다. 수탈된 쌀가마니 모형이 붉은 조명을 받아 한층 더 그랬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처음 문을 연 빵집은 이성당이다. 토요일은 길게 줄을 선 사람들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으나 다수가 돌아간 일요일은 한산했다. 케이크와 빵을 사 한입 물었다. 명성은 헛되이 전하지 않는다는 말 그대로였다. 특히 야채 소를 감싼 빵은 입에 넣자 얼마 않되 스르르 사라졌다. 이제껏 만나지 못한 식감과 풍미가 있었다.


둘째 날 게하는 단층 일본식 주택과 곁에 붙은 낮은 빌딩을 붙여 만들었다. 우리가 묵은 이층 내부는 밋밋한 외양과 달리 진한 일본 냄새를 풍겼다. 나무 계단과 복도를 지나 미닫이문을 여니 창밖으로 예전 시청 터였던 광장이 넓게 나타났다. 방은 어제보다 넓고 정갈했다. 다만 바람이 스며들어 덮은 이불 위로 한기가 느껴졌다. 문득 첫날 게하 주인의 붙임성과 수다가 그리웠다. 그곳에 있었다면 아마 일 층 식당에서 맥주 한잔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을 텐데. 다시 군산에 온다면 약간의 엄격함 마저 느껴지는 이곳보다는 사랑방 같은 그곳에 머물 거다.



셋째 날


열시 넘어 느릿느릿 나왔다. 여행 마지막 날은 몸도 마음도 가라앉는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 무얼 먹을까 고민하다 한일옥에 갔다. 사 년 전 출장 때 처음 들렀던 이곳은 이른 아침 문 여는 몇 안 되는 집이다. 소고기 무국이 주메뉴로 본래 기사식당이었다. 사십 년 넘는 전통의 맛은 아이에게 어떻게 다가왔을까. “할머니는 120점, 엄마는 100점, 여기는 80점.” 간이 좀 센 듯 슴슴한 음식에 익숙한 아이는 반도 더 남겼다.


한일옥은 신흥동 일본식 가옥에서 내부로 들어가지 못한 아쉬움을 덜어주었다. 근대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화양절충식 주택이 유행했다. 1937년 건축된 이 적산가옥은 역시 같은 양식이다. 복원된 내부는 삼각 나무 천장과 비교적 얇은 들보, 사각기둥으로 한옥과 완연히 달랐다. 전통적인 일본의 건축물은 나무와 흙, 종이를 써 개방적인 형태로 낮고 넓게 짓는다는 데 그 특징이 잘 남아있었다.

※ 화양절충식은 서구의 건축 기술과 일본의 전통 양식을 혼용한 건축양식이다. 목구조를 근간으로 서양 석조나 벽돌조를 모방하고 벽면에 비늘판으로 마감하는 게 특징이다. 일본, 한반도, 대만 등 식민지에 건축되었고 현재도 일본 본토에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일제강점기 시절 지어지고 해방 후 일본인이 남겨놓고 간 집을 민간에 불하한 가옥(적산가옥)이 이 형식이다. <국어사전, 나무위키 참조>


여행은 대개 돌아오는 날 날씨가 가장 좋다. 월요일은 전시관이나 박물관이 쉬기에 걸어서 해망굴에 들렀다. 1926년 구도심과 군산항을 잇기 위해 터널을 뚫으며 여러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비록 고된 작업이었으나 한여름에는 그늘, 한겨울은 눈바람을 피하는 쉼터였다는 말이 인상깊었다.


월명동에는 독특한 커피가 있다. 개항기 군산세관창고를 개조한 카페에 앉아 고종이 맛보았다는 인도네시아, 모카, 엘살바도르원두를 섞은 백여 년 전 스타일 값비싼 커피를 시켜 약간의 호사를 누렸다.


군산을 떠나기 전 경암동 철길마을로 갔다. 과거에는 군산 구시가지인 월명동을 지나 항구까지 철도가 있었다. 그 기차길 가에는 피란민들이 모여 살았다. 철로에서 일 미터 남짓 거리를 두고 단층 혹은 이층집이 빼곡하게 남아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육중한 열차가 지날 때마다 내던 소음과 진동은 어떻게 견뎠을까. 연통에서 뿜어져 나오는 새카만 그을음까지. 오래된 이야기를 뒤로 하고 지금은 여러 상점이 들어선 활기찬 야시장이 되었다. 셋은 한 캐리커처 가게에 들어가 순한 모습으로 한 장에 담아 달라고 했다. 소처럼 웃는 얼굴, 희끗희끗한 옆머리. 저 모습이 남에게 비친 내 모습이었던지. 그래도 이 정도면 잘 나왔다. 다시 철로를 걷다가 다디단 냄새 앞에 섰다. 달고나, 뽑기, 존드기까지 추억이 담긴 상점. 노릇한 존드기를 씹으며 설탕 담은 국자를 연탄불 위에 올렸다. “다 녹았어?” 재촉하는 아이를 여러 차례 만류하여 물이 되길 기다렸다. 반 티스푼 식용 소다를 넣고 갈색에 하얀 물감을 더한 빛깔이 나올 때까지 다시 저었다. 완성된 뽑기. 나무젓가락에 붙여 동그랗게 만들었다. 아이는 보물인 듯 부서지지 않게 조심히 담았다. 야시장 끝에 횡단보도가 있었다. 멈춰서서 맞은 편을 바라봤다. 같은 철길마을이나 인기척이 없다. 이곳은 시간이 흐르고 저곳은 시간이 멈췄다.


삼 일 머문 월명동은 군산 원도심이다. 군산역과 시청, 내항이 있었다. 지금은 역과 시청이 각기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외항은 산업단지와 함께 비할 바 없이 커졌다. 중요한 기능을 상실하고 쇠락의 기로에서 살아난 건 `14년부터 있던 도시재생사업 덕분이었다. 예전에 지어진 낮은 건물들과 군산내항, 폐철도, 근대문화유산이 유지된 채였다. 여러 적산가옥이 살아남은 것도 행운. 그래서 외지인들에게는 다시 원도심이 되어 매혹하고 있다.


군산은 부여, 서천, 고군산, 전주, 변산, 무주, 고창 가운데 있다. 다음은 이곳을 베이스 삼아 여기저기 다녀볼까 한다. 10월은 일 주로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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