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일 제주 협재 일기 열이틀 < 보말죽 >

by 준환

비양도에는 선착장 앞에 호돌이식당이 있다. 불도 들어오지 않는 파란색과 빨간색 오래된 글자 간판은 촌스러움보다는 시간의 힘이 느껴졌다. 대표 음식은 보말죽. 십 년 전 인생 처음으로 맛본 죽은 신세계였다. 이전까지 최고로 쳤던 전복죽보다 더 고소하고 풍미가 짙었다. 가히 ‘인생’이란 단어를 붙일 만했다.


제주에 오면서 하고 싶던 일 하나가 보말죽 만들기였다. 그제 물 빠진 돌 해변에서 아이들과 손톱만 한 작은 고둥을 잡아 해감해두었다. 어제는 2리터 생수병 반 통 정도를 손질했다. 이른 아침 눈뜨자마자 그 보말이 생각났다. 살과 분리해 둔 내장은 믹서기로 갈거나 면포로 걸러야 하는 데 둘 다 없어 수저로 으깼다. 쌉쌀한 해초 향이 솔솔 올라왔다. 솥에 참기름을 두르고 중불을 켰다. 볶음밥용으로 작게 썬 양파 한 개 분량과 내장을 같이 볶았다. 녹색과 치즈색 내장이 짙은 연두색으로 섞여 그럴듯했다. 불린 쌀을 넣고 한 번 더 볶은 다음 물을 넉넉히 부었다.


죽은 손 많이 가는 음식이다. 대체로 다른 것들은 시간에 맡기면 되지만 이건 시간과 노력이 같이 든다. 십오 분 정도 물을 보충해 가며 약한 불에 끓이자 쌀이 잘 퍼졌다. 양념은 간장, 까나리 액젓, 소금으로 했다. 간은 적절했으나 쓴맛이 좀 있었다. 제대로 거르지 못한 탓으로 딱딱한 것도 씹혔다. 처음에다가 도구가 부족하니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신선한 맛으로 모두 두 그릇씩 먹었다.


제주도 보말의 종류는 다양하다. 수두리보말(팽이고둥), 먹보말(밤고둥), 촘고메기(울타리고둥), 문다대기(눈알고둥), 매웅이(대수리) 등이 있다. 제주도 사람들은 맛이 좋은 수두리와 먹보말을 잡아 식재로 쓴다. 그에 반해 우리가 잡은 대부분은 맛이 없거나 쓴맛이 있는 촘고메기와 문다대기였다. 맛있는 치즈색 내장에 비해 그렇지 않은 녹색이 섞여 식당에서 먹은 죽 맛과 사뭇 달랐다. 문다대기는 막이 돌처럼 딱딱해 까기도 힘들었는데 앞으로는 거들떠보지도 말아야겠다. 사실 잡을 때만 해도 구분은커녕 큰 것 찾기 바빴다. 다음번에는 해녀들이 잡은 것을 사서 써보려 한다.


환상숲곶자왈 – 그림책카페노란우산 – 제주맥주양조장 투어


곶자왈은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식생이다. 숲을 뜻하는 곶과 가시덩굴인 자왈이 합쳐진 방언으로 제주 식물의 북방한계선과 남방한계선이 겹쳐 천연원시림을 이루며 다양한 식생이 함께 자란다. 땅은 용암이 중첩되어 굳은 탓에 흙이 별로 없어 농사짓기 어렵다. 이런 숲은 제주도 모든 곳에 있지는 않다. 가이드가 보여준 지도에는 한라산 중산간 지역 중 화산활동이 활발했던 대여섯 군데에 표시되었다. 환상숲곶자왈은 숙소에서 가까운 서쪽 한림에 있다.


곶자왈은 나무와 가시덩굴이 우점종으로 반복되는 모양이다. 가시덩굴 뒤편으로 나무가 더 큰 키로 자랄 때 빛을 받지 못한 가시덩굴은 사라진다. 사람들이 나무를 자르면 가시덩굴이 자라고, 다시 뒤편의 나무가 자라면 사람들이 또 자르는 식으로 되풀이된다. 그래서 가이드는 이곳을 ‘누군가 죽음으로 새로운 것이 태어나는 장소’라고 소개했다.


산책로를 따라 신비로운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이십 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높은 소나무 표피는 다른 식물들의 보금자리였다. 물을 좋아하고 빛과 바람을 싫어하는 콩짜개 넝쿨은 소나무끼리 만든 그늘진 줄기 표면에서 편안히 자란다. 다만 소나무가 죽으면 넝쿨도 같이 죽는다. 또 연리지, 연리목, 연리근이 많다. 가까이 자란 나무들이 줄기에 상처 나고 아무는 과정에서 단단히 붙어 영양분을 공유하는 모양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뿌리가 드러난 나무도 다수다. 땅속에 돌이 많아 아래로 뻗지 못하고 위로 자라기 때문이다. 바람이 심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돌을 휘감아 돌과 뿌리가 하나처럼 묶인다. 이런 보디빌더의 우람한 팔, 다리 같은 모양을 뿌리 근육이라 부른다. 독성을 지닌 천남성이란 식물도 있다. 과거에는 사약의 재료로 쓰였다고 한다. 암수가 구분되는데 벌레를 가두는 대롱의 뚜껑 부위에 구멍이 있으면 수컷, 없으면 암컷이다. 갈등의 어원이 된 칡나무와 등나무도 있다. 기생하는 나무의 왼쪽으로 감아올려 가는 것은 칡, 오른편으로 감는 것은 등나무로 만나면 싸움이 난다. 원만하게 타협하면 오래도록 같이 살 수 있으나 싸울 때는 죽을 수 있다. 마디를 보고 나이 알 수 있는 식물과 고사리의 잎 뒷면에 포자 주머니도 처음 본다.


이곳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상록수 낙엽의 부엽토 쌓인 땅이 점점 넓어졌다. 발로 밟으면 꿀렁꿀렁한 곳들이다. 이렇게 늘어난 흙을 양분 삼아 뽕나무가 점점 늘어났다. 마치 창처럼 가시가 아래로 휘어 자라 벌레가 못 기어오르도록 막고 있으나, 위는 새들이 와서 열매를 먹을 수 있도록 가시가 없다. 자손을 번식시키기 위해 스스로 모습을 바꾼 결과다. 뽕나무가 자라면서 우점종이던 소나무는 서서히 물러간다. 나무가 죽을 때는 열매를 아주 많이 뿌리고 죽는데 요즘 들어 솔방울을 많이 만든다고 했다. 그 씨앗은 몇백 년이고 원하는 환경이 될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소나무를 좋아하는 이 숲의 대표님이 다른 식물들을 제거해 보았지만, 예전처럼 되돌리기 어렵다고 한다. 죽은 나무 위에 이끼가 자라고, 이끼가 만든 부서진 껍질을 흙 삼아 새로이 작은 나무가 뿌리내리는 걸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가이드 산책은 숨골 체험이 마지막이었다. 용암이 여러 번 굳어 생긴 과정에서 안에 있던 가스가 터져 나온 깊은 구멍으로 내부는 습하고 서늘해 항상 14~15도를 유지한다. 한낮의 바깥 날씨는 점점 뜨거워지는데 이곳은 시원했다. 가까이 귀를 대면 ‘휘이이잉’하는 바람 소리도 들릴 듯했으나 그러지는 못했다.



이 숲은 사유지다. 제주 숲에 반한 대표가 수십 년 전 주변의 만류에도 빚을 내 샀고, 자연 그대로 가꾸었다. 그 노력이 이제 빛을 발해 평일임에도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 누군가는 이곳을 보고 너무 지저분하다, 잡목이 많다는 식으로 불평했다지만 오히려 그러기에 가치 있어 보였다. 있는 그대로가 좋을 때도 있다.


제주식 비건 음식을 즐기기 위해 봐 둔 식당에 갔다. 영업 중이라는 온라인 알림과 달리 문이 굳게 잠겨있었다. 그래서 제주의 식당은 갈 때마다 확인해야 한다. 주변을 둘러보니 ‘만남OO한식뷔페’라는 식당이 있었다. 큰 접시에 원하는 양에 따라 덜어 먹는 식으로 여느 집밥과 비슷해 보였는데 맛은 전혀 달랐다. 북엇국, 직접 기른 채소, 수육, 겉절이 등 하나같이 신선하고 맛이 좋았는데 단연 제일은 생 깻잎무침이었다. 장모님의 삶아 절인 깻잎과는 다른 조리 방법으로 최고의 맛이었다.


저지리에는 예술인 마을이 있다. 한두 명씩 모여 살던 게 하나의 마을을 이룬 곳으로 둘레에는 그들의 주거 공간이, 가운데는 전시관이 있다. 제주현대미술관은 초대 원로 화가의 회화부터 현재 활동 중인 젊은 예술가들의 설치 미술품까지 다양했다. 아이들은 제주도를 상징하는 스티로폼 조형물을 좋아했다. 어른들은 은행나무를 선인장 모양으로 조각해 채색한 조각이 흥미로웠다. 관람을 끝내고 밖에 있는 너른 풀밭에 한참을 놀았다.


함께한 선배는 맥주를 좋아한다. 특히 ‘제주맥주’에 애착이 많다. 그래서 제주맥주양조장은 반드시 넣어야 하는 일정이었다. 감귤 내음 가득한 맥주 투어는 맥주 만드는 공법 소개로 시작됐다. 세척, 발효, 가열, 숙성, 포장 등 간단한 설명 후 벽면에 그려진 세계 맥주에 대한 도식을 안내해 주었다. 맥주는 크게 라거와 에일로 양분되며, 4개 필수 재료인 보리(밀), 물, 홉, 효모의 종류와 혼합 비율에 따라 맛이 달라졌다. 보리의 볶은 정도와 그에 따른 색은 흑맥주와 보통 맥주를 결정했다. 미네랄이 풍부한 물은 다른 재료가 어울릴 수 있는 바탕이었고, 효모는 보리를 양식으로 알코올과 이산화탄소를 만들었다. 홉은 쌉싸름 정도를 좌우하는 양념 같은 역할을 한다. 제주맥주는 라거와 에일을 모두 생산하는 국내 수제 맥주 제조 회사로 대형 저장고가 수십 개 늘어서 있었다. 하나만으로 매일 1리터씩 127년을 먹을 수 있는 엄청난 양이었다. 마지막으로 시음하는 시간을 가졌다. 생각보다 시간이 짧았고 맛도 평소와 다르지 않아 색다른 이벤트가 아쉬웠다. 폐교를 개조한 카페에 들러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제주도는 고사리가 유명하다. 식감과 향이 뭍에서 자란 것보다 뛰어나다. 봄에 여린 걸 수확해 잘 말려둔 뒤 그때그때 조금씩 삶아 국이나 무침, 조림에 쓴다. 저녁에는 감자탕에 듬뿍 넣은 고사리를 맛보았다. 두툼하고 졸깃한 게 마치 고기 같았다. 정성 들여 끓인 국물과 잘 손질된 진짜 돼지 등뼈 고기와 잘 어울려 오래 기억에 남았다.


좁은 차 안에서 잦은 이동으로 선배는 허리 고질병이 도졌다.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누워 저녁도 거른 모습에 걱정이 들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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