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오신 날의 하루

산사의 향기 속에서 하루가 시작되었다.

by 허정호

산사의 향기 속에서 하루가 시작되었다

2025년 5월, 부처님 오신 날 아침.

작년 이맘때 사천 정토사에서 받았던 따뜻한 점심 공양이 마음에 오래 남아 있었다. 그래서 올해도 자연스레 그곳을 향했다. 집을 나서기 전, 아내는 둘째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같이 절에 갈래요?”

고즈넉한 초파일 아침, 그런 말 한마디가 하루를 넉넉하게 만든다.

절에 도착하니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공양간 앞에는 이미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배가 출출했던 나는 공양간보다 먼저 식탁을 살폈다. 자리를 먼저 잡아야 마음이 놓이는 성격이다. 식사가 끝나가는 테이블에 자리를 마련하고, 옆 식탁에서 의자 두 개를 더 가져와 자리를 만들었다. 아내와 아들, 며느리는 공양간 줄을 서고, 나는 가방을 내려놓은 채 자리를 지켰다.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서방! 허서방!”

놀라 돌아보니 둘째 처형과 동서가 먼저 와 식사를 하고 있었다. 반가운 얼굴들이다. 형님은 나를 보자 웃으며 말했다.

“앉아 있지 말고 얼른 밥 가져와서 먹어!”

접시를 들고 줄에 서며 문득 작년 이맘때 맛있게 먹었던 죽순나물이 떠올랐다. 올해는 취나물과 미나리 나물이 유난히 향긋했다. 무엇보다 수박이 참 좋았다. 요즘엔 값이 비싸 쉽게 손이 가지 않는데, 공양간 수박은 몇 번이나 가져다 먹으며 목을 축였다. 절집의 공양은 늘 그렇듯, 사람의 허기보다 마음을 먼저 살핀다.

식사를 마치고 절 뒤편 둘레길로 발길을 옮겼다. 산바람은 촉촉했고 풀냄새는 싱그러웠다. 뜸벌산 정상으로 향하던 길목에서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가 굵어지기 전,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되돌아섰다.

“어디로 갈까?”

내 물음에 아내는 웃으며 말했다.

“운전사 맘대로 하세요.”

그 말에는 신뢰와 여유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부처님 오신 날이면 늘 떠오르는, 걷기 좋은 숲길 다솔사가 생각났다.

곤양 톨게이트를 나와 다솔사로 향하던 길, 순환버스 운행을 알리는 플래카드가 눈에 띄었다. 차를 절 아래 큰길 옆에 세우고 소나무 길을 걸을 요량이었지만, 절 입구에 도착하자 순환버스에서 사람들이 내리고 있었다.

아내가 기사님께 물었다.

“이 버스, 절까지 가나요?”

걷겠다는 다짐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우리는 웃으며 버스에 올랐다. 아들 부부는 손을 흔들며 “먼저 올라가세요” 했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돌계단 위에서 “성불하셔요”라는 인사와 함께 백설기, 바나나, 물이 담긴 봉지를 하나씩 건네받았다. 배낭에 떡봉지를 넣고 아들과 며느리를 기다렸다. 아내는 화단 옆 돌에 앉아 있었고, 나는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또 하나의 봉지를 건네받았다.

적멸보궁 앞에는 관불의식을 기다리는 긴 줄이 이어져 있었다. 우리는 조용히 방향을 틀어 차밭 쪽으로 걸었다. 천막 아래 간이 공양간에서는 “밥 먹고 가셔요!” 하는 정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몇 그릇 안 남았는데, 일찍 저녁 드시고 가셔요.”

보살님의 말에 마음은 고마웠지만, 정토사에서 점심을 먹고 떡까지 먹은 터라 배는 이미 가득 차 있었다. 인사만 하고 차밭으로 향했다. 잘 정돈된 차밭길 사이로 하얀 마꽃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아빠, 산책하고 내려와도 공양 주면 저녁 먹고 갈까요?”

“그래, 이제는 저녁을 먹어도 되겠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오후 네 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사리탑 주위를 돌며 탑돌이를 하고, 적멸보궁 앞에 조용히 머리를 숙였다. 다시 공양간을 찾았을 때는 임시 천막이 철거되고 있었다. 아쉬움은 잠시, 마음은 이미 충분히 차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빗방울이 다시 떨어졌다. 몇몇 단골 식당에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부처님 오신 날이라 모두 문을 닫았다. 절에서 공양을 받아서였을까, 아니면 불자 주인들의 마음 씀씀이였을까.

결국 동네 식당에서 자장면과 잡채밥으로 저녁을 대신하고 청곡사로 향했다. 주차장에서 절로 오르는 길에는 연등이 밝혀져 있었고, 우리는 우산을 받쳐 들고 천천히 걸었다. 대웅전과 찻방은 여전히 불자들로 북적였다.

참배를 마친 뒤, 연등 아래 처마 밑에 앉아 비 오는 산사의 정취를 가만히 누렸다. 빗소리와 어우러진 풍경 소리가 정겹게 마음을 붙들었다. 종무소 쪽에서는 보살님들이 하루를 정리하고 있었고, 한 보살님이 떡 박스를 들고 나와 백설기를 하나씩 나눠주었다.

떡을 좋아하는 아들이 조심스레 물었다.

“하나 더 먹어도 될까요?”

“그럼요.”

그 말이 떨어지자 모두 두 개씩 받았다.

밤이 깊어가며 절집은 서서히 고요해졌다. 우리는 풍경 소리를 뒤로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마음에 남은 것은 소박하지만 한없이 풍요로웠던 하루.

그리고 그날, 가장 많이 들었던 인사 한마디.

“성불하셔요.”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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