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자령, 봄이 먼저 말을 걸다

선자령이 부른 천상의 화원

by 허정호

선자령이 부른 천상의 화원

2025년 5월 초, 봄이라 부르기엔 바람이 지나치게 매서운 날이었다.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들른 대관령 국밥집은 명성답게 벽마다 사인과 방송 인증으로 빼곡했다. 소문은 과장이 아니었다.

우리는 각자 다른 국을 주문했다. 소고기미역국, 황태국밥, 얼큰이국밥, 소고기국밥…. 나는 소고기떡국을 골랐다. 국이 나오자마자 숟가락으로 휘휘 저어보고는 흰밥 한 공기를 툭 털어 넣었다.

아내는 미역국이 짜다며 물을 조금 부어 간을 맞췄고, 아들과 며느리도 따뜻한 국밥에 밥을 말아 속을 채웠다. 말없이 먹는 그 시간이 왠지 든든했다.

식사를 마치고 들른 대관령휴게소는 하늘만큼이나 바람이 차가웠다. 국밥의 기름기가 입안에 남아 있어 모두 칫솔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사람들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양치질을 하고, 입을 헹구려 물을 머금는 순간—이가 부서지는 줄 알았다.

얼음장 같은 물이 입안을 때렸고, 거품은 가득한데 뱉을 수도 삼킬 수도 없어 잠시 우물우물 버텨야 했다. ‘온수기 하나 없는 건가…’ 속으로 투덜대며 차로 돌아왔다.

차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겨울 장비가 꺼내졌다. 아내와 나는 겨울바지에 목도리, 딸은 두꺼운 외투, 아들은 털모자까지 눌러썼다. 완연한 한겨울 차림이었다.

그런데 산길에서 마주친 등산객들은 의외로 가벼웠다. ‘이 추위에 저렇게 올라간다고?’ 우리만 유난인가 싶었다.

막상 걷기 시작하자 바람은 잦아들고 몸에서는 금세 땀이 나기 시작했다. 밋밋한 시멘트 도로가 끝나갈 즈음, 길 양옆으로 하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그 순간, 이 길은 단순한 등산로가 아니라 어딘가로 초대받는 통로처럼 느껴졌다. 천상의 정원으로 이어지는 초대장 같은 길이었다.

송신소를 지나 숲길로 접어들자 얼레지꽃이 발길을 붙잡았다. 아내와 나는 꽃이 얼마나 피어 있는지 세어보며 감탄했고, 딸은 엄마와 사진을 찍느라 좀처럼 앞으로 나아갈 생각이 없었다.

나는 앞서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가파르지 않은 선자령의 길은,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길이었다.

얼레지꽃길은 1km가 넘게 이어졌고, 그 길이 끝나자 진달래가 산책길 곳곳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큰개별꽃, 노란무늬붓꽃, 현호색, 할미꽃, 피나물꽃….

이름을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그 자리에 피어난 모든 꽃들이 저마다 봄의 시작을 말하고 있었다.

두꺼운 외투를 입은 딸은 땀을 흘리며 오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아내가 말했다.

“외투 좀 벗고 배낭에 넣어.”

딸은 고개를 저었다.

“너무 부피가 커서 안 들어가.”

나도 거들었다. “우리 배낭으론 무리지.”

하지만 아내는 단호했다.

“그래도 한 번 넣어봐.”

결국 딸은 외투를 벗어 말아 넣었고, 뜻밖에도 배낭 속으로 쏙 들어갔다.

“봐라, 들어가잖아.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하지 마라.”

그 말에 우리는 모두 웃었다. 그날 산에서 가장 또렷이 남은 말 중 하나였다.

선자령 목초지로 오르는 길에 이르자 바람이 다시 거세졌다. 벗어두었던 모자를 다시 눌러쓰고, 멀리 선자령 표지석이 보였지만 우리는 그 지점에서 멈췄다.

해는 기울고 있었고, 기온도 눈에 띄게 떨어지고 있었다. 아쉬움이 남았지만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다음에 다시 오자.’

풍차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내려오는 길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아내는 올라올 때 보았던 꽃들을 처음 만난 것처럼 다시 감탄했고, 나도 꽃들과 눈을 맞추듯 인사를 나눴다. 꽃 위로 드리운 우리 그림자가 예뻐 사진으로 남기고, 하트 모양으로 모여 있는 봄꽃도 놓치지 않았다.

그 사이 아들과 며느리는 이미 앞서 사라졌고, 딸도 저만치 내려가 있었다.

내리막 시멘트길에서 아내는 무릎에 약간의 통증을 느껴 천천히 걷자고 했다. 혹시 차가 내려오면 얻어 타자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내려오는 차는 좀처럼 없었다.

그때 아들이 차를 몰고 선자령 초입까지 올라왔다.

“차 가지러 내려갔구나. 고맙다.”

그러자 아들은 웃으며 말했다.

“화장실이 급해서요. 같이 못 내려와서 죄송해요.”

그 말에 모두 웃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먼저 와준 것만으로 충분히 고마웠다.

저녁 7시가 넘어 정동진에 도착했다. 검색해 두었던 초당순두부 집에서 저녁을 먹고 숙소로 향했다.

후기가 좋다는 말에 기대했지만, 골목 안 숙소를 찾느라 몇 번이나 헤맸다. 도착한 곳은 모텔을 개조한 민박집이었다. 엘리베이터는 없었지만 주차장을 가득 메운 차량들이 인기를 말해주고 있었다. 하룻밤 묵기엔 부족함 없는 곳이었다.

그날 우리는 선자령에서, 바람과 꽃이 함께한 가장 아름다운 봄날을 보냈다.

산허리를 휘감은 꽃길은 우리에게 오랜만에 깊은숨을 허락했고, 잊고 지냈던 웃음을 조용히 되돌려주었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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