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이 아닌, 다시 보내는 마음

새로운 삶 속으로 들어가는 간절한 선물

by 허정호

버림이 아닌, 다시 보내는 마음

2024년 9월의 어느 토요일.

태풍이 지나간 뒤라 하늘은 유난히 낮고, 굵은 빗줄기는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쏟아졌다. 그날 아내는 직장 동료이자 오랜 친구인 황샘의 이사를 도우러 갔다. 비에 젖은 계단을 오르내리며 짐을 나르고, 버릴 것과 가져갈 것을 나누는 일은 생각보다 고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물건 하나하나에 깃든 시간을 더듬는 손길만큼은 조심스럽고 다정했으리라.

“이사 갈 집이 좁아서 다 가져갈 수는 없겠어. 꼭 필요한 것만 챙기고 나머지는 처분하려 해.”

황샘의 말에는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오래 함께한 물건들을 떠나보내는 일은, 생각보다 마음을 쓰는 일이다.

다음 날, 아내는 다시 황샘의 집을 찾았다. 버릴 물건들에 하나씩 스티커를 붙이다가 침대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이 침대 아직 멀쩡한데. 시골집 침대를 버리고 이걸 가져가면 어때?”

그러나 트럭을 불러 먼 시골까지 옮기는 일은 번거로웠다. 결국 우리는 필요한 사람에게 주기로 마음을 모았다. 황샘이 “먹을 사람도 없고 남는다”며 건넨 약주 세 병과 오래된 약탕기를 들고 돌아오는 길, 왠지 모르게 마음이 묵직했다.

며칠 뒤, 이사 견적을 보러 오겠다는 부탁을 받고 다시 찾은 황샘집 앞에서는 작은 해프닝이 벌어졌다. 두 이사 업체가 동시에 도착한 것이다. 뒤늦게 온 업체는 “이렇게 겹쳐서 견적 보는 건 곤란하다”며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사소한 일 같았지만, 그 장면을 보며 아내는 다시 한번 마음을 정했다.

“그냥 버리기엔 아깝잖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자.”

그렇게 시작된 나눔은 예상보다 깊고 따뜻했다. 아들에게 도움을 청하자 그는 기꺼이 동참했다. 직접 와서 물건들을 사진 찍고, 상태를 꼼꼼히 살피고, 생산 연도까지 확인해 정성스레 올렸다. 그것은 단순한 중고 거래가 아니었다. 물건에게 ‘두 번째 삶’을 찾아주는 일이었다.

첫 번째로 찾아온 이는 40대 중반의 부부였다. 책상과 걸상, 책꽂이, 안방 서랍장을 가져가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아내는 웃으며 말했다.

“이 책상에서 공부한 아이들이 교수도 되고 의사도 되었어요. 좋은 기운이 자녀에게도 닿길 바라요.”

물건은 나무와 철로 만들어졌지만, 그 위에 쌓인 시간은 분명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된다.

작은 앉은뱅이 밥상을 가져간 50대 후반의 아주머니는 “제사나 손님상에 쓰겠다”라고 했다. 농장에서 쓰겠다며 세탁기와 책장을 함께 실어간 사장님은 “공구 보관하기 딱”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마을회관에 둘 소파를 받으러 온 이장님과 청년회장은 빗속에서 묵직한 가죽 소파를 트럭에 실었다. 낡았지만 튼튼한 그 소파는 이제 또 다른 이야기들의 배경이 될 것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이는 시골의 아버지를 위해 침대를 찾았다는 50대 남성이었다. 오래된 침대가 마음에 걸렸는데 마침 올라온 글을 보고 연락했다는 것이다. 그는 커다란 침대를 조심스레 차에 싣고 말했다.

“아버지께 드릴 수 있어 다행입니다.”

그 한마디에, 가격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한동안 주인을 찾지 못했던 1인용 침대는 어느 날, 젊은 사장님의 손에 실려 갔다. 혼자 사는 이웃 할머니가 바닥에서 주무시는 것이 마음에 걸려 찾던 중이었다고 했다. 그의 선한 마음 덕분에 침대는 누군가의 등을 받쳐줄 따뜻한 자리가 되었다.

이 나눔은 2주 동안 이어졌다. 아내는 친구가 마음 편히 이사하도록 곁을 지켰고, 아들은 주말마다 먼 길을 오가며 정성을 보탰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새삼 깨달았다. 물건을 정리하는 일은 단순히 공간을 비우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에게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선물이 된다.

버린다고 생각했던 물건들이,

사실은 새로운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 과정을 지켜보며 우리는 알게 되었다.

나눔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만 아깝다는 마음을, 조금만 더 멀리 보내는 일이라는 것을.

태풍이 지나간 뒤의 하늘처럼,

비가 그친 자리에는 생각보다 맑은 마음이 남았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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