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에 걸린 자작나무숲

비와 바람, 그리고 가족과 함께한 흑백의 마법

by 허정호

마법에 걸린 자작나무숲(2025.5월 어느 토요일)

뚝뚝 떨어지는 빗소리에 눈을 떴다. 전날 밤, 일출을 보겠노라 다짐했지만 창밖의 빗줄기 앞에서 그 계획은 미련 없이 내려놓았다. 해안가를 걸으며 아침 공기를 마셔볼까도 잠시 생각했으나, 살을 파고드는 찬 기운에 마음을 접고 숙소 식당으로 향했다.

며느리는 사과를 챙겨 왔고, 아들은 컵라면과 토스트를 가져왔다.

“숙소에서 컵라면이랑 토스트, 커피도 줘요. 아빠도 내려가 보셔요.”

나는 식빵 두 장을 토스트기에 넣고 치즈 한 장을 얹었다. 컵라면에 끓는 물을 붓고 자리에 앉았다. 우리가 오가는 사이, 며느리는 사과를 깎아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견과죽과 함께 먹는 사과, 토스트, 그리고 컵라면의 조합은 의외로 괜찮았다.

머리를 말리느라 늦은 딸도 커피와 토스트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먹어도 줄지 않는 컵라면을 들고 아들에게 “먹을래?” 하고 물었더니,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히 욕심을 냈나 싶어 쓴웃음이 났다.

서둘러 아침을 먹었지만 출발은 10시가 훌쩍 넘었다. 강릉을 지나자 빗방울은 멈췄지만 하늘은 여전히 먹구름으로 가득했다. 다시 쏟아질 듯한 공기였다. 홍천휴게소에서 잠시 쉬며 옥수수 세 개와 쌀과자를 샀다. 오후 1시가 넘어 자작나무숲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료 5천 원은 지역화폐로 다시 돌려받았다.

점심을 먹고 숲으로 향했다. 입구의 안내원은 “시간이 늦었으니 큰길로 올라가 빨리 내려오세요”라고 했다. 산 중턱까지 이어진 시멘트길은 가팔랐지만 바람을 막아주어 견딜 만했다. 그러나 흙길에 접어들자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우리는 지퍼를 끝까지 올리고 모자를 눌러썼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하늘은 잿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길 양옆의 자작나무들은 듬성듬성 서 있었다. 밋밋한 길을 오르며 마음 한편에 짜증이 스쳤다. 앞서간 아들 부부는 보이지 않았고, 뒤처진 아내와 딸과 나는 삼거리에서 갈라졌다. 누군가 “전망대 말고 자작나무숲으로 바로 가야 좋다”라고 했지만, 나는 가까운 전망대를 택했다. 아내와 딸은 다시 내려가 숲길로 향했다.

전망대에 가까워질 즈음, 자작나무숲으로 가던 아들 부부가 나를 보고 발걸음을 돌렸다. 함께 오른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뜻밖이었다. 한 폭의 수묵화처럼 펼쳐진 순백의 숲이 산 아래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제야 이 한 시간을 오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한 장을 남기고 숲으로 내려갔다. 멀찍이 아내와 딸이 흰 숲길을 따라오고 있었다.

“이 길로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아내의 말에 괜한 오기로 함께하지 않은 것이 미안해졌다.

숲 속은 전망대에서 본 풍경과 또 달랐다. 흑백의 시간 속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 키 큰 자작나무들이 서로 스치는 소리가 들렸고, 그 사이를 파고드는 바람은 마치 환영 인사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하얀 나무들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마법에 걸린 사람들처럼 잠시 현실을 잊었다.

마지막 장면을 남기고 싶어 해설사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그는 파노라마로 사진을 찍으며 말했다.

“멋진 추억 만들어 드릴게요.”

사진 속 우리는 자작나무 한가운데 멈춰 서 있었다. 흰 나무들과 함께, 그날의 시간도 잠시 멈춘 듯했다.

내려오는 길은 여전히 으슬으슬 추웠다. 손을 호주머니에 넣자 아내가 말했다.

“넘어지면 위험해.”

“손이 얼어서 그래. 조심할게.”

짧은 대화 속에도 서로를 향한 마음이 묻어났다.

숙소로 돌아와 몸을 씻고 황토방에 누웠다. 잠시 쉰다는 것이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인제읍에서 미리 알아본 식당은 문을 닫았고, 다른 식당들도 대부분 영업을 끝낸 뒤였다. 골목을 헤매다 불이 켜진 한 정식집을 발견했다. 마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저녁 8시. 간단히 먹자고 들어갔지만 생선과 돼지고기 두루치기, 여러 반찬이 푸짐하게 차려졌다. 배고픔과 추위가 녹아내리며 하루의 피로도 함께 풀렸다. 우리는 그 집을 마음속 ‘인제의 맛집’으로 조용히 등록했다.

그날 우리는 자작나무숲의 마법에 걸렸다.

비와 바람, 약간의 오기와 작은 미안함까지도 모두 감싸 안은 채.

그리고 그 마법은 하루 종일, 아니 그날의 사진처럼 오래도록 우리 곁에 머물러 있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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