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 이끈 길 위에서 만난 봄의 두 얼굴
우연이 이끈 길 위에서 만난 봄의 두 얼굴
며칠 전, 목사님 부부에게서 연락이 왔다.
“순천 홍매화 보러 가지 않으실래요?”
우리는 순천에 홍매화가 유명한 줄도 몰랐다. 그런데 약속한 날 하루 종일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다. 꽃은 맑은 하늘 아래에서 보아야 제맛일 텐데 싶어, 목적지를 통영의 동백 카페로 바꾸기로 했다.
아침부터 빗줄기는 굵었다. 간간이 잦아들긴 했지만 우산 없이는 한 발짝도 나서기 어려운 날씨였다. 오전 11시, 우리는 만나서 통영의 동백커피식물원으로 향했다.
카페에 인근의 맛집에서 4인 정식을 주문했다. 고등어구이와 수육, 장어회, 구수한 된장찌개와 봄동 김치까지—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은 봄날의 밥상처럼 넉넉했다. 비 오는 날의 따뜻한 한 끼는 그 자체로 위로였다.
카페에 도착하니 입구 앞 주차장은 이미 만차였다. 도로 한쪽에 조심스레 차를 세워 두고 기다리는데, 마침 한 차량이 빠져나갔다. 자연스레 그 자리에 주차를 마쳤다. “항상 착하게 살면 이렇게 주차도 잘 되나 보다” 하는 농담에 모두 웃음이 터졌다. 사소한 행운이 하루의 기분을 밝히는 법이다.
입장료를 내고 각자 차를 주문한 뒤 진동벨을 들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몇 해 전 이곳이 막 문을 열었을 무렵 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식물원은 더욱 풍성해졌고, 공간은 사람들로 가득 찼으며, 식물들은 한층 정갈하게 가꾸어져 있었다.
하우스 안으로 들어서니 동백꽃은 이미 많이 져 있었다. 대신 부겐빌레아가 화려한 색으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우리는 동백나무가 보이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차를 마셨다. 목사님은 휴대전화로 동백나무 사진을 찍어 AI에게 부탁하더니, 활짝 핀 동백꽃으로 다시 피워 보여주셨다. 사라진 꽃을 기술로 다시 피워내는 장면에 모두 감탄했다.
부겐빌레아 꽃길을 따라 걸으며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카페는 단체 손님들로 더욱 붐볐다. 나오는 길, 관광버스 두 대가 연이어 손님을 내려놓는 모습을 보고는 “대박이네!” 하며 웃었다. 비 오는 날의 동백 나들이는 그렇게 성황 속에 마무리되었다.
집으로 돌아와 문득, 가지 못한 순천 홍매화가 마음에 남았다. 검색창에 ‘순천 홍매화’를 입력하는 순간, 화면 가득 번지는 붉은빛이 눈을 사로잡았다.
“내일은 날씨도 좋다는데, 홍매화 보러 갈래?”
다음 날 아침, 막내 동생 부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순천 홍매화 보러 가실 분 손 드시오.”
그렇게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섰다.
한 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곳은 순천순복음교회.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한산했다. 교회 마당 어디에도 홍매화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검색해 보니, 우리가 찾은 곳은 다른 교회였다. 목적지는 **순천복음교회**였다.
평일이었지만 주차장은 거의 만차였다. 다행히도 마침 차량 몇 대가 빠져나가 주차를 할 수 있었다. 교회 앞 정원은 온통 붉은색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입구의 십자가가 세워진 작은 연못가에는 떨어진 홍매화 꽃잎이 수채화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사진을 담느라 분주했다. 우리도 그 틈에 서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정원 사이사이로 난 산책로는 방문객을 배려한 듯 편안했다. 붉은 홍매화 사이에 청매화가 어우러져 색의 대비를 이루었다. 화려함과 단아함이 한 자리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교회 입구에서는 관광객들을 위해 따뜻한 매실차를 무료로 나누어 주고 있었다. 크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정성스럽게 가꾼 홍매화 정원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그 여운을 안고 우리는 탐매마을로 향했다. 골목 입구에 차를 세우고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홍매화가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법한 평범한 골목이었다. 그러나 붉은 꽃이 피어 있는 순간, 그 골목은 전혀 다른 세상이 되었다.
길 양쪽으로 듬성듬성 피어 있는 매화는 오히려 여유로웠다. 가득 채워진 화려함 대신, 자연스럽게 자라난 꽃들이 자유롭게 숨 쉬고 있었다. 작은 공원으로 오르는 장독대와 소박한 쉼터는 정겹기 그지없었다.
인근의 매산중학교 흙담길은 옛 정취를 품고 있었고, 매산고등학교 정원에도 홍매화와 청매화가 함께 피어 발걸음을 붙들었다. 돌아 나오는 길, 순천의료원 앞에서도 붉은 매화가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리는 도토리묵 전문점 나눌터에 들렀다. 도토리 비빔밥과 도토리수제비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소박하지만 깊은 맛이었다.
비 오는 날의 동백과, 맑은 날의 홍매.
계획은 바뀌었지만, 봄은 제때에 우리 곁으로 왔다.
어쩌면 여행이란, 목적지에 도착하는 일이 아니라
그날의 하늘과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한 걸음씩 내딛는 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