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절밥 먹는 즐거움

4) 절밥은 배보다 마음을 먼저 채운다

by 허정호

절밥은 배보다 마음을 먼저 채운다


화엄사 절밥이 맛있다는 글을 접했다.

송광사, 해인사, 통도사에서 먹었던 절밥이 문득 그리워졌다.

집에 온 아들에게 말했다.

“화엄사 절밥이 맛있다는데, 한번 가보자.”

공양 시간은 11시 30분.

조금이라도 늦으면 밥이 없을 수도 있다는 말에 서둘러 출발했다.

10시쯤 도착해 화엄사 보물들을 둘러보았다.

각황전. 세월의 결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대들보와 기둥들.

그 안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사사자삼층석탑과 함께 어우러진 그 뒷 편의 소나무 한 그루,

마치 오래된 그림 속 한 장면 같았다.

공양 시간은 아직 멀었지만 미리 공양간으로 직행,

공양간 입구에서 마주친 「一日不作 一日不食」의 글귀가

백수가 된 내 머릿속을 잠시 맴돌다가 사라졌다.

문은 닫혀 있었고, 앞서 도착한 한 가족이 있었다.

공양주 스님은 “시간 맞춰 오세요”라며 문을 조용히 닫았다.

우리는 템플스테이 숙소 앞 마루에 앉아 목을 축이며 기다렸다.

그 사이 자원봉사자 보살님이 신도들을 데리고 공양간으로 들어갔다.

스님 몇 분은 두 손에 바루(놋그릇)를 감싸고 공양간으로 들어가

부처님께 올릴 공양을 준비하고 있었다.

줄은 길어졌다.

그런데다 템플스테이 온 사람들이 “돈 내고 온 사람 먼저요!”하며 앞서 들어섰다.

우리도 시주하고 왔는데....

순식간에 우리 앞 줄이 50명 가까이 늘어났다.

식당 종이 울리고 채 5분이 되지 않아 우리 차례가 왔다.

하지만 “잠깐만요” 하는 공양간 스님의 목소리에

벌써 밥이 없어 못 먹는 게 아닌가 하고 긴장했다.

놓여있던 밥반찬이 금세 떨어져 그릇을 정리되고 있었다.

나물이 담겨 있는 그릇에 밥 한 주걱을 담고 비빔밥을 비볐다.

아내는 매운 걸 못 먹어 고추장을 조심스레 걷어냈다.

죽이 있다는 걸 알아챈 아내는 공양간 보살님으로부터 죽 한 그릇을 얻어왔다.

조용히 앉아 먹는 절밥.

시래깃국 한 숟갈, 나물 한 젓가락.

허기가 더해져서인지, 마음이 정갈해져서인지 맛있게 먹었다.

깨끗한 야외 세척실에서 식기를 직접 씻고 건조기에 식기를 넣었다.

그마저도 조용하고 감사한 일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천은사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

어느새 다시 출출해진 배를 안고

자주 가던 청국장집으로 향했다. 절밥은 소화도 빠르지만

그보다 마음을 먼저 채워주는 밥이었다.


사사자 삼층석탑과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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