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산청장날, 호박으로 채운 하루

호박 2개 천 원의 즐거움

by 허정호

호박 2개 천 원의 즐거움


시골집 마당 가꾸기 가는 날이 장날과 겹치면, 산청장은 그 자체로 즐거움이 된다. 장날이라 하지만 북적거리는 대도시 장터와는 다르다. 한적하고 정겨운 시골장, 적당한 활기가 흐른다. 큰길 옆에 차를 세우고 과일상점 골목으로 들어서면, 좁은 도로 양쪽에 노점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어 “오늘은 장날”임을 알린다. 시장 안 상가는 한산하지만 골목의 노점들은 오히려 시장의 주인이 되어 흥을 돋운다.

지난번 장날에는 호박 세 개를 이천 원에, 쥐눈이콩 세 되를 3만 6천 원에, 그리고 단감·감자·가지·무·대파를 각각 오천 원어치씩 샀다. 대파는 많아 시골집 마당 한쪽에 임시로 심어두기도 했다. 카트기를 달달 끌며 노점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다. 살 것처럼 기웃거리기만 해도 상인들은 이미 봉지를 꺼내 놓는다.

장을 한 바퀴 돌고 나서 눈여겨본 당근 오천 원어치, 손바닥보다 큰 상추 한 소쿠리 삼천 원, 양파 한 바구니에 오천 원을 샀다. 그리고 드디어 눈길을 붙잡았던 호박 노점으로 갔다. 식당 앞으로 쌓여 있는 크기 제각각의 호박더미. 종이 박스에는 “호박 2개 천 원”이라고 적혀 있었고, 박스 안에는 천 원짜리 몇 장이 흩어져 있었다. 낡은 작업복에 장화를 신은 사장님이 간이 의자에 앉아 있다가 “마음에 드는 걸로 두 개 골라가라”라고 했다. 나는 반찬해 먹기 좋은 주먹만 한 것 두 개와 머리통만 한 큰 것 두 개를 골랐다. 그러자 사장님은 중간 크기의 호박을 덤으로 챙겨줬다.

노점들 사이사이에서 도토리묵을 파는 할머니에게서는 “직접 만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만 원에 두 모를 샀다. 아내는 “호박이 너무 싸다”며 아쉬움을 남겼다. 그렇게 시장을 마치고 시골집에 도착해 호박과 양파를 채 썰어 밴댕이 육수에 메밀국수를 끓였다. 국수를 먹는데 가을비가 갑자기 우두둑 떨어져, 장에서 사 온 것들을 허겁지겁 방 안으로 들여놓았다.

비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카트에 담긴 호박을 바라보다가, 아내는 “가볼까? 혹시 아직 호박이 남아 있을지 몰라”라고 했다. 비가 내려 노점상들이 이미 집으로 갔을 거라는 예감이 들어 허탕일 듯했지만, “허탕이면 비 오는 산청장에 드라이브 한 번 다녀온 거지” 하는 마음으로 다시 골목으로 들어섰다.

노점상들은 온데간데없이 도로 양옆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호박은 여전히 식당 앞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비를 맞으며 우리를 기다린 듯. 식당 안에서 주인을 찾으니 아주머니가 “두 개 천 원에 그냥 골라 가라”라고 했다. 나는 삼천 원을 건네고 여섯 개를 고르며 “하나 더 가져가도 될까요?” 하고 묻자, 아주머니는 “몇 개 더 가져가라”라고 너그럽게 말했다.

결국 차 뒷트렁크에 일곱 개, 뒷좌석에 다섯 개,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를 더 얹어 총 열여덟 개의 호박을 싣게 됐다. 오천 원에 호박 열여덟 개라니. 차를 가득 채운 호박들을 보니 묘한 뿌듯함이 밀려왔다. 주룩주룩 내리는 비와 함께 돌아오는 길, 아내와 나는 뜻밖의 횡재에 웃음이 절로 났다.

아내는 집에 돌아와 호박과 양파를 넣고 강된장을 끓였다. 파를 송송 썰어 넣고 계란 프라이와 함께 비벼 상추에 싸 먹었다. 빗소리를 배경 삼아 먹는 이른 저녁은 그 어떤 진수성찬보다 고소하고 따뜻했다. 큰 호박 몇 개는 집안 이곳저곳에 장식처럼 두었다. 나머지 호박들은 현관 앞에 탑처럼 쌓았다.

앞으로 이 호박들이 어떤 모습으로 우리 밥상에 오를까? 된장찌개, 호박전, 호박죽, 볶음… 상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날 장터에서 얻은 건 단순히 호박만이 아니었다. 시골 장날만의 푸근한 정, 비 오는 날의 의외의 횡재, 그리고 삶이 조금 더 넉넉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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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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