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오늘은 비빔밥, 내일은 된장찌개

식탁 위에 피어오른 웃음

by 허정호

식탁 위에 피어오른 웃음


빔프로젝터가 점점 희미해져 결국 서비스센터를 찾았다. 수리를 맡기고 내려온 매장에는 최신 TV들이 진열돼 있었고, 그중 몇 대는 반값이라 했다. 아내와 나는 잠시 반값에 홀려서 발걸음을 멈췄다. 아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TV를 버린 뒤, 가끔 텅 빈 거실이 아쉽기도 했던 터였다. 하지만 곧 딸이 휴가를 받아 집에 온다는 사실이 떠올라, 눈길을 거두었다.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믹서기도 둘러볼까 했지만 발길을 집으로 돌렸다. 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대패목살과 소고기를 한 팩씩 사왔다. 목살은 바로 구워 먹고, 소고기는 딸이 좋아하는 미역국에 넣을 참이었다. 하지만 미역을 미처 담가두지 못해 미역국은 저녁으로 미루기로 했다.

집에 도착하니 마침 딸이 가방을 끌고 들어섰다. 아내는 상추를 씻었고, 나는 프라이팬 앞에 서서 목살을 굽기 시작했다. 그런데 상추가 오래돼 절반은 녹아내렸다. 아내는 금방이라도 마트에 되돌려주고 싶다며 툴툴댔지만, 결국 쓸 만한 잎만 골라내 식탁에 올렸다. 김치를 썰어 놓고, 생된장도 소박하게 곁들였다. 그렇게 차려진 점심은 단출했으나 푸짐해 보였다.

나는 목살을 부지런히 구워 날랐고, 갓 지은 밥은 윤기가 흐르며 감탄을 자아냈다. 김치에 싸 먹는 돼지고기 맛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쁨이었다. 아내는 상추에 목살을 올려 된장을 곁들였고, 딸은 고추냉이까지 올려 먹으며 싱긋 웃었다. 나도 따라 했다가 알싸한 매운맛에 코가 터지는 줄 알았다. 식탁 위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남은 고기를 바라보며 딸에게 물었다.

“이걸로 저녁에 된장찌개를 끓여줄까, 소고기 미역국을 끓여줄까?”

딸은 웃으며 대답했다.

“된장국이 맛있겠어요.”

그 말에 내 머릿속에는 이미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그때 아들부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빠, 동생 휴가 나왔다면서요? 비빔밥 먹으러 가요.”

뜻밖의 저녁 해방이었다. 나는 즐겁게 “오케이” 하고 응했다.

우리는 단골 비빔밥집으로 향했다. 아들은 비빔냉면을, 딸은 갈비탕을, 우리는 비빔밥을 시켰다. 그런데 비빔밥 위의 육회가 그대로 올라와 있었다. 미처 익혀 달라 말하지 못한 탓이었다. 급히 부탁해 고기를 익혔고, 밥도 한 공기 더 시켰다. 아내와 나는 추가된 밥을 반씩 나눠 넣어 간을 맞추고. 비빔밥 한 공기를 떠서 아들에게 건넸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식당 앞 흰 고양이가 아내에게 다가와 몸을 비볐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구두를 물어뜯어 구멍을 냈다. 며칠 전 새로 산 구두였다. 아내는 얼굴이 굳었고, 고양이 주인은 그저 “아이고, 어쩌니…”만 반복했다. 하는 수 없이 구두를 산 곳으로 갔다. 사장은 본드로 붙여 주며 미안해했다. 집에 돌아오자 딸이 색연필 가루를 갈아 정성껏 흠집을 메워 주었다.

그날 밤, 내 머릿속은 다시 식탁의 풍경으로 가득 찼다. 내일 점심에는 소고기 미역국, 저녁에는 구수한 된장찌개. 가족과 함께 나눌 따뜻한 국물의 향이 벌써 코끝을 간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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