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하니 Jul 04. 2022

"제가 잠을 못 자서 병원에 왔어요."

만 스물 세 살 첫 정신과 방문기 (2)

사람의 기본 욕구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나는 수면욕이라고 생각한다.


충분한 수면은 건강한 정신과 건강한 신체를 위해 그 무엇보다 우선시되어야 조건 중 하나이다. 특히 나 같은 만성 우울증 환자에겐 말이다.



어느 정신과나 처음 방문을 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심리 검사다.


심리 검사라고. 말은 거창하지만 사실 별 거 없다. 조금 더 길고, 조금 더 세분화 돼 있고, 조금 더 한 쪽에 편중한 MBTI 검사지 같달까.


그러한 검사지는 대부분 지금 나의 심리 상태를 묻기 위한 질문들로 채워져 있다.


'지난 2주 동안 충분한 수면을 취했습니까?'


A. 매우 그랬다. B. 그럭저럭 그랬다. C. 보통이다. D. 별로 그렇지 않다. E. 매우 그렇지 않다.


'최근 2주 동안 자살 생각을 하거나, 계획을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A. 매우 그랬다. B. 그럭저럭 그랬다. C. ......



지금 생각나는 것만 하면 이 정도이지만 실제로 병원에 가면 좀 더 다양하고 풍부한 질문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심리 검사는 모두 내원에 앞서 한자의 현재 상태를 파악하기 위함이다. 왜, 뼈가 부러져서 정형외과에 가도 엑스레이를 찍어야 그것을 보고 의사가 진단을 내려줄 것 아닌가?


'삐빅. 이건 빼박 골절입니다.'


이렇게.


그렇다고 우리가 스스로 본인이 골절인 걸 모르고 있을까? 그건 아니다.


엑스레이를 찍기 전에도, 다쳐서 병원을 가는 길에도 우리는 속으로 생각한다.


'아, 이거 빼박 골절인데.'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러한 검사지 과정은 엑스레이를 찍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니 웬만하면 정신과 첫 방문 때에는 시간이 넉넉하고 여유로운 날로 택하기로 하자. 예약을 잡을 때 병원에 전화를 해 초진에 걸리는 시간을 물어도 좋다.



내가 고른 병원은 운 좋게도 (?) 초진 때 하는 검사지를 모두 카톡으로 보내주는 곳이었다. 덕분에 나는 약속한 병원 내원 전 날 집에서 느긋하게 질문지를 풀 수 있었다. 물론 초진 때 드는 시간도 훨씬 줄어들었고 말이다.


어쨌든 병원에 처음 내원 예약을 잡을 때에는 초진 때 드는 시간, 비용 등등을 물어보고 가면 좋다.


참고로 만약 병원에서 검사지를 작성한다면 넉넉잡아 여유있게 두 시간 쯤은 생각하고 가야 한다. 그러니 본인이 시간이 안 될 것 같거나 여유가 없다면 빨리 병원에 물어서 조정을 할 것. 중요한 일이다.




그 과정을 거쳐 나는 드디어 정신과 선생님을 만나 뵐 수 있었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어디가 불편해서 어떻게 오셨어요?"'


의사의 그 물음에 나는 서둘러 말을 쏟아냈다.


"요즘 통 잠을 못 자는데, 저는 어렸을 때부터 항상 밤에 잠을 못 잤거든요. 근데 이번엔 좀 심해서요. 밤마다 머리에 총을 쏘고 싶은 충동이 자꾸 들어요."


의사는 차분히 내 검사 결과를 살폈다.


"우울을 느끼는 정도가 고도네요. 그리고 우울증 증상이 신체 증상으로 나타나는 정도가 심하구요. 그리고 본인이 우울증인 걸 잘 못 느끼고 있네요."


대충 이런 정도의 말이었다.


그러니까 해석하자면 다음과 같다. '내 우울증은 그 기간이 너무 오래돼어서 이제 나는 항상 우울증 상태인데도 그 상태가 디폴트라고 믿고 생활한다고. 그래서 본인이 우울한 것도 잘 못 느끼고 있다고.'


맞는 말이다. 나는 처음엔 단순히 내 성격이 우울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의사는 다음으로 가족 관계를 물었다.


아빠, 그리고 동생과 함께 살고 있다는 말에 의사는 어머니를 물었다.


나는 엄마는 돌아가셨다고 답했다.


의사는 '어떻게 돌아가셨죠?'


라고 물었고, 거기에서 나는 '올 것이 왔다.'는 걸 느꼈다.


나는 잠시간 침묵했고, 속으로 말을 고르고 고르다, 그냥 내뱉듯이 말해버렸다.


"...자살하셨어요."


하고.


그 한마디에 의사는 모든 걸 다 깨달았다는 듯 탄식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곳에서 나는 마치 나의 우울이 교과서 같다고 생각했다. 정석의 길을 걸어온 우울증 마냥.


우울증에 대해 표면적으로 접해본 누군가 '우울증 환자라면 이런 배경이 있어야 돼.'하며 창작한 스토리의 주인공이 된 느낌이랄까.


하지만 나는 서둘러 덧붙여 말했다. 내 우울증이 엄마의 자살 때문은 아니라고.


엄마의 자살이 우울증에 기여한 바가 분명히 있지만 내 우울은 아주 오래 전부터, 엄마가 죽기도 훨씬 전부터 있었다고 말이다.


엄마가 죽었든 안 죽었든 나는 여전히 우울증 환자였을 것이다. 그것을 분명히 하고 싶었다.


의사는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묻고, 열심히 뭔가를 적더니, 항우울제 일주일 치와 수면제를 처방해 주었다.


정신과에선 특이하게 처방전이 아니라 병원에서 약을 곧바로 준다. 약봉투 겉에는 아무런 무늬도, 표시도 없다. 아이러니하게 그 깨끗한 봉투가 오히려 정신과라는 것을 더 분명히 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병원을 나왔고 내 첫 항우울제 투약이 시작됐다.


작가의 이전글 만 스물 세 살, 첫 정신과 방문기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