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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도시를 만들고, 도시는 사람을 만든다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 유현준

by 이달밤






... 통섭이 화두로 등장한 지 10년이 돼 가지만 아직도 자리를 잡지 못하는 까닭은 문과와 이과로 분리된 교육을 받은 많은 인문학자와 자연과학자들이 여전히 넘나듦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11p)


대학 시절, 나는 도시 관련 분야를 전공했었다. 나름 지리, 건축, 도시 등의 분야에 관심이 많았고 적성에도 제법 잘 맞는다 생각해 석사 과정까지 밟았으나 중간에 그만두었다(!) 돌이켜보면 나의 석사 과정 실패는 통섭적 사고의 부재로 인한 참상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연구했던 분야 역시 도시와 빅데이터를 접목한, 다소 공학적인 색채가 짙은 분야였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수포자였던 나는 석사 과정 내내 잘 해낼 수 없을 근거 없는 좌절감에 휩싸였다. 끝내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1년 만에 뛰쳐나온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을 끄집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책의 앞부분에는 최재천 교수의 추천사가 쓰여있는데, 잠깐. 이 분은 생물학 하시는 분 아니던가? 생물학자가 도시-건축분야 서적의 추천사를 써주다니, 분명 어떤 사연이나 계기가 있을 것이다. 역시 평소에도 *통섭을 강조하시는 분 답게 여기서도 통섭을 이야기하고 있다. 건축이야말로 "단순히 예술이 아니라 과학이며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이 종합된 학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통섭(統攝, Consilience)이란 인문학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의 융합을 의미한다. 최재천 교수는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이라는 책의 번역을 맡기도 했다.) 이 책을 읽기에 앞서 갑자기 눈이 핑핑 돌았다. 혹시 막 복잡한 수식이나 도면 같은 게 나오면 어떡하지? ... 다행히도 이 책은 공학적인 기술보다는 도시가 사람과 어떻게 상호작용해야 하는지를 다루는 인문학에 더 가까웠다. 물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간단한 통계적 실험과 도면들이 나오긴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야기하려는 바는 '도시'와 '사람'이다. 어떤 도시를 만들 것인지에 대한 인문적 고찰이 핵심이고, 과학적이고 공학적인 방법론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유용한 도구인 셈이다.


아무튼, 나는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으며 발견한 인문적 고찰 몇 가지를 소개하려고 한다. 이 책의 제목인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물음과 더불어, 내가 도시학을 수년간 공부하면서도 명쾌한 답을 내리지 못한 '도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

사람이 살지 않는 도시?


EU 공동연구센터의 통계에 의하면 전 세계인의 76%인 약 55억 명이 도시에 살고 있으며, 매년 약 7,700만 명에 달하는 세계인이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도시화 경향이 더욱 두드러지는데, 도시화율이 무려 90.6%에 달한다. 우리나라 인구 10명 중 9명이 도시라는 공간에 사는 것이다.


그런데 흔히 도시의 삶은 항상 정신없이 바쁘며, 비정하고, 삭막한 풍경으로 그려진다. 심지어 누군가는 행복하지 않다고 말한다. 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을까? 인류의 절반 이상이 사는 '도시'에서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인류의 절반 이상이 행복하지 않다는 이야기 기로도 들린다. 심각한 문제이다.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고 느낀 바에 의하면, 도시에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세계인의 대부분이 도시에 산다면서 사람이 없다는 건 무슨 소리인가? 도시화율이나 도시의 인구수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현대에 생겨난 수많은 화려한 도시들이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을 고려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르 코르뷔지에(1887~1965)의 대표적인 도시 계획 모델인 '빛나는 도시'


모더니즘 건축의 대표주자인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는 이른바 빛나는 도시라고 잘 알려진 파리 리모델링 계획안을 제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밀도의 고층 대형 건물을 지어서 건물과 건물 사이를 크게 떨어뜨려놓고, 그 사이에 공원을 만들어서 도심 속에서도 자연을 느끼면서 살게 하자는 것이다. (54p)

비록 이 계획은 파리에서 실현되지 못했으나 훗날 여러 개발도상국의 도시 개발 모델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설명과 도면을 보면서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드는 것은, 우리나라의 아파트 단지 계획은 이 모델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기 때문이다.




서울의 아파트 단지들

이 시기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철학은 "집은 살기 위한 기계다"라는 그의 명언에서 잘 드러난다. 그의 도시계획 모델은 전후 복구 과정에서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건축 수요를 감당하기에 적절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기술과 기능, 계량화에만 몰두하여 천편일률적이고 기계적인 도시를 만들었으며, 도시 건축의 다양성과 그것으로부터 느끼는 인간의 감정을 간과했다는 혹평을 받았다. (*르 코르뷔지에가 한평생 합리주의적인 건축 철학으로 일관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후기 건축 양식은 같은 사람이 설계한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숭고하고 감성적이다.) 결국 집이 인간의 생활환경에 맞춰지는 것이 아닌, 사람이 집의 모양새에 맞춰 들어가는 형국이 된 것이다.


이 평가는 우리 도시를 수놓은 성냥갑 아파트를 바라보며 받는 느낌과 정확히 일치한다. 아파트 그 자체보다는 다양성과 인간성을 무시한, 획일적이고 기계적인 도시 설계가 도리어 그 안에 사는 인간을 압도하며 인간 소외를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 본질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사는 도시

'휴먼 스케일(Human Scale)'의 도시


그렇다면, 사람이 사는 도시, 인간 친화적인 도시는 어떤 모습일까? 바로 휴먼 스케일(Human Scale)의 도시라고 정의할 수 있었다. 휴먼 스케일의 도시는 사람이 감당할 수 있을 만한 크기의 건축물, 구조물, 거리 등으로 이루어진 도시라고 할 수 있다. 휴먼 스케일의 공간에는 사람의 눈길과 발길이 닿기가 쉽고, 그 공간을 사람의 활기로 채울 수 있게 된다.


뉴욕의 센트럴 파크(위)와 보스턴의 코먼 파크(아래)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뉴욕의 센트럴 파크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심 한복판의 숲, 뉴욕 시민들의 휴식 공간 등으로 잘 알려진 센트럴 파크가 치안 문제 때문에 저녁에는 문을 닫는다는 사실이다. 유현준 교수는 뉴욕 센트럴 파크의 치안 문제가 지나치게 큰 규모 때문에 발생한다고 진단했다. 3.41 km²의 거대한 면적을 자랑하는 센트럴 파크의 한복판에는 공원 주위의 마천루에서도 내려다볼 수 없는 사각지대가 생긴다고 한다.

한편 센트럴 파크를 설계한 프레드릭 로 옴스테드(Frederick Law Olmsted, 1822-1903)의 또 다른 작품, 보스턴의 코먼 파크(Common Park)는 센트럴 파크에 비해 그 규모가 확연히 작다. 주위의 고층 건물에서는 공원의 모든 방향을 내려다볼 수 있어 사각지대가 생기지 않는다. 덕분에 코먼 파크에서는 저녁에도 안전하게 산책을 즐기러 나오는 주민들을 드물지 않게 만나볼 수 있다.


사람의 눈길이 잘 닿는 곳은 안전하고 사람의 발길이 잘 닿는 곳은 활기차다. 강남대로, 테헤란로와 같이 넓고 시원하게 뚫린 거리보다 신사동 가로수길, 홍대거리와 같이 좁고 구불구불한 거리들이 왠지 더 인간적이고 활기가 넘치며, 더욱 다채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휴먼 스케일이란 것은 곧 그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도시를 만들고, 도시는 사람을 만든다

도시는 하나의 생명체, 그 안에 살아가는 생명체들


유현준 교수는 만들어진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며 설계자의 의도대로 작동하는 기계와 달리 도시는 자연발생적인 방식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하며, 그 변화가 설계자의 의도대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도시는 인간이 만든 인공물이면서도 인간의 라이프스타일과 지혜가 축적되어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자연물이기도 하다. 자연적으로 발생한 공간은 자로 잰 듯 네모반듯하지도 않고 그 크기도 제각각이지만 오히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의 라이프스타일과 규모에 정확하게 맞춰져 있다. 그러면서도 모두 그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묘한 일체감이 있다. 누군가가 계획하고 만든 것도 아닌데 말이다.


도시가 그들만의 맛과 멋을 갖추기 위해서는 숙성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저자는 좋은 건축은 포도주 같은 건축이라고 이야기한다. 지금은 무색무취하고 몰개성해 보이는 성냥갑 아파트 또한 그들만의 자연적인 방식으로 변화하며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지혜가 충분히 녹아든다면 이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의 모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다양한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이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과 도시의 모습 또한 그 어느 시대의 것보다 다양하고 복잡할 것이다. 그것이 아파트일 수도 있고, 어느 좁다란 골목길일 수도 있으며, 시원하게 뻗은 넓은 도로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됐든 그 안에 사는 사람의 삶을 담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유현준 교수는 한국이 건축하기 좋은 교육 환경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유인즉 학창 시절부터 국어, 수학, 영어, 사회과학, 자연과학 등 여러 가지 학문을 두루 접하다 보니 다방면에 배경지식을 갖춘 인재를 길러내기 쉽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건축 분야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Pritzker Architecture Prize) 수상자를 단 한 명도 배출해 내지 못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는 단순히 프리츠커상 수상자를 몇 명이나 배출했는지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그동안 우리의 건축이, 나아가 우리의 교육이 무엇을 추구하고 있었는지 돌아볼 때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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