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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경인 Feb 12. 2024

칡덩굴 혹은 칡과 등나무, 갈등葛藤에 대하여!

갈등의 등藤이 등나무일까?

몇 달 전 <이일하 교수의 식물학 산책>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구절을 만났다. "덩굴줄기의 나선 방향에 얽힌 재미있는 단어 중 하나가 갈등(葛藤)이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갈등은 개인과 집단 사이에 이해관계가 달라 서로 적대시하거나 충돌하는 것을 뜻한다. 칡 갈(葛), 등나무 등(藤)이 더해진 이 말은 칡덩굴과 등나무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감기면서 덩굴 생장이 혼란스러워지는 현상을 보고 옛사람들이 사용하게 된 용어로 보인다. 필자는 제주도의 원시림이라는 곶자왈(환상숲 곶자왈)을 방문하였다가 갈등의 생생한 현장을 감상할 수 있었다. ... 등나무는 일반적으로 반시계방향으로 감긴다. 따라서 이 갈등 현상은 우연히 시계방향으로 감겨 올라가는 등나무와 반시계방향으로 자라는 칡덩굴이 만났을 때 벌어지는 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좌) 등나무 줄기, 2023.12.9 북한산, (중) 칡 줄기, 2024.1.1 화야산, (우) 칡 줄기, 2024.2.3 천마산


이 글을 읽은 후 나는 숲에 다니면서 등나무나 칡덩굴의 감기는 방향을 유심히 관찰하게 되었다. 작년 말 북한산을 걷다가 만난 등나무는 시계방향(왼쪽)으로 감으며 덩굴을 이루고 있었고, 올 1월 화야산과 2월 천마산에서 만난 칡덩굴은 반시계방향(오른쪽)으로 감아 오르고 있었다. 예전에 내가 찍었던 사진을 살펴봐도 등나무는 왼쪽으로, 칡은 오른쪽으로 감기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연 상태에서 칡과 등나무가 충돌하면 감기는 방향이 달라서 서로 껴안지 못하고 싸우는 상태가 될 듯도 싶었다.


칡 덩굴과 열매, 2019.2.9 천마산
(좌) 등나무, 2022.5.1 안동, (우) 등나무 줄기, 2022.4.10 서울 성곽길


1947년에 초판이 간행된 <큰사전>에서 갈등葛藤을 찾아보면 “칡 덩굴과 등 덩굴의 얽힘과 같이, 일이 얽히어 풀기 어렵게 된 상태를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후 1991년 <우리말 큰사전>이나 1992년 금성출판사 간행 <그랜드 국어사전>, 1997년 <동아 새국어사전>도 한결같이 갈등을 칡과 등나무로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니 갈등을 칡과 등나무의 감기는 방향이 달라서 생기는 충돌로 보게 된 것이리라. 그러나 자생 상태에서 등나무와 칡이 같이 자라는 환경을 만나기란 대단히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 등나무는 조경용으로 많이 식재하지만 남부 지방에 제한적으로 자생하기 때문이다. 과연 옛 사람들이 칡과 등나무가 충돌하는 현상을 보고 ‘갈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을까 의문스러운 것이다.


<한국의 나무>에 의하면 등나무(Wisteria floribunda)는 일본과 한국에 분포하며 국내 자생지는 “경남과 경북의 숲 가장자리 또는 계곡에 야생”한다고 했다.** 한편 칡(Pueraria lobata)은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에 모두 자생하는 식물이며, 세 나라 모두 갈葛은 칡을 뜻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등藤을 대개 등나무로 이해하고 갈등을 칡과 등나무로 가리키는 단어로 보지만 중국과 일본의 용례는 조금 다르다. 이 글에서는 동양 3국에서의 등藤과 갈등葛藤의 용례를 살펴보면서 갈등이 자연에서 어떤 상황을 묘사하는 지 살펴본다.


강희자전 등藤과 류藟 (인터넷)


중국의 <강희자전>에 의하면, “등藤, 류藟이다. 지금은 풀이 류藟처럼 덩굴이 지며 자라는 것을 총칭한다.”***라고 했다. <시경식물도감>과 <초사식물도감>에서는 류藟와 갈류葛藟를 새머루(Vitis flexuosa)로 설명한다. <중약대사전>에서도 갈류葛藟를 새머루로 기재하고 있다. 즉 중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등藤은 덩굴로 자라는 식물의 총칭으로 쓰이며, 특정 식물을 지칭할 경우는 새머루 류藟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옥편에서 류藟는 대개 덩굴성 식물의 총칭으로 사용된다. <중국식물지>에서는 등나무(Wisteria floribunda)를 다화자등多花紫藤이라고 하며, “일본 원산으로 중국 각지에 재배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편 중국어사전에서 갈등葛藤은 식물명으로는 그냥 ‘칡’을 뜻한다.


새머루, 2018.5.12 보성


<일한사전>을 찾아보면, 갈등葛藤은 식물명으로는 ‘쯔즈라후지(つづらふじ)’로 댕댕이덩굴, 방기를 뜻한다.***** 1925년 간행 <일본식물도감>에서도 ‘쯔즈라후지’를 방기(Sinomenium acutum), ‘아오쯔즈라후지’를 댕댕이덩굴(Cocculus trilobus)로 기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방기는 서남해 도서 및 제주도에 자생한다고 하며, 댕댕이덩굴은 전국에서 흔히 만날 수 있다. 아무튼 일본에서 갈등葛藤은 식물명으로는 새모래덩굴과의 방기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식물의 한자어원사전>에서는 등藤에 대해 “다른 식물 위로 감아 오르는 식물을 넓게 “~등藤”이라고 이름한다. 단독으로 쓰이는 등藤은 낙엽 목본 중국등나무(Wisteria sinensis, 중국명 자등紫藤)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 일본에서는 일본 특산 등나무(W. floribunda)를 가리킨다.”로 설명하고 있다. 중국등나무는 우리나라에는 자생하지 않는다.


방기, 2018.11.10 제주도 청수곶자왈


조선 중기 문헌인 <훈몽자회>에는 잡어雜語 편에 “藤 너출 등”이 수록되어 있고, 초훼草卉 부에 “葛 츩갈 갈초葛草, 또 갈등葛藤 츩너출”이라고 설명했다. 즉 <훈몽자회>에서는 등藤을 식물 종으로서 등나무로 보지 않고 덩굴이라는 일반 명사로 보고 있으며 갈등葛藤도 칡덩굴이 뜻하는 것이다. <강희자전>에서 등藤을 덩굴성 식물의 총칭으로 설명한 용례와 일치한다. <전운옥편>에서도 “藤 등. 류藟이다. 덩굴로 뻗는다. 갈등葛藤.”으로 설명하고 있다. <물명고>에서는 갈葛에 대해 ‘츩’으로 훈을 달고 있으며, 등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조선광문회 중간본 <훈몽자회>의 葛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원문이미지)

“藤 등. 무릇 덩굴성으로 자라는 풀과 나무를 통칭하여 등藤이라고 한다. 그러나 중국에 등藤 한 종이 있는데, 칡처럼 마디가 길고 껍질은 희며 대나무 껍질처럼 윤기가 있고 바탕이 질겨서 기물을 만들 수 있다. (줄기) 속에는 자그마한 구멍이 많고 바탕은 으름(木通) 처럼 통한다. 이것은 여러 책에 실려 있지 않아서 비록 그 꽃과 잎 모양이나 중국의 속칭을 알지 못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간단히 등藤으로 부르고 있어서 칡(갈) 아래에 덧붙인다.”****** 또한 <물명고>에는 실제 등나무의 일종인 자등紫藤에 대해서, “중국 사람들의 화초이다. 봄에 나누어 심어서 덩굴이 길어지면 큰 나무에 붙인다. 꽃은 자주색이고 드리워지는 가지가 아리따워 즐길만하다.”*******라고 등藤과는 별도 항목으로 다루고 있다.


으름 (좌) 열매, 2021.9.26 신구대식물원, (우) 으름 덩굴, 2020.10.25 청계산


<물명고>에서도 등藤은 덩굴성 식물의 총칭으로 보았고, 중국에는 주로 기물을 만드는데 쓰이는 등으로 불리는 식물이 있지만 어떤 것인지는 자세히 모르겠다고 했다. 아마 당시에 등나무로 만든 가구가 유통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 유통되는 등가구는 래턴(籘, rattan)으로 만든 가구라고 하는데, 이것을 가리킬 가능성도 있을 듯하다. <자전석요>에서도 “藤등. 류藟이다. 덩굴 등”, 최남선의 <신자전>에서도 “藤등. 덩굴성 나무 류藟이다.”로 설명하고 있어서 이 글자가 식물 종으로서 등나무(Wisteria floribunda)보다는 덩굴성 식물의 총칭으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935년 간행 <한일선신옥편>에서는 “藤등. 열대지산熱帶地産 만류蔓藟. 후지(フヂ), 카즈라(カヅラ)”로 설명되어 있다. 이 중 ‘후지’는 <일본식물도감>을 참조하면 등나무를 뜻한다. (현대에는 フヂ 대신 フジ를 쓰는 듯하다.)


등나무 꽃, 2021.4.24 물향기수목원


아마도 일본에서는 중국과 달리 등藤으로 등나무를 지칭한 역사가 깊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이러한 일본의 이해가 도입되면서 등藤을 콩과의 등나무로 설명하게 된 듯하다. 1937년 간행 <조선식물향명집>에서도 등나무(Milletia floribunda)의 한자명으로 등藤을 기재하면서 이러한 이해는 정착된 듯하다. 그러므로 갈등葛藤을 ‘칡덩굴’ 대신 ‘칡과 등나무’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도 일제강점기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조선시대 문헌에서 갈등은 식물을 묘사할 경우 칡덩굴을 뜻할 것인데, 대부분은 “일이 얽히어 풀기 어렵게 된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1629~1711)의 연작시 “안평대군의 글씨 판각본을 보고 감회를 쓰다. (見安平書刻本有感)”의 네번째 시에 나오는 갈등은 글자 그대로 칡덩굴을 묘사하고 있다.********


獻陵西畔舊英陵            헌릉의 서쪽 옛 영릉이 있던 곳에

下臥豐碑覆葛藤            누워 있는 큰 비석에 칡덩굴만 덮여 있네

麟趾撰文瑢寫字            정인지가 글을 짓고 안평대군 용瑢이 글자를 썼는데

如今磨滅漸無徵            지금은 마멸되어 점점 징험할 수 없다오


칡 꽃, 2021.8.22 청계산 - 칡은 줄기도 뿌리도 소용이 많고 꽃도 아름답다!


헌릉은 현재 서울시 내곡동에 있다. 버려진 비석 곁에 조경용 등나무를 심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칡과 등나무가 같이 자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칡덩굴이 다른 나무를 감아 올라가는 상황으로 이해하든, 감기 방향이 다른 칡과 등나무 사이의 경쟁으로 이해하든, 갈등은 생존의 현장인 자연이나 사회에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갈등이 생긴다고 상대를 무조건 배척할 것이 아니라 상호 이해와 존중을 통해 갈등을 풀어나가는 방안도 분명 있을 것이다. 물론 가장 간단한 방법은 일도양단으로 갈등을 유발한 칡덩굴을 댕강 잘라버리는 것이지만, 그것은 생존본능으로 나무를 감은 칡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생존을 위해 칡을 잘라야 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나도 수십년 사회생활 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이곳 저곳에서 수없이 많은 갈등을 일으켰을 것이다. 또한 갈등을 일으키는 상대로 인해 고민하면서 살아왔을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생기는 자기 마음 속의 갈등은 또 어찌할 것인가? 부처님 말씀처럼 일체개고一切皆苦로다!


<끝>

* <이일하 교수의 식물학 산책>, pp. 132~134

** Royal Botanic Gardens Kew에서 운영하는 Plants of the World Online의 분포도를 봐도 Japanese wisteria로 불리는 등나무(Wisteria floribunda (Willd.) DC)는 일본에 자생하며, 우리나라와 중국에는 도입되었다고 표기했다. (https://powo.science.kew.org/taxon/urn:lsid:ipni.org:names:525791-1)

*** 藤:《說文》藟也. 今總呼草蔓延如藟者  - 康熙字典

****多花紫藤(duō huā zǐ téng) Wisteria floribunda (Willd.) DC. … 国外分布:     原产日本, 我国各地有栽培 – 중국식물지 (https://www.iplant.cn/info/Wisteria%20floribunda)

*****つづらふじ(ふぢ) [葛藤] tsuzurafuji (植) (1) 댕댕이덩굴. (2) 방기 – 민중엣센스일한사전.

****** 藤 등. 凡草木之蔓生者 通謂之藤 然中國又有一種藤 節誕如葛 皮白而澤如竹皮 性靭可作器物 中瓤多細竅(not覈) 質通如木通 此不載於諸書 雖未知其花葉之狀 及華人俗稱 然我東則單呼以藤 故附之葛下 - 물명고. (참고: <본초강목>의 목통木通을 보면, “줄기에 작은 구멍이 있어서 양 쪽 머리가 다 통한다. 한쪽 머리를 (입에) 머금고 불었을 때 다른 쪽 머리로 공기가 나오는 것이 좋다. (莖有細孔 兩頭皆通 含一頭吹之 則氣出彼頭者良)”이라고 했다. 이로 미루어보면 “中瓤多細竅 質通如木通”은 줄기 속의 목질부에 작은 구멍이 많아서 으름덩굴 줄기처럼 바람이 통한다는 뜻 같다.)

******* 紫藤. 華人花草 春間分栽 蔓長附于喬木 花紫色 垂條綽約可人 – 물명고.

********한국고전종합DB 번역 인용

+표지사짐-2023.1.28 청계산 - 칡덩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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