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밤, 대추, 감
내가 평생 주경야독하신 선친을 기리기 위해 조부님 문집을 번역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꽤 오래 전이다. 먼저 한문 문법 공부를 하면서, 번역에 참고하기 위해 이런 저런 참고서적을 구입했다. 선친처럼 고된 주경야독은 아니지만 나도 낮에는 회사 일 하고 밤에만 시간이 나므로, 도서관의 장서를 사용할 형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허사대사전, 사서집해사전, 조선후기한자어휘검색사전, 옛편지낱말사전, 역대한국인편저서목록, 한국학주석사전, 훈몽자회주해 등이 그때 구매한 참고서적들이다.
그런데 막상 번역에 착수하면서 부딪친 어려움은, 조부님 글 속에 나오는 수많은 인명들이었다. 이분들과 조부님과의 관계를 알아야 했는데, 이것은 일반 참고서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내가 선택한 방법은 경북 북부 지방의 문집류와 족보류를 수집하여 살펴보는 것이었다. 이때 Kobay라는 경매 사이트를 알게 되었고, Kobay에서 가끔씩 곁눈질로 구매한 책들이 이른바 섭치 고서들이다. 하여간 조고님 문집을 끙끙거리면서 번역하는 과정에서 얻은 소득이 있다면 어느 정도의 한문 독해력 향상이었다. 또 그 덕분에 한문학을 전공하시는 여러분들과 페친이 되는 큰 소득도 얻었다.
몇 주 전에 페친 진선생님께서 공유한 정보를 통해 “2024 호남한국학 강좌 <조선시대 호남지역 출판문화를 읽다>”를 youtube 영상으로 제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만나 뵈었던 분의 발표도 있어서 관심있게 보게 되었고, 조선시대 문헌 발간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귀동냥할 수 있었다. 그 중에 이상현 선생의 “임란 극복의 원동력 가문 출판 – 보성의 출판문화”를 듣다가 언젠가 한번 본 듯한 책 이름과 출판처가 들렸다. 만력 경자(1600)년 간행 <소학집설>과 ‘죽천서당’이라는 이름이었다. 그 날 퇴근한 후, 서재 구석 구석을 뒤져서 소학집설 1권을 찾았다. 내 기억대로 책 뒤에 간행기가 있었다. “만력경자춘萬曆庚子春 산양죽천서당간山陽竹川書堂刊”을 확인하면서, 간행기가 목판으로 인쇄된 것이 아니라 필사된 것이라 약간의 아쉬움이 있긴 했지만 많이 기뻤다. 원래 간행기가 인쇄되어 있던 마지막 반 장이 손상되어 필사해둔 듯하다.
이상현 선생의 설명에 따르면, “보성지방의 사족이자 임진왜란시 의병장 가운데 한 사람인 晩圃 朴根孝( 1550-1607)”가 임란 극복을 위해 “1600년(선조 33) 죽천서당에서 간행된 서적은 교육서 위주였고 『소학집설』, 『고금역대표제십구사략통고』, 『삼략직해』, 『천자문』이 간행되었으며 『천자문』을 제외한 나머지는 현전본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리고 “박근효는 王子師傅를 지낸 竹川 朴光前( 1526-1597)의 아들로서 임진왜란 때 전라좌의병장 임계영 휘하의 참모장으로 군량 마련과 조달에 책임을 맡아 임무를 수행한 인물이기도 하다.”** 10여년도 훨씬 전에 우연히 내 손에 들어온 목판본 <소학집설> 한 권에 임진왜란을 극복하고 다시 유학 이념에 바탕을 둔 나라 건설에 보탬이 되고자 했던 한 지방 선비의 노력이 베어 있음에랴! 그 뜻을 헤아리며 400여년 된 <소학집설>을 펼쳐 한 구절 읽어본다.
“사마온공이 말하기를, 선공께서 군목판관 일을 하실 때, 손님이 오면 술을 대접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어떤 경우는 세 순배 돌고 어떤 경우는 다섯 순배 돌았지만 일곱 순배는 넘지 않았다. 술은 시장에서 사 왔다. 과일은 배, 밤, 대추, 감 등 네 가지에 그쳤고 안주는 포와 젓, 나물국에 지나지 않았다. 그릇은 사기와 칠기를 사용했다. 당시의 사대부는 모두 그렇게 했으므로 사람들이 서로 그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임이 자주 있어도 예절에 힘썼고, 차린 것은 적어도 인정은 두터웠다. (溫公曰 先公爲群牧判官 客至未賞不置酒 或三行 或五行 不過七行 酒沽於市 果止梨栗棗柿 肴止脯醯菜羹 器用瓷漆 當時士大夫皆然 人不相非也 會數而禮勤 物薄而情厚)”***
어린시절 고향동네에서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 중 자주 들었던 “차린 것은 없어도 정성을 봐서 많이 드시라”라는 말이 바로 ‘물박이정후物薄而情厚’를 뜻할 것이다. 소학이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필수 교재였으니, 제사상에 반드시 올리는 ‘조율이시棗栗梨柿’도 아무리 소박하더라도 ‘이율조시梨栗棗柿’는 대접한 이 사례에서 왔을지도 모르겠다. <소학집설> 등 서적 보급을 통해 임진왜란을 극복하고자 했던 박근효의 뜻은 완전히 이루어지지는 않았고, 세월이 지나 흐릿해지면서 그 300여년 후 나라는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일제강점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완전히 효과를 본 것일까? 아직도 여전히 극복 과정에 있는 것일까? 400여년 전 보성의 선비 박근효가 죽천서당에서 어렵게 판각해 펴낸 <소학집설>이 오늘을 살아가는 내게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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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으로 만나는 2024 호남한국학 강좌 《조선시대 호남지역 출판문화를 읽다》_ 4강, 이상현, “임란 극복의 원동력 가문 출판 – 보성의 출판문화,” https://www.youtube.com/watch?v=mhq9GTwdk0g&t=1650s
**이상현, 임진왜란 직후 寶城 朴根孝의 서적 간행 활동, 서지학연구 제84호, 2020.12
***小學執說卷之六 善行第六 外篇 六十四, 萬曆庚子春山 陽竹川書堂刊
++표지사진 - 대추, 2022.9.12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