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에 조경사업을 하시는 지용주 선생이 페북으로 흐뭇한 이야기 하나를 전했다. 전남 강진의 들판 도로변에 있는 작은 녹지공간 조성 과정에서, 설계상으로는 아름드리 멀구슬나무를 베어내고 대신 느티나무를 심는 것이었지만, 어느 나무애호가의 노력으로 그 멀구슬나무가 살아남았다는 소식이였다. 그 멀구슬나무 고목을 품고 있는 녹지공간은 ‘‘강진만 생태공원, 멀구슬나무 쉼터’가 되었고, 다산 정약용 선생이 1803년에 쓴 “농가의 늦봄(전가만춘)”중에서 뽑은 시를 예쁜 푯말에 써서 세워두고 있었다. 아마도 이 멀구슬나무가 살아남는데 이 시가 조금이라도 힘을 발휘했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비 갠 방죽에
서늘한 기운 몰려오고
멀구슬나무 꽃바람 멎고 나니
해가 처음 길어지네.
보리 이삭 밤사이 부쩍 자라서
들 언덕엔 초록빛이 무색해졌네.
강진생태공원 멀구슬나무쉼터 (좌) 멀구슬나무, (우) 정약용 선생 시 푯말, 2018.10.1 지용주선생 사진
당시 나는 단군신화의 단檀이 박달나무가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각종 문헌에서 단檀이라는 글자의 용례를 살펴보고 있었을 때였다. 마침 멀구슬나무를 전단栴檀이라고 한다는 것을 어디선가 읽어서, “문헌에 가끔 나오는 전단栴檀이 이 멀구슬나무라는 말이 있더군요. 남쪽에 가면 만나보고 싶은 나무예요”라고 댓글을 달았다. 이 댓글을 달고 나서, 다시 살펴보니 이는 잘못일 가능성이 큰 것이었다. 그래서, “아무래도 제 발언에 대해 책임을 져야겠기에 문헌을 조사했습니다. 일본에서는 멀구슬나무를 센단栴檀이라고 하는 게 맞지만, 고전이나 불교경전의 전단은 단향(Santalum album)이라고 하네요. 곡우 지나 늦봄에 부는 바람을 연화풍楝花風이라고 한다는데, 이 연화가 멀구슬나무 꽃이라고 하네요”라고 댓글을 수정했다.
이런 사정이 있어서 나는 직접 멀구슬나무를 만나기 전에, 멀구슬나무가 고전에서 어떻게 나오는지를 살펴보게 되었다. <중국식물지>와 <식물의 한자어원사전> 등에 의하면, 멀구슬나무(Melia azedarach L.)는 연楝, 또는 고련苦楝인데, 자화수紫花樹라고도 한다.
<본초강목>에서는 련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고련苦楝이다. 열매 이름은 금령자金鈴子이다. … 련楝의 잎은 물건을 익힐(練) 수 있어서 련楝이라고 했다. 그 씨앗은 작은 방울 같고 익으면 황색이 되므로 금령金鈴이라고 했는데, 이는 모양을 본뜬 것이다. … 나무 높이는 한 길이 넘으며, 잎은 회화나무처럼 빽빽한데 더 크다. 3, 4월에 꽃이 피고 홍자색紅紫色이다. 향내가 뜰에 가득해지며 열매는 탄환 같은데 처음에 청색이다가 익으면 황색이 되며, 12월에 딴다. … 세시기歲時記에 ‘교룡蛟龍이 련楝을 두려워하므로 단오에 이 잎을 싸서 떡으로 만들어 강 가운데 던져서 굴원屈原에게 제사 지낸다’라고 했다.”* <본초강목>의 이 설명은 바로 멀구슬나무의 잎과 열매, 꽃을 묘사한 것이고, 음력 3, 4월에 꽃이 핀다고 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양력 5~6월에 핀다.
멀구슬나무 열매, 2018.12.9 진도
<동의보감 탕액편>에는 연실練實이 나오는데, “일명 금령자金鈴子이다. … … 나무 높이는 한 길이 넘으며, 잎은 회화나무처럼 빽빽한데 더 크다. 3, 4월에 꽃이 피고 홍자색紅紫色이다. 향내가 뜰에 가득해지며 열매는 탄환 같은데 처음에 청색이다가 익으면 황색이 되며, 12월에 열매를 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앞에서 소개한 <본초강목>의 설명과 일치하고 있어서 이 연실練實이 멀구슬나무 열매임을 알 수 있다. <동의보감>에서는 연실 앞에 당唐이라고 표기하고 있고, 바로 다음 연근練根을 설명한 부분에서는 “우리나라에는 오직 제주에만 있고 다른 곳에는 없다”***라고 한 점은 특기할 만 하다. 아마도 약재로서 연실은 1600년대 당시 주로 중국에서 수입해 썼으나, 멀구슬나무가 제주에 자라고 있음은 알려진 듯하다. 1800년대 초반의 <물명고>와 <광재물보>, <명물기략>에도 련楝과 고련苦楝은 한글 표기 없이 <동의보감>과 비슷한 설명으로 등장한다.
<전운옥편>에는 “楝련, 나무이름, 회화나무(槐) 비슷하다. 고련苦楝”으로 나오며, <자전석요>와 <한선문신옥편>에는 “楝련, 고련나무 련”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다가 재미있는 것은 일제강점기 중엽에 발간된 <한일선신옥편>에서는 “楝련, 단나무 련, 아후찌(アフチ)”라고 적고 있는 점이다. 일본어의 ‘アフチ’는 ‘오우치(おうち)라고도 하며, 바로 전단栴檀(せんだん)을 말한다. 즉, 일본에서는 멀구슬나무를 한자로 전단栴檀이라고 했는데 이 영향을 받은 듯하다. 이러한 일본 식물명의 영향은 1930년대 전반에 발간된 <선한약물학>에서도 고련자苦楝子를 “전단(センダン)의 子實이니라”로 설명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멀구슬나무 꽃, 2021.5.22 고창
그러므로 우리나라 고전에서도 련楝은 멀구슬나무를 뜻하는 글자로 사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멀구슬나무라는 이름은 <조선식물향명집>에 보이는데, 제주도 방언에서 채록한 것이라고 한다. 이를 반증하듯, 가람 이병기李秉岐(1891~1968)의 1924년 8월 3일자 일기에, "오늘 들은 제주 말"을 적은 것 중에 "먹귀실나무(苦練根)"****이 나온다. 정태현의 <조선삼림식물도설>에서도 우리말 이름으로 멀구슬나무와 구주목 2가지를 들고 있고, 한자명으로는 련楝, 고련苦楝 등을 나열하고 있다. 이제 강진의 “멀구슬나무 쉼터” 푯말에 일부 인용되었던 정약용의 시를 모두 감상해본다.
농가의 늦봄 -- 田家晩春/丁若鏞
雨歇陂池勒小涼 비 개인 방죽에 서늘한 기운 몰려오고
楝花風定日初長 멀구슬나무꽃 바람 멎고 나니 해가 처음 길어지네
麥芒一夜都抽了 보리이삭 밤 사이에 부쩍 자라서
減却平原草綠光 들 언덕엔 초록빛이 무색해졌네
泥水漪紋漾碧靴 괸 물에 잔물결 푸른 산에 아롱지고
�槹閒臥井邊莎 두레박 한가하게 샘가에 누워있네
멀구슬나무 잎과 열매, 2018.11.10 제주도
멀구슬나무는 낙엽교목으로 5~6월에는 자주색 꽃이 아름답고, 겨울이 되어 잎이 지면 나무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황갈색 열매가 인상적이다. 나는 고대하던 멀구슬나무를 2018년 11월 제주도 답사에서 처음으로 만날 수 있었다. 회화나무 잎 처럼 잎은 우상복엽이었다. 금령자金鈴子라 불리는 열매도 자세히 관찰했다. 그 후 해남, 진도, 영광 등지에서 멀구슬나무들을 만날 수 있었다. 겨울 모습도 한결같이 멋있었는데, 5월에 꽃이 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2018.10.6 처음 쓰고 2021년 보완. 전가만춘은 송재소 번역 활용)
* 楝, 苦楝, … 實名金鈴子 … 楝葉可以練物 故謂之楝 其子如小鈴 熟則黃色 名金鈴 象形也 … 木高丈餘 葉密如槐而長 三四月開花 紅紫色 芬香滿庭 實如彈丸 生青熟黃 十二月採之 … 歲時記言 蛟龍畏楝 故端午以葉包粽 投江中祭屈原 – 본초강목
** [唐]練實 … 一名金鈴子 … 木高丈餘 葉密如槐而長 三四月開花 紅紫色 芬香滿庭 實如彈丸 生青熟黃 十二月採實 – 동의보감
*** 練根… 我國惟濟州有之他處無 – 동의보감
****이병기, 가람문선 - 일기초, 1966, 신구문화사
+표지사진 - 열매를 달고 있는 멀구슬나무, 2018.12.9 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