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화풍楝花風 (향토문화의사랑방 안동, 2023년 3/4월)
제주도나 남해안에 가면 멀구슬나무라고 불리는 어여쁜 이름을 가진 나무를 만날 수 있다. 이 나무는 낙엽교목으로 5~6월에 피는 자주색 꽃이 매우 아름답다고 한다. 겨울이 되어 잎이 지면 나무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황갈색 열매도 보기 좋은데, 나는 2018년 가을 제주도에서 멀구슬나무를 처음 만났다. 옛 글에 화신풍花信風이라는 표현이 가끔 보이는데, 그 뜻은 ‘꽃 소식을 알려주는 바람’, 간단히 말해 ‘꽃바람’이다. 이번 글은 화신풍과 멀구슬나무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본다.
우선 화신풍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서거정徐居正(1420~1488)의 시, “진달래(杜鵑花)를 얻어 심으려고 영천공자(永川公子)에게 부치다”를 감상해보자.
貴園曾見杜鵑花 일찍이 그대 정원의 진달래를 보았으니
紅艶繁開爛似霞 붉은 빛 곱게 만발하여 노을처럼 찬란했네
若使一枝分我種 한 가지 내게 나누어 심을 수 있게 해 주시면
春光應不背貧家 봄빛이 가난한 집도 저버리지 않으련만!
二十四番花信風 꽃 소식 전하는 스물네 번 바람 가운데
一番吹到杜鵑紅 첫 번째 바람이 진달래 꽃잎에 불어오네
梅花太冷杏花俗 매화는 너무 맑고 살구꽃은 속되니
此物正合花道中 이 꽃이 바로 꽃 길 중에 알맞도다!
이 화신풍은 소한小寒에서 곡우穀雨까지 여덟 절기節氣 사이에 5일마다 새로운 꽃이 피는 것을 알려 주는 봄바람으로, 절기마다 세가지 씩 총 스물네 가지 꽃바람이 있어서 ‘이십사번화신풍二十四番花信風’이라고 한다. 중국에서 풍속지인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 일문집록佚文輯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꽃 소식 바람. 무릇 스물네 번 꽃 소식 바람이 있다. 매화梅花에서 시작하여 연화楝花에서 마친다. 스물네 번 꽃소식 바람에는, 소한小寒의 세가지 소식으로 매화梅花, 산다山茶(동백), 수선水仙, 대한大寒의 세가지 소식으로 서향瑞香, 난화蘭花, 산반山礬*, (중략), 곡우穀雨의 세가지 소식으로 목단牡丹, 도미荼蘼*, 연화楝花가 있다.”**
즉, 화신풍이라는 표현은 이 <형초세시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스물네 가지 꽃바람의 시작이 매화와 동백이고. 마지막이 바로 멀구슬나무 꽃바람인 연화풍楝花風이다. 이러한 내용은 조선시대 문인들도 잘 알고 있어서, 연화풍楝花風을 곡우穀雨가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는 시절을 뜻하는 말로 널리 사용하고 있다. <중국식물지>와 <식물의 한자어원사전> 등에 의하면, 련楝은 멀구슬나무(Melia azedarach L.)이고. 연화楝花는 멀구슬나무꽃이다. (연楝에 대한 문헌은 ‘다산의 유배지 강진에서 사랑 받는 멀구슬나무’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본초강목>에서도 련楝이 3, 4월에 꽃이 핀다고 했는데, 이는 <형초세시기>에서 연화풍이 불어오는 곡우가 10여일 지난 시기와 얼추 일치하고 있다. 그런데 <형초세시기>가 지어진 형초荊楚 지방은 현재의 양쯔강(揚子江) 중류 지역에 있었다고 한다. 위도상으로 우리나라 제주도보다 훨씬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꽃 피는 시기가 우리나라보다 훨씬 빠를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매화는 남쪽 지방도 2월 초순의 입춘은 지나야 꽃이 피는데, <형초세시기>에서는 1월 초순인 소한이 지나 핀다고 했으므로 꽃이 피는 시기가 우리나라와는 한 달 이상 차이가 있다. 이제 멀구슬나무 꽃바람, 즉 연화풍楝花風이 나오는 다산의 ‘산행잡구山行雜謳’ 20수 중 일부를 감상해본다.
無計留春住 봄을 잡아둘 방법이 없으니
何如迎夏來 오는 여름을 맞이해야 하리,
也知僧院好 절간이 좋음을 알겠노라
山裏有亭臺 산 속엔 정자와 누대가 있네.
…
夾岸山茶樹 언덕배기 동백나무에는
猶殘睕晩紅 늦게 핀 붉은 꽃이 아직도 보이는데,
那將錦步障 어떻게 하면 비단장막으로
遮截楝花風 멀구슬나무 꽃바람을 막을 수 있을까.
이 시는 정약용이 강진에서 귀양살이 하던 1806년 음력 3월 18일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멀구슬나무 꽃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막아서 몇 송이 남은 동백꽃을 오래도록 즐기고 싶어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 시를 지을 당시 정약용 선생은 강진에서 멀구슬나무 꽃을 보았을까? 아니면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때를 가리키는 관용어로 연화풍이라는 시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200여년 전 일을 정확히 알 수는 없겠지만, 정약용은 이 시를 지었을 때에 멀구슬나무 꽃을 보지 는 못했을 가능성이 크므로 연화풍를 관용어로 사용했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왜냐하면, 시를 지은 날인 양력 5월 6일은 아직 우리나라에서 멀구슬나무 꽃이 피기에는 이른 시절이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강진에 멀구슬나무가 없었을 가능성도 있다. 왜냐하면 <동의보감 탕액편>에서 멀구슬나무 뿌리인 연근練根을 설명하면서 “우리나라에는 오직 제주에만 있고 다른 곳에는 없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당시에 멀구슬나무가 강진에서 자라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 경우에도 정약용은 이 나무가 연화풍이나 연실練實의 나무임을 몰랐을 가능성도 있다.
<한국의 나무>에 의하면, 멀구슬나무가 우리나라 남부지방 및 제주도에 야생화되어 자라지만 자생종인지 도입종인지 명확하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동의보감>의 기록과,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조선삼림식물도설>의 기록 및 1944년에 간행된 <향약집성방>도 멀구슬나무 열매’ 연실楝實이 ‘제주도에서 많이 생산된다’라고 기록한 점으로 보아, 이 나무가 우리나라에서 자리잡고 살아온 세월이 짧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연화풍이 멀구슬나무 꽃에 불어오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오랫동안 고대했지만, 꽃 필 때를 맞추어 남도나 제주도로 장거리 여행을 떠나기란 쉽지 않았다. 올 봄에 코로나로 울적한 마음을 달래러 모처럼 부안의 변산으로 가족여행 계획을 세웠는데, 그 날이 5월 22일이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올해는 꽃소식이 예년보다 빨라서 제주도와 남도에서 이미 멀구슬나무 꽃이 만개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부안 바로 아래 고창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멀구슬나무가 있다는 것을 알고서, 나는 고창을 경유하여 변산으로 가기로 했다. 5월 22일 아침에 여행길에 오르면서, 멀구슬나무 꽃을 보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조금씩 막히는 주말 도로를 4시간 가량 달려 고창군청에 도착하니, 다행스럽게도 200여년을 살았다는 멀구슬나무는 꽃이 한창이었다. 보랏빛이 오묘한 꽃을 이리 보고 저리 보면서 한참동안 감상하고서 우람한 밑둥 둘레에 설치된 나무의자에 앉았다. 바람에 떨어진 꽃을 하나 둘 모으니 은은한 향기가 나는데, 멀구슬나무 꽃향기에 취한 나는 쉽사리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2021년 2월 말에쓰고 5월 23일 수정, 향토문화의사랑방 안동, 2023년 3/4월, pp.66~71)
* 산반山礬은 학명이 Symplocos caudata Wall.로 노린재나무와 비슷하며, 도미荼蘼는 학명이 Rubus rosifolius var. coronarius (Sims) Focke로 산딸기(Rubus)속의 검은딸기와 비슷하지만 훨씬 꽃이 풍성하게 핀다고 한다.
** 花信風 凡二十四番花信風 始梅花 終楝花 … 二十四番花信風 小寒三信 梅花 山茶 水仙 大寒三信瑞香 蘭花 山礬 立春三信 迎春 櫻桃 望春 雨水三信 菜花 杏花 李花 驚蟄三信 桃花 棣棠 薔薇 春分三信 海棠 梨花 木蘭 清明三信 桐花 麥花 柳花 穀雨三信 牡丹 荼蘼 楝花 – 형초세시기
*** 練根… 我國惟濟州有之他處無 – 동의보감
+표지사진 - 멀구슬나무꽃, 2021.5.22 고창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