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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 풍경, 만년의 쓸쓸함이 배어있는 나무 유楡는?

느릅나무와 비술나무,『옛글의 나무를 찾아서』

by 경인

惟鬱鬱之憂毒兮 마음은 답답하고 괴롭네,

志坎壈而不違 불우한 처지를 당해도 뜻을 바꾸지 않으리.

身憔悴而考旦兮 몸은 새벽까지 잠 못 이루어 초췌하고

日黃昏而長悲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래 슬퍼하네.

閔空宇之孤子兮 텅 빈 방의 외로운 사람을 가련히 여기고

哀枯楊之冤鶵 메마른 사시나무 위의 어린 새를 슬퍼하네.

孤雌吟於高墉兮 외로운 암 새는 높은 성벽에서 짖고,

鳴鳩棲於桑榆 울던 비둘기는 뽕나무와 느릅나무에 깃드네.


<초사楚辭>에 실려있는 구탄九嘆 원사怨思의 한 구절로 권용호 번역* 인용이다. ‘구탄九嘆’ 편은 전한 시대 유향劉向(기원전79~기원전8)이 지은 것으로, 그가 황제의 명으로 <초사>를 교열할 때 굴원의 절개를 추념하기 위해 지어서 마지막에 추가한 것이라고 한다. 특히 원사怨思는 모함을 받아 쫓겨 난 굴원의 한을 읊은 것이라, 시의 분위기가 비장하다. 시에서 슬피 울던 비둘기가 깃드는 나무가 바로 상유桑榆인데, 이를 뽕나무와 느릅나무라고 번역했다.


느릅나무 (좌) 수형, 2021.1.9 의성, (우) 꽃차례, 2021.4.10 오대산


이 초사의 구절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고전에서 상유桑榆는 해질녘을 가리킨다. <태평어람太平御覽>은 <회남자淮南子>를 인용하여 “해가 서쪽으로 질 때 햇빛이 나무 끝에 있는데, 이를 상유桑楡라고 한다”**라고 기술하기도 했다. 또한 상유는 어떤 일의 마지막 단계, 인생의 만년, 노년을 뜻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고전에서 상유일박桑楡日薄은 삶을 마감할 때가 가까워진 노년을 비유한다.


느릅나무 (좌) 미성숙 열매, 2020.4.18 남한산성, (우) 성숙한 열매와 잎, 2020.5.16 남한산성


이 유楡는 초사 뿐 아니라 시경 등 여러 고전에 자주 나오는데, 고전 번역가들은 흔히 느릅나무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식물지>나 <초사식물도감>, <시경식물도감> 등을 살펴보면 유榆, 즉 유수榆樹를 비술나무(Ulmus pumila L.)로 보고 있다. 아울러 분枌이라는 글자도 비술나무로 해설한다. <식물의 한자어원사전>도 유榆를 비술나무로 설명한다. 즉, 식물분류에서 느릅나무과를 중국, 일본, 우리나라 모두 한자로는 공히 유과楡科로 표기하는데, 이 유楡를 우리나라에서는 ‘느릅나무 유’로 읽지만 중국과 일본에서는 비술나무로 해석하는 것이다.


비술나무 (좌) 수형, 2020.5.10 서울, (우) 꽃차례, 2021.3.7 성남


<한국의나무>에 의하면, 우리나라에는 느릅나무속(Ulmus)의 나무로 느릅나무(Ulmus davidiana Planch. var. japonica (Rehd.) Nakai), 비술나무(Ulmus pumila L.), 왕느릅나무(Ulmus macrocarpa Hance), 참느릅나무(Ulmus parvifolia Jacq.), 난티나무(Ulmus laciniata [Trautv.] Mayr) 등이 자생하고 있다. 사실 이 Ulmus 속의 나무 중에서도 느릅나무와 비술나무는 상당히 비슷하여 구분하기 쉽지 않은 나무이다. <한국의 나무>를 참고해보면 비술나무가 느릅나무보다 더 대형으로 자란다. 잎은 비술나무가 2~5cm로 4~12cm인 느릅나무에 비해 작으나, 열매는 비술나무가 도란상 원형으로 도란상 타원형의 느릅나무보다 조금 크다. 둘 다 이른 봄에 잎이 나기 전에 꽃은 핀다.


비술나무 (좌) 미성숙 열매, 2020.3.28 성남, (우) 유전으로 불리는 성숙한 열매, 2017.4.30 성남


그러므로 조선시대 문인들이 두 나무를 정확히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정황은 정약용의 <아언각비>를 봐도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정약용은 시무나무(Hemiptelea davidii Planch), 왕느릅나무, 비술나무, 참느릅나무 등을 유楡 종류로 설명하고 있다. 일부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느릅나무(楡)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첫째는 자유(剌楡, 시무나무)이다. 이아爾雅에서 추藲라고 했다. 당풍唐風의 “산에는 시무나무(樞)가 있네”가 이것이다. 둘째는 고유(姑楡, 왕느릅나무)이다. 이아에서 무고無姑라고 했다. 그 열매가 무이蕪荑이다. 셋째는 백유(白楡, 비술나무)이다. 이아에서는 백분(白枌)이라고 했다. 진풍陳風에서 일컬은 “동문의 비술나무(東門之枌)”가 이것이다. … 우리나라 민간에서, 백유白楡는 들에서 자라고 [방언으로 ‘늘읍’이라고 한다], 시무나무(剌楡)를 가정에 심는다 [방언으로 ‘늣희’라고 한다].”*** <아언각비>에서 정약용은 비술나무인 백유白楡를 ‘늘읍’이라고 했고, 별도의 느릅나무가 나오지 않으므로 비술나무와 느릅나무를 구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자유剌楡를 ‘늣희’ 즉, 느티나무(Zelkova serrata [Thunb.] Makino)로 본 것은 잘못 이해한 듯하다. 느티나무는 줄기에 가시(剌)가 없기 때문이다.


유楡는 <훈몽자회>에서 “느릅나모 유”로 훈을 단 후. <자전석요>, <신옥편>, <한일선신옥편> 등에서도 느릅나무로 훈을 달았고, 현대의 <한한대자전>까지 한결같이 느릅나무로 훈을 달았다. 분枌도 <훈몽자회>에서 느릅나무로 훈을 단 후, <한한대자전>까지 죽 느릅나무로 훈을 달고 있다. 즉, 느릅나무속의 나무들이 우리나라에 자생하고 있어서 혼동이 없었던 듯하다. 하지만 식물학자들이 느릅나무 속의 나무들을 분류하여 식물명을 부여할 때에는 조금의 혼선이 있었던 듯하다.


왕느릅나무 (좌) 수형, 2019.7.6 정선, (우) 잎, 2019.7.7 정선


우리나라 식물분류 연구서로 1937년 발간된 <조선식물향명집>을 보면, Ulmus macrocarpa Hance를 ‘느릅나무’로, Ulmus japonica Sargent 는 ‘떡느릅나무’로 적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U. macrocarpa Hance는 현재 ‘왕느릅나무’로 부르며, Ulmus japonica Sargent는 Ulmus davidiana var. japonica (Rehder) Nakai의 이명으로 현재 ‘느릅나무’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Ulmus manshurica Nakai에 ‘비술나무’라는 이름을 부여했는데, 이는 현재도 비술나무 부르는 Ulmus pumila L.의 이명이다.


1943년에 발간된 정태현의 <조선삼림식물도설>에서도 흥미로운 기록을 볼 수 있다. 느릅나무에 해당하는 ‘Ulmus japonica Sargent’의 조선명으로 경기도에서 ‘떡느릅나무’로 부르는데 ‘느릅나무’로 통한다고 기록한 점이다. 그리고, Ulmus macrocarpa Hance의 조선명으로 ‘왕느릅’를 적고, 북조선에서는 ‘느릅나무’로 불린다고 적었다. 또한, U. pumila L.에 대해서도 조선명으로 함경북도에서 비술나무로 불리지만 평안북도에서는 느릅나무로 부른다고 했다. 이러한 문헌들을 보면,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많이 쓰인 ‘느릅나무’라는 이름을 어느 종에 부여할 지에 대한 식물학자들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또한, 현대 종명이 규정되기 전까지는 느릅나무라는 이름은 비술나무와 왕느릅나무를 포함한 일반명이었을 것이다.


참느릅나무, (좌) 꽃차례, 2017.9.3, (우) 미성숙 열매, 2020.10.25 성남


또한 유피楡皮는 <동의보감>에도 한글로 ‘느릅나모겁질’로 표기하고 있는 약재이다. 이 약재는 대소변을 원할하게 해 주는 용도로 쓰이며, 유백피楡白皮라고도 하는데, 느릅나무와 비술나무의 껍질을 통용한다고 한다. 전통시대에 통용되는 약재였으니, 굳이 느릅나무와 비술나무를 구분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민간에서는 비술나무를 느릅나무로 부르는 곳이 많다. 지난 3월 하순에 동강 여행을 가다가 정선의 한 마을에서 거대한 비술나무를 만나 감상했는데, 이곳에 사시는 주민도 느릅나무로 부르고 있었다.


비술나무 고목, 2021.3.20, 정선 - 이 마을에서는 느릅나무로 불리고 있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중국에서는 유榆를 비술나무로 보고 있고, 느릅나무는 춘유春榆라고 한다. 일본에서도 느릅나무를 “하루니레(春榆)”라고 한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여, 고전에서 유榆가 느릅나무 일반이나 약재로 쓰일 때에는 느릅나무로, 특정 한 종의 나무를 나타낼 때에는, 특히 중국 고전의 유榆는 비술나무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참고로, 비술나무 열매는 옛날 돈을 닮아서 유전楡錢이라고 한다. 이제 비술나무 유楡가 등장하는 <시경> 당풍唐風의 시 한 수를 감상하면서 글을 마친다.


산에는 시무나무 - 山有樞


山有樞 산에는 시무나무가 있고

濕有楡 들판엔 비술나무가 있네.

子有衣裳 그대에게 옷이 있어도

弗曳弗婁 걸치지 않고,

子有車馬 그대에게 수레와 말이 있어도

弗馳不驅 타지 않고 아끼다가,

宛其死矣 만약 그대 죽게 되면

他人是愉 남이 그걸 즐기리라.****


(2018.7.21 처음 쓴 글을 2021년 5월 개정함. )

<『옛글의 나무를 찾아서』, 이유출판, 2023, pp.179~186 초고>


*초사, 권용호 옮김, 글항아리, 2015

**日西垂 景在樹端 謂之桑楡 - 太平御覽

***楡有數種 一曰剌楡 爾雅謂之藲 唐風之山有樞是也 二曰姑楡 爾雅謂之無姑 其實卽蕪荑 三曰白楡 爾雅謂之白枌 陳風稱東門之枌是也 … 吾東之俗 白楡野生 [方言云늘읍] 剌楡家種 [方言云늣희] - 雅言覺非

****이가원 번역 참조 (시경, 리가원.허경진 공찬, 청아출판사, 1999)

+표지사진 - 동강의 비술나무, 2021.3.20 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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