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배나무와 콩배나무, 『옛글의 나무를 찾아서』
<천자문>에 ‘존이감당 거이익영 (存以甘棠 去而益詠)’이라는 구절이 있다. 직역하면 ‘감당 아래에 머무니, 떠남에 더욱 읊는다’인데, 언뜻 그 뜻을 다 헤아릴 수는 없다. 이 구절을 이해하자면 역사 속의 고사 한 토막을 알아야 한다. 주周나라 소공召公이 섬서陝西 지방을 다스릴 때 감당나무 아래에서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백성들이 이것을 노래로 만들어 불렀으며, 이 노래가 <시경> 국풍國風 소남召南에 감당甘棠이라는 제목으로 채록되어 있다. 소召는 지금의 섬서陝西성 지역이라고 한다. 흔히 이 감당甘棠을 우리나라에서는 옥편이나 사전의 영향으로 팥배나무(Sorbus alnifolia [Siebold & Zucc.] K.Koch)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민중서림 <한한대자전>은 당棠을 팥배나무, 산앵도나무, 또는 산이스랏나무로 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나무들을 알아가던 초기에 팥배나무를 알게 되었는데, 이 나무가 감당甘棠이라는 말을 듣고 특히 더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다. 5월에 꽃이 화사하게 필 때나, 매끈한 회색 수피를 가진 곧고 훤칠하게 자라는 모습, 특히 팥 같이 생긴 작은 붉은 열매를 수없이 달고 있는 겨울의 팥배나무는 가히 일품이어서, 선정을 상징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듯 했다.
하지만, <시경식물도감>에는 감당을 중국명 두리杜梨 혹은 당리棠梨인 Pyrus betulifolia Bunge로 설명하고 있다. <중약대사전>에서도 당리棠梨를 Pyrus betulifolia Bunge라고 했고, 이명으로 두杜와 감당甘棠 등을 들고 있다. 그런데 Pyrus betulifolia Bunge는 우리나라에 자생하지 않으며, 국립수목원에서 발간한 <국가표준재배식물목록>에도 기재되어 있지 않은 것을 보면, 정원수로 재배하고 있지도 않은 듯하다. 이 감당은 <본초강목>에서 당리棠梨의 이명으로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당리棠梨. … <이아爾雅>에서 두杜, 감당甘棠이라고 했다. 붉은 것이 두杜이고 흰 것이 당棠이다. 혹자는 암나무를 두杜라고 하고 수나무를 당棠이라고 한다. 또 혹자는 맛이 텁텁한 것을 두杜라고 하고 단 것을 당棠이라고 한다. 두杜는 텁텁함(澀)을 뜻하고 당棠은 사탕(糖)을 뜻한다. 세가지 설이 모두 통하지만 마지막 설이 맞는 것 같다. … 당리棠梨는 야리(野梨, 야생 배)인데, 산과 숲 곳곳에 있다. 나무는 배와 비슷하지만 작고, 잎은 삽주(蒼朮) 잎 비슷하지만 둥근 것, 세 갈래 난 것도 있다. 잎 가에 모두 톱니가 있고 색은 자못 검푸른 흰 색이다. 2월에 흰 꽃이 피고 작은 멀구슬나무(楝) 열매 같은 열매를 맺는데 씨앗은 크며, 서리가 내린 후 먹을 수 있다. 배나무를 접붙이는 나무로 매우 좋다.”*
<본초강목>의 당리棠梨 잎 모양 설명을 보면 팥배나무 보다는 아그배나무(Malus sieboldii [Regel] Rehder)를 설명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아그배나무 잎이 일반적인 좁은 타원형인 것도 있고 3~5갈래 큰 결각이 지기도 하며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기 때문이다. 이 아그배나무의 중명은 삽엽해당三葉海棠으로, 감당과는 당棠자를 같이 쓰고 있다. 반면 팥배나무의 중명은 수유화추水榆花楸이다. 어쨌든, 이 <본초강목>의 설명을 통해 감당이 팥배나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중국에서 감당의 현대 명인 당리棠梨(Pyrus betulifolia Bunge)와 가까운 우리나라 나무가 무엇일까?
<한국의 나무>에서 배나무(Pyrus)속의 나무를 찾아보면 산돌배나무(Pyrus ussuriensis Maxim.)와 콩배나무(Pyrus calleryana Decne)가 나온다. 산돌배나무의 현대 중명은 추자리秋子梨, 산리山梨, 야리野梨이고, 콩배나무의 중명은 두리豆梨, 두리杜梨 등으로, 이름에서도 감당 즉 당리棠梨와 유사성을 엿볼 수 있다. <중국식물지>에서 당리棠梨의 설명을 보면, 8~9월에 익는 열매 크기가 5~10mm이고 담색 반점이 있다고 했는데, 이것으로 보면 당리는 열매 크기가 2~6cm에 달하는 산돌배나무보다는 1cm가량인 콩배나무와 더 근사하다고 하겠다. 이제 천자문 등 고전에서 감당을 만나면 팥배나무 보다는 콩배나무를 떠올리는 것이 좋겠다.
이밖에 <시경>에는 당풍唐風 체두杕杜 편에 두杜, 진풍秦風 종남終南편에 당棠이 나오는데, 모두 Pyrus betulifolia Bunge(杜梨, 棠梨)를 말한다. 문헌을 검토해보면 우리나라에서도 두杜와 당棠을 감당과 같은 나무로 인식하고, ‘아가외’, ‘아가위’ 혹은 ‘아가배’로 불러 왔다. 즉, <훈몽자회>에서 당棠을 ‘아가외당’이라고 했고, <자전석요>에서 당棠을 “두杜이다. 아가배 당”, 두杜를 “감당甘棠이다. 아가배 두”라고 했고, <한선문신옥편>에서도 당棠을 ‘아가위 당’, 두杜를 “아가배 두, 과일 이름으로 감당甘棠이다”라고 했다.
유희의 <물명고>와 <광재물보>에서는 산사山樝를 ‘아가외’라고 설명했는데, 이우철의 <한국식물명의 유래>를 보면 아가위나무는 “산사나무, 털야광나무와 야광나무의 이명”으로, 아그배나무는 “산사나무(함북 방언)와 야광나무(강원)의 이명으로 사용”했다고 했으므로, 아가외/아가위/아가배는 옛날 우리나라에서 산사나무나 야광나무, 아그배나무 류를 지칭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나무들은 모두 장미과에 속하고 봄에 잎과 함께 혹은 잎이 난 후 나무 가득히 흰 꽃이 피는 키 큰 나무들이다. 팥배나무나 콩배나무도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에서 자라지 않는 나무인 감당甘棠에 대해 혼동을 일으킨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좋은 정치란 무엇일까? 신분제가 있던 왕조시대와,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좋은 정치는 다른 모습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에 입각하여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고 갑오경장을 통해 노비 제도가 혁파될 때까지 신분제가 제도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아무리 국왕이 덕치德治를 배풀고, 신하들이 선정을 배푼다 해도, 신분의 족쇄에 걸린 백성은 구렁텅이를 벗어날 길이 없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현대 민주주의 사회는 누구나 자유와 인권을 누릴 수 있고, 법 앞에 평등하며 법에 어긋나는 행위를 했을 때만 개인의 자유를 구속 받게 되므로, 오로지 위정자들의 덕치나 선정을 고대했던 왕조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이 좋은 사회라고 할 수 있겠다. 아무튼 민주주의 사회에서 위정자들은 권력을 국민들로부터 위임받은 것임을 명심하고, 주권자 개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면서 공공선을 위해서만 권력을 행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왕조시대에도 왕의 덕치에 의해 좋은 정치가 행해지면 백성들 삶은 조금이라도 더 풍요로워졌을 것이다. 춘추시대의 대표적인 선정의 흔적이 <시경>에 ‘감당甘棠’이라는 제목으로 채록되었고, 또 <천자문>에 '존이감당 거이익영 (存以甘棠 去而益詠)'으로 인용되면서 감당나무와 소백召伯은 고전에서 좋은 정치의 상징이 되었다. 이제 시대의 흐름에 맞는 훌륭한 정치를 기원하며, 콩배나무를 떠올리면서 ‘감당甘棠’ 시 전편을 감상해보자.
蔽芾甘棠 무성한 저 감당甘棠 나무
勿翦勿伐 베지도 말고 치지도 말라.
召伯所茇 소백님이 머무신 곳이라네.
蔽芾甘棠 무성한 저 감당甘棠 나무
勿翦勿敗 베지도 말고 꺽지도 말라.
召伯所憩 소백님이 쉬셨던 곳이라네.
蔽芾甘棠 무성한 저 감당甘棠 나무
勿翦勿拜 베지도 말고 휘지도 말라.
召伯所說 소백님이 머무셨던 곳이라네.
우리나라에서 팥배나무와 산돌배나무는 전국의 산지에서 만날 수 있지만, 콩배나무는 경기도 이남의 낮은 산지에 드물게 분포한다고 한다. 나는 2018년 5월 오산의 물향기수목원에서 콩배나무 꽃을 처음 보면서 감당을 떠올렸다. 그 해 8월 충청북도 옥천의 둔주봉을 오르는 길에 콩배나무를 운 좋게도 만났다. 벌써 잎은 일부 지기 시작했는데, 담색 반점이 있는 작은 열매들이 매달려 익어가고 있었다. 바쁜 일정으로 그 콩배나무 아래에서 선정을 떠올릴 겨를이 없었지만, 다음에 잘 자란 콩배나무를 만나면 그 아래에서 잠시라도 쉬면서 '존이감당 거이익영'을 읇조리며 현대의 좋은 정치를 기원해야겠다.
<이가원 번역 참조. 2018.12.24년 씀, 2021년 2월 보완>
<『옛글의 나무를 찾아서』, 이유출판, 2023, pp.17~24 초고>
* 棠梨. 時珍曰 爾雅云 杜 甘棠也 赤者杜 白者棠 或云牝曰杜 牡曰棠 或云 澀者杜 甘者棠杜者澀也 棠者糖也 三說俱通 末說近是 … 時珍曰 棠梨 野梨也 處處山林有之 樹似梨而小 葉似蒼朮葉 亦有團者 三叉者 葉邊皆有鋸齒 色頗黪白 二月開白花 結實如小楝子大 霜後可食 其樹接梨甚嘉 – 본초강목
+표지사진 - 팥배나무 열매, 2017.11.26 관악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