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
[원정] 밴프, 겨울 왕국을 느끼다 9
9~10일차 : 귀국
시간은 지나게 되어 있고, 무슨 일이든 끝은 있다. 전날 귀국을 위한 일정과 정리해야 할 사항 등을 공유했지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왠지 긴장된다. 혹시 공항에 늦게 도착하는 일이 없도록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새벽에 일어나니 몸이 천근만근이다. 눈도 제대로 안 떠질 만큼 피곤하다. 꾸역꾸역 아침을 먹고 일정과 준비 사항을 다시 한번 체크한다.
벌써 8박이나 했던 숙소를 떠나려니 아쉬움도 있고 홀가분함도 있다. 뭘 그렇게 구석구석 짐을 배치해 놨는지 짐 싸는데 이만저만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등반구에서 세면도구까지 남은 식량에서 기념품까지 빠짐없이 챙기려니 짐이 출국할 때보다 더 많은 기분이다. 불필요한 것들을 과감히 버렸는데도 말이다.
짐 정리를 하면서 느낀 거지만 우리의 식량 준비-실행-마무리는 정말 최고였다. 냉장고를 탈탈 털어 해치웠고 남은 술은 한 방울도 없이 먹어 치웠다. 보관에 문제없는 식량만 아주 일부 분담하니 정말 완벽한 운영에 감탄이 절로 났다.
17명의 대식구는 다양한 연령이 포함되어 있음에도 벌써 8일간의 동행으로 익숙해져 있어서인지 참으로 일사불란하다. 짐 정리를 마치고 거실에서 마지막 기념사진을 찍는데 기분이 묘했다. 대가족이 길고 긴 명절을 신나게 보내고 헤어지는 기분이랄까.
전날 각자의 소감을 담은 회기를 우리의 원정을 만들어 주신 우리의 키르기스스탄 형님께 전달해 드렸다.
공항 가는 마지막 차량 운전은 차질이 없어야 했다. 피곤함이나 방심으로 인한 어떤 사고도 용납되지 않기에.
공항 근처에서 마지막 주유를 하고 공항에 도착. 차량 반납까지 하고 짐을 부치고 나니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동시에 온몸에 힘이 빠지고 졸음이 급격히 밀려왔다. 간신히 보안 검색을 마치고 비행기를 기다리는데 눈이 절로 감긴다.
예상대로 비행기 안에서는 끝없는 잠.. 잠.. 잠..
인천공항에 도착해 인사를 하고 헤어지고 나서야 이제야 꿈같던 시간들이 끝났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한편, 모든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생각도 든다. 또 한편, 이런 좋은 멤버들과 이런 좋은 경험을 또 언제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까지도 든다.
최고참 형님은 80이 넘은 연세에도 용기 있게 원정에 나서 많은 이들이 함께할 용기를 이끌어 주셨고,
허리가 안 좋은 상태로 휠체어를 타고 공항에 나타나셨던 형님은 손녀 손자와 함께 오셔서 화목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시고 훨씬 밝은 모습으로 돌아오셨고,
미국 시민 형님은 그 높은 연세에도 불구 후배들을 격의 없이 대하면서 동시에 위의 형님을 잘 모시며 진정한 세대 통합을 이루는 역할을 해주셨고,
규율반장 형님은 산에서는 쉘터와 라면으로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주시고 숙소에서는 혹여나 빠진 게 없나 놓친 게 없나 챙겨 주시고 또 직접 청소까지 맡아 주셨고,
자동차 전문가 형님은 화려한 운전솜씨 못지않은 요리 솜씨를 보여주시고 해박한 지식으로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 역할을 해주시어 많은 대원들에게 이로움을 주셨고,
우리의 키르기스스탄 형님은 전폭적인 지원으로 이번 원정의 기틀을 만들어 주신 데다 사고처리까지 가장 핵심적인 일들을 해결해 주셨고,
요가로 다져진 날렵한 몸을 자랑하시는 누님은 산행도 잘하시고 숙소 내 살림살이를 진두지휘하시며 원정에 적극 참여해 주셨고,
언제나 형수님과 듬직하게 원정에 동반을 해주시는 형님은 대원들 분위기를 이끌며 산과 숙소에서 중심을 잡아 주셨고,
또 그 형수님은 이번 원정의 일정부터 식량, 대상지 연구까지 철저하게 준비해 주신 데다 숙소에 온 날부터 나갈 때까지 완벽하게 식량관리를 해주셨고,
멀리 정읍에서 오셔서 이번 원정에 참여하신 회계 담당 누님은 감기 몸살 기운을 극복하며 특유의 겸손한 유머로 분위기를 살려주시고 산행도 숙소 내 요리와 살림, 그리고 차 한 잔의 여유까지 조용히 만끽하셨고,
조용한 등반대장은 딸과 함께 아름다운 부녀의 모습을 보여주며 산행 운행도 운전도 수고가 많았고,
또 한편 그 휠체어 할아버지를 챙기러 온 의료 담당 손녀는 낯선 사람들 틈에서 묵묵히 일정을 소화하며 여기저기 정보 수집과 함께 동생까지 챙기는 신공을 발휘했고,
원정대 단골부부의 딸은 부모의 온화한 성격을 빼닮아 원정대 고정 멤버인 양 자연스럽게 적응하며 동생들뿐 아니라 부모는 물론 다른 대원들까지 잘 챙기며 원정대의 여행사 및 보모 역할을 도맡았고,
그 휠체어 할아버지와 숙식을 같이 하며 보호자 역할을 했던 손자는 원정대의 분위기 메이커가 되어 활기 있는 원정을 만들어 주었고,
우리 원정대의 마스코트인 막내는 조용한 등반대장 아빠를 대화로 이끄는 말솜씨와 모두가 인정하는 어른스러움으로 대원들을 놀라게 한 데다 멋진 연주 실력까지 갖춰 행복한 원정대를 만들어 줬다.
그리고, 멀대 부자는 진정 멀대처럼 멀뚱멀뚱 눈만 껌뻑이며 이런 광경을 다 지켜보고 신기해하기도 부러워하기도 재밌어하기도 하며 이번 원정을 즐겼다.
서로를 알게 돼서 그리고 함께 해서 모두 고맙고 감사한 대원들이다. 대원 하나하나 멋진 원정을 위해 기여하지 않은 이가 없으니 이 또한 감사할 일이다. 할아버지부터 이모 삼촌 누나 형 아들 딸 그리고 손자 손녀까지 오래도록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길 바란다.
그리고 또 생각하자니, 다음엔 또 어디로 갈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슬슬 원정 중독에라도 빠지게 된 것 같다. 나는 우연히 이 세상에 왔고, 여기까지 살아왔으니,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언제든 이 세상을 떠날 때, 후회는 좀 덜하겠지.
이번 원정으로 죽어도 후회 없는 적어도 몇 년은 확보한 셈이다. 끝. (악필, 2025.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