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말 많은 산행 - 쿠산에디션

(20250315 용봉산-덕숭산)

by 악필

난 또 말이 많았다. 대개 산에서는 말없이 조용한 산행을 하며 자연을 음미하고 몸의 작은 반응들을 느끼며 묵묵히 그렇게 걸어 오르고 내려와야 하거늘 나는 또 그렇게 말이 많았다. 과거 종종 나의 말 많음에 스스로를 경멸하며 반성하던 게 그리 오래전 일은 아닌 거 같은데 아무래도 나는 더 이상 아니 태생부터 조용한 인간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말의 시작은 산행 참여를 결정하면서부터라고 봐야겠다. 보통 매달 셋째 주 토요일은 산악회 산행이라 다른 일정을 잡을 수가 없는데, 마침 다음 주로 미뤄져 시간이 있었고 그 시간을 활용해 모친을 보러 가기로 되어 있었더랬다. 근데 친구들이 잡은 산행 대상지가 마침 모친을 보러 갈 때마다 보는 용봉산이라니 묘한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오전에 진행하는 일정이면 참여하기로 했다. 차량은 어떻고 주차장은 어떻고 코스는 어떻다는 시끄러운 말들이 오가다가 결국엔 당일날이 되었다.

원래 4명이서 가기로 계획한 것이 3명으로 정리되면서 차량배치에 또 말이 많았다. 결국엔 각자가 용봉산자연휴양림에서 만나는 걸로 정리.


단출하게 세 명이서 만나 주차를 하고 산행준비를 했다.(주차는 공짜. 일찍 만나니 자리도 다행히 충분했다.) 나 말고 여자사람친구 한 명, 남자사람 친구 한 명.

그 여자사람친구는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게 만든 - 어제까지도 이 글이 완성되기를 기다린다며 압박하던 - 상당히 집요하면서도 자기가 요구하는 바를 거부할 수 없게 만드는 신기한 능력을 지닌 인물이다. 나도 마침 개점휴업 중인 브런치에 흔적도 남겨야겠고 산행후기를 강조했던 나와의 약속을 이행도 할 겸 해서 잠에서 깨자마자 후딱 숙제를 해치우기로 한다.

한편 또 다른 친구 남자사람은 ‘말’하면 전혀 빼놓을 수도 뒤처질 수도 없는 말의 달인이다. 극한의 표출형 인간이라고 봐도 될 만큼 자신을 표현하는데 능하고 - 내가 전혀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의 - 외향적 성격의 친구다. 목소리마저 좋아 나랑은 정확히 대척점에 있는 친구라고 봐야겠다. 그래서 내가 두려워하는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하기를 아주 손쉽게 해결하는, 나로서는 참 다행스런 인물이기도 하다.

여기 먼 곳, 나의 고향 근처까지 두 친구들이 산행을 하겠다고 온 것이다.


주차장에서 용봉산에 오르는 길은 지난 추석날 차례 지내기 전에 가봤던 코스라 무리 없이 안내를 할 수 있었다. 날은 좀 흐릿했으나 춘삼월의 봄기운을 느끼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시작하면서 좀 쌀쌀함이 있다 보니 옷을 어떻게 입고 가야 할지 장갑을 끼는 게 나을지, 가다 보면 열이 날 거니 괜찮을 거라는 등의 수다스러운 말이 오갔다.


용봉산은 의외로 암릉과 기암괴석이 많은 바위산이다. 시작부터 급경사와 바윗길이 우리를 맞는다. 중간에 - 최영장군이 뜬금없이 여기까지 와서 왜 활을 쐈는지는 모르지만 - 활터가 있고 암릉의 멋진 경관도 구경할 수 있다. 산행 시작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저 앞에 내포신도시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가성비 좋은 코스다.

정상 부근 정자에 이르니 몸에 열도 나고 땀도 나서 이 3월의 바람과 기온이 아주 산행하기 좋았다.

어렵지 않게 정상에 도착. 두 친구들도 상당한 산행 경험자라 전혀 무리가 없었다.


용봉산 정상부터는 능선길이라 부담이 덜하다. 동시에 암릉을 오르고 내려야 하는 곳이어서 다소 집중이 필요하다. 물론 그만한 경관이 우리를 맞이하니 우리 셋은 행복했고 즐거웠다. 사실 여기까지는 각자 뭔 말들을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저 특이할 것도 없는 얘기들 뿐이었으리라. 암릉 코스는, 산행 경관은 우리를 압도하고 현재에 집중하게 만들었으니 말은 그저 현재에 관한 것이지 않았을까.


악귀봉을 지나고 용바위를 지나고 둔리저수지 쪽으로 하산을 하면서 우리는 여유가 생겼다. 저수지가 있는 마을에 가까워지면서 들었던 남자사람친구의 머리카락에 대한 슬픈 사연도 기억나고 여자사람친구의 슬슬 들어오는 말 걸기 기술도 얼핏 기억이 난다. 그렇다고 내가 여기서 대뜸 그 기술에 넘어가 폭풍 수다를 떨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 말없이 묵직한 나의 모습을 그리며 자제하고 자제하고자 했을 것이다. 쿨럭.


고도의 기술을 지닌 여자사람친구의 능력은 나 정도의 어설픈 가식은 왼손 새끼손가락으로도 가볍게 해결할 만큼의 파괴력을 지녔다. 고향 근처라서 방어벽이 약해진 것일지도 모르고 내가 원래 말하기를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모친 얘기부터였는지 나의 어린 시절 얘기부터였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빗장이 풀렸고 말 많은 산행의 시작 - 내가 의식한 시작 - 이 된 것으로 기억한다. 어쩌면 여자사람친구의 용봉산에서의 빌드업이 표면에 드러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는 나는 충청도의 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났고 변방의 변방에서 이런 일 저런 일 겪으며 살아왔다는 정도면 그 대화 분위기에서는 충분할 수도 있었다. 근데 이상하게 말려들어 고등학교 시절 얘기를 하게 되었고 대학에 들어온 얘기도 하게 되었다.

여기선 이상하게 그 말 잘하는 남자사람친구는 말도 없이 조용히 듣고만 있었고, 여자사람친구의 추임새는 산행을 하면서도 말을 멈추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개차반의 대학시절을 얘기하는데 들어오는 공감과 탄식, 안타까움을 표하는 여자사람친구의 다음 얘기 유도법은 내 속을 탈탈 털지 않고는 못 버티게 만들었다.

그렇다. 나의 20대는 엉망진창이었고 후회투성이었다. 그래도 살았고 살아서 지금까지 왔다. 가진 것 없었지만 잃을 것도 없었지만 그나마 가진 재산인 젊은 날까지 소모해 가며 나는 그렇게 살아왔구나. 그래도 난 이 덕숭산에 다가가며 두 친구들에게 할 이야기는 남겼던 모양이다. 어쨌든 난 말이 많았다. 거 참 말 많네.


둔내저수지 근처의 마을들을 보며 두런두런 말을 하고 딸기 재배하시는 아저씨가 지나가다 주신 딸기를 받아먹으며 우린 그렇게 덕숭산 초입에 도착했다.

나의 수다스러움에 창피하기도 하고 경멸스럽기도 해서 이제 그만 조용히 길을 찾으며 덕숭산을 시작했다.

덕숭산은 조용한 동네 뒷동산 같은 분위기였다. 과거 시골집에 살 때 아버지랑 나무하던 그런 산 말이다. 구름은 조금씩 걷히고 평화로움이 가득한 느낌에 마음도 자연스레 이완되었다. 적당한 바위에 앉아 간식을 까먹으며 쉬는데, 여자사람친구의 기술이 또다시 훅 들어온다. ‘그래서 다음엔 어떻게 되었는데?’


아, 내 얘길 다 듣고 있었구나, 이해하고 질문까지 하고 있구나. 정말 재미있어서 그러는 걸까, 아님 내가 관심 없어하는 것에 실망할까 봐 형식적으로 단순 터치해 주는 걸까.


결국 난 또 넘어가 우여곡절 많았던 취업 얘기, 천하제일 숙맥이 아내를 만나 결혼한 얘기, 그와 부수적인 여러 소소한 얘기까지 다 털어내고야 말았다. 덕숭산 정상에 올랐을 때쯤에는 내 속엔 도대체 뭐가 들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 만큼 나는 가볍고도 가벼운 존재가 되어 있었다. 이런.

나의 말과 수다로 도대체 내게 남은 건 뭔가. 이미 나가버린 말이고 친구들 귀에 들어가 버린 말이니 후회해 본들 소용없다.

대체 말로써 말을 막을 만한 능력을 충분히 지닌 말 잘하는 남자사람친구는 왜 가만히 있었던 것이고, 그 수많은 수다 속을 헤매며 남얘기를 지루하게 들었을 여자사람친구는 왜 말을 끊는 기술이 아닌 자꾸 말하게 하는 기술을 써왔던 걸까. 둘이 짰나?


난 수덕사로 내려가면서 내가 왜 이렇게 가벼운 놈이 된 걸까, 아니 난 원래 이렇게 가벼웠던 걸까, 하는 생각에 멍해져 있었다. 부처상을 보고 묵언수행이라도 시도해야 할까 생각도 했다. 사실 이미 한 3일 치의 말 거리를 다 털어낸 거나 다름없으니 입이 저절로 다물어졌다. 아 기 빨려.


수덕사. 춘삼월에 핀 수덕사 대웅전 앞 매화를 보니 마음이 개운하게 정화되는 것 같다. 어쩌면 내가 다 털려서, 내 속에 남았던 가식과 겉치레가 다 발가벗겨져서, 그럼에도 그런 내가 아직 존재해도 되니 힘내라는 부처님의 메시지 같기도 해서, 그 매화꽃은 아직도 뇌리에 남는다.


이렇게 말 많은 산행은 끝났고, 수덕사 밑의 맛 좋은 한정식집을 찾아 하루의 산행을 정리했다. 마침 두 친구가 열띤 대화와 말이 오가는 것을 보니 이제야 일상으로 돌아온 느낌이다. 난 별로 할 말이 없고. 그런 거 보면 내가 두 사람한테, 아니 두 산(용봉산-덕숭산)한테 잠시 홀렸었나 보다. 끝. (악필, 202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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