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용문에 홀리다

- 깍두기 관찰자 시점

by 악필

혹시나 했는데 쓰는 이가 없어, 이 핑계로 또 쓴다. 3개월 가까이 지난 산행이지만 매우 기억에 남을 만큼 인상적이어서 별 어려운 점은 없다. 오히려 푹 익은 김치처럼 더욱 깊은 맛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난 사실 ‘깍두기’라고 봐야 한다. 친구들이 가는 산행에 초대받아 요리조리 고심하는 척, 그러나 가고 싶어 설레며 기다렸다가 산행에 참석한다. 지난주까지 따뜻한 봄날의 날씨를 보였으니 오늘은 더욱 기대가 된다. 쿠산 친구들과의 산행은 이제 설익거나 낯섦을 넘어 내 산과 함께 내 인생 속에 들어와 버렸다. 뭐든 쉽게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격을 가진 이는 또, 한 번 받아들인 삶을 쉽게 버리거나 떠나지 못한다. 성급한 일반화인가, 하여튼 나는 비교적 그런 편이다. 그러나 오늘은 아무래도 깍두기가 맞는 거 같다.


차를 몰아 용문산 입구에 도착하니 먼저 온 친구들이 무리 지어 몸을 풀며 기다리고 있다. 아직은 이른 아침이고 높이 솟은 용문산 그늘 아래라 그런지 쌀쌀한 느낌까지 든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사진 한 장. 산행을 시작한다.


모두 여섯이 오르지만 이들은 모두 산행에 대한 열정뿐 아니라 능력도 고루 갖춘 제대로 산꾼들이다. 이런 친구들이 지금 현재 나 말고 다섯이나 되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것도 나랑 나이도 비슷하니 남은 생에 든든한 노후 자산이 아닐 수 없다.


영화 ‘은행나무 침대’에 나왔다는 오래된 은행나무와 용문사를 돌아가니 본격적인 산행길에 접어든다. 과거 한 25년쯤 전에 왔던 기억이 얼핏 난다. 아마도 오늘 코스랑 비슷했던 것 같기도 하고. 하튼 조금은 쌀쌀한 기운을 계속 느끼며 초반 산행에 익숙해지기 위해 열심히 몸을 덥힌다. 흑갈색 혹은 짙은 고동빛의 목초 사이에 간혹 간혹 초록 혹은 연두의 이파리들이 보이는 것이 봄의 기운을 조금씩 느끼게 만든다. 아무리 내 손과 발을 괴롭히던 혹한이라도 오는 봄을 막지 못하고 있다. 산이 아무리 춥던 덥던, 상관없다. 아무리 그래봐라, 내가 산행을 멈추나. 하물며 얼음을 녹아내리게 하는 봄인데, 어찌 이 산행을 마다하리오.


친구들은 각자의 컨디션에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각자의 속에 담긴 궁금증에 따라 질문하고 답하고, 또 각자의 걱정거리 혹은 딴생각을 하며 멍하니 걷기만 하기도 한다. 산은 어쩌면 그 많은 인간의 천태만상을 한 곳에 모아 두기 적합하게 천태만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크게 보면 그저 비슷한 단순한 봉우리 같지만 어디 세상에 똑같은 산이 있던가. 그리고 그 하나의 산이라도 인간의 다양함에 장단 맞춰 주고도 남을 만큼 충분히 크고 충분히 또 소소하다. 그러니 우린 산을 고마워할지언정 맞춰주지 않는다고 불평할 수가 없다.


쓸데없는 공상에 빠졌다가 문득 보니 마당바위. 사진 찍고 간식 먹고 땀을 식힌다. 그다음부터는 경사가 좀 있다. 그늘에는 지난겨울 얼었던 얼음이 아직도 간간이 보인다.

나도 내 속도에 맞추려니 앞서서 쭉쭉 가는데 초보자들에겐 좀 부담스럽기도 하겠다. 친구들은 잘도 따라온다. 아침에 맑은 하늘을 보고 일기예보를 욕했는데, 어느새 예보대로 구름이 잔뜩 끼고 어두워지려고까지 한다. 급격사를 넘어 능선에 올라서니 갑자기 눈이 온다. 아니 진눈깨비라고 해야 하나? 하튼 10월 말 간간이 날리는 첫눈처럼 이게 진짜 눈인가, 할 정도의 눈이 내린다.

혹시나 모처럼 온 기분이 깨질까 봐 외쳐 본다. ‘야, 눈도 오고 좋구만?’


좀 쉬었다가 정상을 향해 능선길을 오른다. 경관이 드러나고 길도 재미있다. 무지 많은 인원의 앞팀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 거의 정상부근에 도착하니, 이건 완전히 함박눈이다. 전망대에 올라 먼 산 너머를 보니 한 겨울이다.

정상에서 사진 찍고 사람들이 모였다가 빠지는 틈을 타 정자에 자리를 잡으니 봄기운은 없어지고 완전 겨울이 되어 버렸다. 온 산이 하얗고 눈은 계속 내린다. 몸이 슬슬 추워지기도 한다.

또 모처럼 온 기회를 걱정에 밀리고 싶지 않아 와인 한 병을 따고 친구들에 나눠 주며 한 마디 외쳐본다. ‘눈 오는데 와인 한 잔, 재밌지 않냐?!’ 다들 뒷일 걱정은 접어 두고 대답한다. ‘좋아!’ 어린이가 된 듯 모두 깔깔 댄다.

워낙 자신감 넘치는 50대가 자리를 차지하고 즐거워하고 있으니 주변에서 쉽게 시비를 걸거나 방해를 하질 않는다.


그렇게 먹고 마시고 배를 채우고 이제 그만 일어나고 싶어질 때쯤 다음 길을 재촉한다. 한 친구는 집에 일이 있어 왔던 길로 내려가고 나머지 다섯 친구들은 의도했던 길을 찾아 나선다.

이미 당황스러울 정도로 눈이 잔뜩 쌓여 살짝 걱정이 되긴 했는데, 자기가 더 어쩔 것인가. 3월 말에 부리는 한 겨울 흉내라니. 이미 꺾여버린 기세요, 인정 욕구 가득한 철부지 같은 투정에 불과하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니 진짜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속도도 늦추지 않고 주저함도 없이 쭉 간다.

눈의 양도 많았지만 바람까지 불어 대니, 사실 무시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한 친구는 아이젠을 배낭에 넣었다가 집에 놓고 왔고, 나는 아예 생각지도 않고 그냥 왔다. 일기예보를 꼼꼼히 보고 준비해 온 친구의 것을 나눠 쓰는 친구도 있고 나처럼 없는 대로 그냥 걷는 친구도 있다.

겨울 분위기를 전혀 생각지도 못한 터라 복장도 충분치 않았고, 자칫 무모한 산행이 될지 모를 상황으로까지 느껴졌다. 열심히 걸어 몸에 열을 내는 수밖에.


나는 깍두기로 왔지만 어느새 앞장서서 길을 찾는 길잡이가 되어 있었다. 전쟁통에 피난길에 나서 산길을 헤매는 모습처럼 상상이 될 정도로 나름 처절하다. 그러나 그래도 그래봐야 3월의 눈보라 아닌가. 계속 걷는다. 걷다 보니 이 또한 재미라 할 만하다. 나도 나름 여러 해 산을 다녔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 신기하다.


간혹 친구들은 나를 산에서는 무엇에도 흔들림 없는 별종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거 같다. 과거 동상이 걸렸던 손이 너무 시린데 장갑이 부실해 주머니에 손을 넣고 가면, 여유가 넘친다고 별종으로 본다. 아이젠이 없어서 가까스로 스틱으로 제동을 하며 가고 있는 건데, 아이젠도 없이 잘 걷는다고 별종으로 본다. 아무래도 내가 길을 찾아야 할 거 같아서 눈 쌓인 길을 지도랑 비교하며 미리 서둘러 가는 건데, 지치지도 않고 잘도 간다고 별종으로 본다.

나도 그렇고 자칫 하다 친구 중 누구 하나 지쳐 버린다면 산중에서 너무 힘들어질 것 같아 적당히 휴식도 취하고, 이 순간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즐기려 노력하는데, 또 이걸 친구들은 잘도 맞춰 준다. (긍정적인 친구들 같으니라구)

그리고 정말 이 상황은 그렇게 되었다.


눈은 거의 5센티미터는 쌓여 있고 러셀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길 찾기도 애매한 상황. 그렇게 눈 쌓인 길을 찾아 백운봉을 향하는데, 구름이 움직이는 게 보인다. 그러려니 하고 가는데 눈이 그치고 구름이 아예 걷혀 버려 급기야 파란 하늘을 보여 준다. 안개인지 눈보라인지 전방 시야가 많이 가려졌던 산행을 두어 시간은 한 것 같은데, 갑자기 나타난 파란 하늘과 산 풍경에 다들 환호를 질렀다. 오늘은 못 볼 것 같던 풍경이 나타나니 그렇게 재밌고 즐거울 수가 없다. 이건 어떻게 계획하고 준비한다고 해서 경험할 수 있는 풍경이 아니다. 오로지 지금 이 순간, 바로 이 위치에서만 볼 수 있는, 전혀 재생도 불가하고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그대로 남길 수도 없는 바로 이 순간만이 보고 느낄 수 있는 풍경이다.


그렇다고 그런 거시적 풍경에만 도취해 있기엔 용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눈이 소복이 쌓인 산수유(?) 쯤 되어 보이는 노란 꽃 위에 예쁘게 쌓인 하얀 눈은 묘한 기분을 만들어 준다.

떠나려는 겨울은 다가오는 봄에다 흔적을 남기고 싶었나 보다. 그래봐야 얼마 가지도 못할 흔적을. 앙증맞은 겨울이여. 그 모습이 아름다운지 막 안개 걷히고 드러낸 파란 하늘에 대기하고 있던 햇볕은 그 장면에 환한 조명을 비춘다. 아름답다.

이런 다양한 모습을 난 바다에선 상상할 수가 없다. 어찌 산을 떠나겠는가.


우린 또 걷고 걸어 백운봉 앞의 이름도 기억이 안 나는 전위봉 하나에 올랐다. 걷느라 지치고 비경에 지치고 앙증맞음에도 신경을 쓰다 보니 지치고, 오감은 너무나도 바빴다.

간식과 물을 먹으며 저 앞의 백운봉 뒤편과 백운봉에 가려진 양평 시내 자락이 보인다. 저 앞 백운봉에 가면 얼마나 또 멋진 풍경이 보일 것인가. 또 힘을 내본다.


이제 뒤에 따라오는 친구들의 숨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걸음 속도에 차이가 있어 간격도 벌어진다. 백운봉을 오르는 길은 경사가 만만치 않다. 벌써 눈길 10여 킬로미터를 족히 걸었으니 다리가 무거워지는 건 당연하다. 그렇다고 다른 대안도 없고 그여 백운봉에 올라 멋진 풍경을 보고 같이 내려가는 게 유일한 길이다.


그렇게 우린 밀고 당기고 우린 백운봉에 올랐다. 경치? 말도 마라. 그냥 여기서 이렇게 살고 싶을 만큼 좋다. 양평 전경 그리고 한강 또 하늘과 구름. 산과 또 산. 산은 바로 이 맛이다.


산 맛을 꽉꽉 채워 담고 나니 이제 내려가고 싶어진다. 산천이 유구하면 됐지 사람까지야. 하산은 산이 따라 할 수 없는 것. 더구나 다음을 기약할 기력조차 없다.


하산길은 온갖 걱정과 근심을 산에 두고 와서 그런지 몸이 지친 것에 비하면 마음은 가벼웠다. 길도 운치가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끝이 보이지 않는가.

그 가는 길은 가을과 같았고 그 끝은 다시 봄을 맞은 것과 같았다. 하산하고 주변에 핀 노오란 꽃과 산들바람.

계절은 그렇게 봄으로 시작해 거꾸로 겨울을 맞았고 다시 가을로 왔다가 여름을 건너뛰고 봄으로 왔다. 뒤죽박죽 같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눈 맞고 걸어던 그 길을 생각하면 용문이 우리를 홀린 게 분명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맑은 하늘 아래 양평에서 우린 뒤풀이를 하고 또 매번 하던 대로 집으로 향했다. (악필, 2025.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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