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대리 매바위
2년 만에 매바위 빙벽 등반을 하는 날이다. 지난 신년 첫날 HS형과 가래비에서 빙벽 맛을 보고, H형의 제안으로 덜커덩 잡은 일정이다. 지난겨울 밴프 원정으로 이래저래 빙벽을 못 했는데 그 아쉬움이 남았는지, 지난여름부터 빙벽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조금씩 쌓여 왔더랬다.
다시 산에 다니면서 형들에게는 절대 빙벽은 안 한다고 했었는데, 한 4년 전쯤인가, 형들이 떠 안겨준 바일로 빙벽의 맛을 보게 되어 빙벽화를 사게 되었고, 빙벽화를 써먹어 보려고 얼마 전 또 아이스바일을 사게 되었고, 새로 산 아이스바일을 찍어 보려다 보니 이렇게 또 빙벽에 대한 욕구가 뿜어 나오게 되었는데.. 전문 도박꾼한테 가산이 털리는 과정이랑 어쩐지 비슷한 게 꼭 당한 것만 같다. 자연스럽게. 그러나 어쩌랴.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게 도박이라면 나의 경우는 산인 것을.
전날 계방산을 다녀오고 뻑쩍찌근하게 뒤풀이도 한 뒤라, 오늘 하루 등반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매우 침울한 컨디션이었다. 3일 전 빙벽 장비들을 그대로 차에 뒀었는데, 덕분에 온수와 몇 가지 간식을 챙기기만 하면 되었다.
오늘은 MS형까지 참여해서 두 번째 빙벽 모임에 인원이 50%나 늘어난 셈이 되었다. 남양주에서 짐을 옮겨 싣고 내 차로 용대리로 향한다. 중간에 화양 휴게소에서 나는 국밥으로 해장을 하고 형들은 간단히 떡과 커피로 아침을 때운다.
날은 생각보다 포근해서 빙벽이 녹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했는데, 다행히 얼음은 건재해 보였다. 주차를 하고 HS형이 가져온 쉘터부터 설치한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아 좋아했는데, 우리가 자리를 잡고 나니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었다.
쉘터를 정비하고 등반 준비를 한다. 늘 하던 대로 HS형 선등, 나 빌레이. 이미 웬만한 코스는 다 자일이 깔려 있어 어쩔 수 없이 어디 사이를 비집고 가야 하는 상황. 마침 그때 HS형의 지인이 형을 알아보고 인사를 한다. 연배가 있어 보이는데 경험이 풍부한 산악이 필이 확 났다. HS형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분 팀이 깔아 놓은 자일 옆으로 오르기로 양해를 구한다.
등반 시작. 널찍한 매바위의 오른쪽 중간 부분을 오른다. 힘 좋은 형은 이제 노련미까지 더해져 프로 아이스클라이머가 되었다. 불안함 1도 없이 빌레이를 본다. 안전을 고려하여 요리조리 자일을 깔더니 어느새 등반을 마친다.
다음은 내 차례. 며칠 전 이미 이번 겨울 첫 등반을 한 터라 별로 긴장이 되진 않았다. 한 샷 한 샷, 한발 한발. 찍고 딛고 오르기를 반복하는데 중간쯤 가니 힘에 부친다. 빌레이 보는 동안 언 손이 등반을 해도 잘 녹질 않는다. 곱은 데다 펌핑까지 겹치니 바일을 놓칠 것도 같고 회수하는 스크류를 떨어뜨릴 것도 같고.. 아슬아슬하다. 더구나 바일을 놓치지 않기 위한 안전 끈도 없어서 불안감은 갈수록 더했다. 혹시 스크류를 떨어뜨릴 것 같아 입에 물고 비너를 여닫히도 했다. 그러다 보니 힘이 더 들었다. 지금 생각하니 뭐 하나 안 떨어 뜨린 게 다행이다.
중간중간 휴식도 취하고 숨도 크게 크게 몰아 쉬며 팔의 펌핑을 풀었다. 손의 상태가 썩 좋지도 않고 회수도 쉽진 않았지만, 역시 얼음의 이 손맛과 딛고 일어서는 쾌감은 잊을 수가 없다. 이게 된단 말인가. 올라가진단 말인가. 나 스스로가 뿌듯해지는 순간이다. 찍히는 바일의 짜릿한 느낌이 언 손을 달래는 듯하다.
드디어 등반 완료. 확보를 하고 나서 나는 한동안을 - 10여분은 족히 지난 것 같다 - 아무것도 못하고 언 손을 달래는데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동안 피의 공급을 제대로 못 받았다고 아우성을 지르는 손가락이 게걸스럽게 피를 빨아들이는 것 같다. 맥박 소리에 맞춰 손은 엄청난 통증을 일으키고 나는 그 통증을 고스란히 느끼며 나아지길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서서히 손은 고통과 함께 녹아 갔다.
HS형이 허리에 걸어준 과거 ‘GS형’이 줬다는 두꺼운 슬링으로 안전을 위해 백업 보완을 하고 하산했다.
하산을 하고 났더니 MG형과 PY형이 와 계신다는 전언. 역시 장비를 놓으러 텐트에 가 보니 MG형과 재학생 이 등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원래 MG형 동기분들이 판대로 간다고 했었는데 우리 팀을 따라 다 이쪽으로 오기로 한 모양이다. 판대 얼음 상태가 불안했을 수도 있고. 어쨌든 우리의 인원은 5명이 되었고, 마침 설악산 훈련을 마친 PY형이 형수님과 근방에서 차를 마시고 계신다니 7명까지도 되겠다.
MS형과 재학생은 매바위 빙장의 왼편으로 가 설벽 및 빙벽의 기초훈련을 하러 갔고, 이제 우리의 다음 등반은 MS형. HS형이 빌레이를 봤다. 오랜만이라 힘이 드실 텐데.. 잘 올라가신다. 미처 지퍼를 채우지 못한 상의 파일재킷이 바람에 날리는 것이 엄청 추워 보인다. 근데 정말 바람이 점점 심해지는 게 심상치가 않았다. MS형도 등반 및 하산 완료.
그때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정말 뒤집힌 우리 집(쉘터)을 발견했다. 나는 여기저기 주변을 돌아보며 사진도 찍고 빙벽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며 배회하고 있었는데, 뒤집어지고 바람에 눌려 버린 쉘터를 보고 부랴부랴 뛰어갔다. 바람이 어찌나 부는지 내가 폴대를 잡고 버티는데도 중심을 잡기 힘들 정도였다. 형들까지 합세해 모두 쉘터 복구에 나섰다. 차를 마시고 오신 PY형 부부까지 여기저기 돌을 나르고 끈을 묶고 그 바람 속에서 쉘터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결과는 신통치 못했다. 단단히 팩을 박아 고정한 다른 텐트에 비해 우린 너무 허술했고 내가 붙잡고 버티지 않으면 금방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 바람이 불어오는 쪽에 텐트 밑을 의자로 눌러 지지하기로 했다. 그리고 계속 그렇게 앉아 있기로 하고 텐트 복구는 일단락. 유목민의 삶이 이러했을까. 그 옛날 원시 시대 수렵채집인의 삶이 이러했을까. PY형 말대로 왜 굳이 이런 생고생을 하면서 까지 우린 뭘 하는 걸까. 텐트 안으로 쳐들어 오는 바람 때문에 여기저기 먼지도 많고 텐트 안도 엉망이다.
대충 안정이 된 걸 확인한 HS형은 바람으로 귀가가 서둘러질까 무서웠는지 - 텐트를 버티고 앉아 있는 나를 보더니 - 바로 MS형과 나가 등반을 시작한다. 나는 버티고 컵라면과 빵으로 허기를 채우고.
MS형과 재학생이랑 셋이 앉아 쉬고 있는데 ‘생생정보통신’이라며 나타난 한 여자가 불쑥 카메라를 들이밀며, 자연스레 저 얼음벽에서 뭐 하는 거냐고 인터뷰를 한다. 첨엔 MS형 지인인 줄 알았다. 얼떨결에 MS형과 나는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찍는 맛과 딛고 일어서 오르는 느낌이 좋다고. 그리고 몇 마디 더 물어보더니 춥다고 퇴장.
MS형 동기분들도 들락날락. 식량들도 오고 가고. 나는 여전히 텐트를 붙잡고 앉아 있고. 대충 분위기는 이랬다.
어쨌든 그 뒤로 HS형은 연맹 선배와 왼쪽의 고난도 구간을 하러 가고 나는 재학생 훈련을 위해 나갔다. 첫 빙벽임에도 곧잘 하는 것이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절반 정도를 오르고 하강.
날은 벌써 3시 무렵. 마지막으로 내가 회수하기로 하고 등반을 시작했다. 초반을 지나 고드름이 모여 있는 직벽을 오르려고 했는데, 그만 믿었던 얼음이 터져 오른쪽 바일을 떨어뜨렸다. 어쩔 수 없이 바닥까지 하강. 다시 등반. 이제는 바람도 잦아들었는지 추위도 덜했다. 몸에 열도 나고. 대신 3번째 등반이니 힘에 부치긴 했다. 하강을 위해 나무밑 카라비너를 통과시키고 나무에 자일을 걸었다. 얼음이 있어 유통엔 문제없어 보였다. 하강. 모든 등반이 끝났다.
좌충우돌하던 텐트 안은 이제 조용해졌다. 남은 라면까지 끓여 먹고 철수. 하루가 그냥 꽉 차버렸다. 하, 이거 얼음 재미있네. 또 올 거 같다.
귀경길은 원활했다. 덕소 근방의 해장국 맛집도 발굴하며 해피엔딩 마무리. 짧은 겨울 한 번이라도 더 하려면 참 바쁘게 생겼다. 겨울이 이렇게 설레기도 오랜만이다. (악필, 2026.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