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로 단단해진 시간

외롭던 강릉의 첫날이 결국 나를 성장시키다

by 이국영

“다시 부천 가고 싶어.”

공중전화박스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오늘도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리되는 대로 갈 거니깐 조금만 참고, 학교 잘 다니고 있어.”


98년 IMF가 전국을 강타하기 전, 수도권은 몇 년 전부터 경제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30년 넘게 중소기업에 몸담아 온 아빠는 사장도 손 놓아버린 회사를 끝까지 붙들고 비티다, 결국 자신의 퇴직금마저 직원들 월급으로 내어주고 무일푼으로 회사를 그만두셨다.


금의환양을 꿈꾸던 부모님은 가진 것 하나 없는 현실 앞에서 고향으로 내려가는 걸 망설이셨다. 아직 학생이었던 나와 동생을 위해, 결국 조카가 교직 생활을 하고 있던 강릉으로 이사를 결정하셨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전학을 한다는 건 하늘의 별따기였다. 여고 전학이 가능할 거라는 사촌오빠의 말과는 달리 상황은 쉽지 않았고, 결국 남녀공학 고등학교로 전학이 확정되었다. 부모님보다 먼저 강릉에 와서 오빠 집에 얹혀 지내며 시작된 나의 ‘첫 독립’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갑작스러운 친구들과의 이별, 내가 살던 아파트 상가단지보다 작은 시내, 북한말처럼 들리던 사투리를 쓰는 아이들과 선생님들까지 모든 것이 낯설었다. 사촌오빠는 여고 교사였기에 남녀공학 전학 소식에 난감해했고, 나는 버스를 타고 오가며 온전히 혼자가 되었다.


첫 등교날, 교복을 단정히 입고 들어서자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너 어디서 왔나?” “그거 메이커나?” 알아듣지 힘든 말들이 쏟아졌고, 수업시간 토박이 선생님의 말은 외계어처럼 들렸다. 바뀐 교과과정까지 겹쳐 수업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게다가 오빠네 부부는 사이가 좋지 않아 다툼이 잦았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몇 정거장 전에 내려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며 집에 들어가곤 했다. 휴대폰도, 삐삐도 없던 시절, 친구들에게 전화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공중전화뿐이었따. 집으로 향하는 길목, 낡은 전화박스 안에서 매일 울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몇 달 뒤 부모님과 동생도 강릉으로 이사하며 비로소 가족이 함께 모였다. 텃세가 심해 외지인이 쉽게 정착하기 어려운 강릉이었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기대며 3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왔다.


이제는 누가 보아도 강릉 사람 다 된 우리 가족. 그 시절 매일 울던 공중전화박스는 사라졌지만,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그 외로움의 기억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외로움 덕분에 지금 나는 어디에 있든 내 삶을 지탱할 힘을 찾게 되었다. 외롭던 강릉의 첫날들은, 결국 나를 단단하게 키워낸 시작이었다. 그 모든 낯설음과 눈물이 결국 오늘의 우리를 만든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화면 캡처 2025-09-19 190612.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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