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 부모도 자라나는 중입니다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커피숍 창가에서 바라보는 새파란 하늘과 따뜻한 커피 한잔은 언제나 나에게 작은 쉼을 준다. 좋아하는 나태주 시인의 책을 펼치다, 한 문장에 마음이 머물렀다. “소년이여, 네가 이루고 싶은 조그만 꿈을 가져라. 보다 구체적인 꿈을 가져라. 그리고 그 꿈을 끝내 꼭 이루도록 하라.”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대학입시를 앞둔 아들의 일상이 떠올랐다.
“엄마 나 너무 설레.” 짐을 싸면서 한껏 들뜬 표정을 짓는 아이를 보자, 매일 땀 흘리며 운동하고 공부하던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국가대표를 꿈꾸며 태권도 선수로 뛰던 아이가 부상으로 운동을 그만두었을 때, 절망하는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굳게 닫힌 방문 앞에서 그저 눈물을 삼키며, 스스로 잘 이겨내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코로나와 사춘기, 그리고 부상의 아픔까지, 모든 것이 아이를 깊은 수렁으로 끌어내렸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조용히 말했다. “엄마 나 공부할래.”
그 한마디가 얼마나 벅차던지. 그때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믿고, 묵묵히 아이 곁을 지켜주는 것뿐이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던 아이의 고단함을 너무 잘 알았기에, 잠든 아이를 보며 수없이 눈물을 삼켰다. 그 시간들이 우리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조금 더 일찍 시작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입버릇처럼 말하던 아이는, 어느새 주어진 현실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 역시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믿고 바라보았다.
여섯 개의 수시 전형을 고를 때는 아이보다 내가 더 떨렸고, 아쉬운 선택을 할 때에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아이의 선택을 존중했다.
“형준아 괜찮아. 늘 하던 대로만 하면 분명 좋은 결과 있을 거야.”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엄마가 한번 안아봐도 돼?” 까치발을 들고 아이를 힘껏 안아주었다.
어느새 아이는 몸도 마음도 건강한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일본 메이지 유신 시대, 클라크 박사가 젊은이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소년이여, 대망을 가져라.” 한때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내 욕심을 아이의 미래 속에 억지로 꿰맞추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것이 얼마나 불편한 말이었는지를.
부모는 아이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끝없는 부모의 욕심으로 아이의 인생을 재단하기보다, 아이가 이루고 싶은 조그만 꿈을 끝내 이루어낼 수 있도록 믿고 기다려주는 것.
그것이 진짜 부모의 역할임을, 열아홉 살 아이와의 어느 날 문득 깨닫는다.
“엄마는 언제나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해. 사랑한다. 사랑한다.”
아이가 자라나는 동안, 나도 함께 어른이 되어간다. 그 아이의 눈빛에 나의 지난 시간이 비치고, 나의 품 안에서 그 아이의 미래가 자란다. 우리는 서로의 거울이 되어, 함께 자라나는 중이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결국 나를 다시 키우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