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여행 이전의 세계
고등학생의 나는 등하굣길에 세계사 연대기를 빠짐없이 외웠고, 쉬는 시간에는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를 풀었다. 급식줄을 설 때에는 수첩에 옮겨 적은 도저히 외워지지 않는 영단어를 외웠다. 일주일 중 쉬는 날은 없었다. 친구들은 나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때 나는 유일했고 강력했던 목표를 되뇌었다.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자. 그러나, 그 목표는 내부에서 고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고등학교에서의 기억은 대개 흐릿하게 남았으나, 이 날만큼은 여전히 기억 속에서 선명한 영상으로 재생된다. 학교에서 야간학습을 하던 중이었다. 겨울로 진입하던 시기와 기말고사를 2주 앞둔 시기가 맞물려 교실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상대평가로 등급을 나누는 평가방식에서 나는 저번에 소수점 차이로 등급이 내려간 적이 있어, 세계사의 단 하나의 사건도 놓치지 않도록 교과서의 글자 하나하나를 주의하며 읽어가던 중이었다. 공부를 시작한지 30분 정도 지났을까, 조금씩 머리가 아파오더니 히터의 웅웅대는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귀 속에 조그마한 블랙홀이라도 생긴듯, 조금씩 차근차근 주위의 모든 소음-헛기침, 연필의 사각임, 발걸음, 창밖의 뭉툭한 경적, 복도 밖의 수런거림-이 지각되기 시작했다. 더 이상 교과서의 다음 문장으로 넘어갈 수 없었다. 이 날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1년 반 뒤, 처음으로 야간학습을 다 마치지 못하고 하교하던 날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일반인을 위해 열어둔 대학 도서관에 들어갔다. 다시 한번 세계사 교과서를 펼쳤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고 구토감이 올라왔으며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마찬가지였다. 모든 소음이 얽히고 설켜 머릿속을 쾅쾅 내리쳤다. 나의 의식 속은 얽힌 실타래같은 소음이 들어차 도저히 글자를 읽어내려갈 수 없었다. 스스로가 통제되지 않는다는 괴로움에, 처음으로 야간학습을 끝마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어쩌면 앞으로는 제대로 공부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초조함에 처음으로 울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신경증이 생겼다. 소리가 들리기만 해도 불안감에 심장이 빠르게 뛰고,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에는 다시 들릴 소리가 두려워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렇게 글자만 겉핥으며 공부하는 척 하며 스스로를 속였다. 그러지 않으면 불안감에 시달릴 것이었다. 일년 후 나는 상담을 받으러 갔다. 상담 선생님은 나의 말을 다 듣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이로제에요’라고 말했다.
프로이트는 의식과 무의식의 불일치는 신경증으로 드러나고 해소된다고 말했다. 이 말은 타당하게 들린다. 어떤 무의식이 드러나지 못한 채로 고장을 일으키고 있었을까? 매일같이 나의 심장을 빠르게 뛰게 했던 이 신경증의 원인을 드러내는 것은 2년이 걸렸다. 나는 “공부하기 싫다”는 무의식의 외침을 계속해서 무시해 왔던 것이었다. 이 단순한 외침을 의식으로 끌어올리지 못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고강도의 공부에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있었음에도 공부를 그만둘 수 없었다. 그만두는 방법을, 또 그만둬도 되는지를 몰랐다. 고등학교 때의 하루하루는 마치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기관차가 자신의 고장을 인식하지 못하고 덜컹거리며 아슬하게 질주하는 것 같았다.
타성에 젖은 목표에만 의지해 살아오고 있었다. 나의 모든 시간들은 오로지 대학 입시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소진되었다. 그 목표를 달성하고 나니, 풀려난 나의 시간들은 어디로 흘러야하는지 알지 못한 채 제자리를 빙글빙글 맴돌았다. 나를 가장 두렵게 했던 것은 지금까지 내가 해온 모든 생각들이 나도 모르는 힘에 의해 끌려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나는 온전히 내가 아니었다. 진정한 삶의 목적을 찾고 싶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들이 비로소 흘러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