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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 Nov 14. 2024

쌓여왔던 경계를 허물기 위하여

II. 여행 중의 산책


 섬의 낯섦보다는 익숙함이 커지던 무렵이었다. 룸메이트는 기숙사에 오늘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다고 일러주었다. 아침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 공용 거실로 나오니 오뚝한 코와 청명한 눈을 가진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기숙사는 수시로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기 때문에 여느 때와 다름없이 “Where are you from?"  "Why did you come here?"을 주고받았다. 그는 자신이 살던 나라에서 쉴 새 없이 일했다고 했다. 코로나의 이전과 이후 그의 삶에는 큰 변화가 없을 정도로, 그는 일에 몰두해 있었다. 자유의 감각을 되살리고자 이곳에 왔다고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숨 막힘을 달고 사나 보다, 나만 답답한 게 아니구나. 나는 나의 경계 바깥에 놓인 것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누구나 그렇듯 직접 경험하고 느껴보았던 것만을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여전히 “난 널 이해해”라는 말을 잘하지 못하고, 아무래도 앞으로도 잘 말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가 경험하고 느낀 깊이 속에서 그저 상상력을 발휘할 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더 정확하게 상상할 수 있도록 더 독서하고 더 대화하며 더 상상해 볼 뿐이다. 나의 경계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기 위해 끙끙대던 때였으니 다른 사람의 경계를 보려고 생각할 수도 없던 때였다. 다른 사람의 경계 안을 얼핏 엿본 느낌이 오묘하게 느껴졌다.

 짧은 대화였으나 의례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의 눈빛은 기억한다. 선한 인상과 차분한 말투에서는 자신감이 새어 나왔다. 자신감이 들어있던 눈빛은 그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 눈빛을 질투하고 있었을 것 같다. 질투는 나에게 없는 것을 향하기 때문이다.

 간단한 아침을 먹고 나는 노트북 충전기를 사야 했기에 밖으로 나섰다. 인구 40만의 작은 섬나라에서 중국산 중저가형 노트북 충전기를 구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들어갔던 마트에서 충전기를 번번이 구하지 못했던 나는 몰타에서 가장 큰 전자제품 몰에 가기로 마음먹어야만 했다. 버스를 두 번 환승해야 하고, 한 시간은 걸어야 하는 곳이었다. 택시를 탈 만큼 여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별로 어렵지는 않을 것이었다. 혼자가 익숙했고, 이제는 혼자 하는 것에 자신감이 조금 생겨있었다. 새로 온 그가 말했다.

“내가 같이 가줄게. 멀지 않아?”

 그의 스스럼없는 호의에 적잖이 놀라며 나는 거절했다. 혼자가 익숙했다. 나는 먼저 터널을 가로질렀다. 매섭게 달리는 차들의 소리는 터널에서 증폭되어 굉음이 되었다. 인도의 폭은 다섯 뼘 남짓하여 차가 내 옆을 지나갈 때마다 몸이 붕 뜨는 진동이 느껴졌다. 300미터의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심장은 몇 번이나 내려앉았다. 숨을 고르며 터널 밖으로 나오니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나왔다. 인도가 없었다. 다리를 건너는 내내 차에 치이는 고통을 상상했고, 몸이 산산조각 나는 것 같았다. 쏟아지는 여름 햇볕 아래에서 30분 정도 걸으니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안도감과 함께 서러움이 몰려왔다.  

 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버스의 차창을 스치는 모래 빛 건물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혼자서도 충만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혼자서의 시간은 장벽을 쌓고 있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1년 동안 작은 방에서 늘 혼자 지냈기 때문일까, 내가 나에게만 몰두해 왔기 때문일까.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두꺼운 경계가 생겨있었다. 그 경계가 생겼다는 사실도 모른 채 경계는 조금씩 두껴워져갔다. 낯선 세상과 홀로 맞서는 외로움과 두려움이 이날 정체를 드러냈다. 그 경계를 허물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어떻게 파괴할 수 있나?.

 노트북 충전기를 구하고 매장에서 나왔을 , 무더운 날씨에 발열된 핸드폰은 결국 꺼져버렸다. 그러나  길들은 뇌리에 선명히 박혀있어 숙소로 돌아올  있었다. 해는 어느새  있었고 터널은 캄캄했다.  어둠과 굉음 속에서 목놓아 울었다. 외로웠고 두려웠다. 숙소에 들어가니,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마치 경계가 옅어진 사람 같았고, 주위는 따뜻해 보였다.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무엇부터 물어봐야 하나? 나는 방으로 돌아가 누웠다. 쌓여왔던 외로움과 두려움이 무턱대고 정체를 드러내던 그날, 그가 건넨 막역한 호의만이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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