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엘 엔데 <모모>를 읽고 상담자로서 경청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미하엘 엔데의 <모모>를 처음 읽었고 그 책은 내 인생 책이 되었다.
그리고 25년 1월 <모모>를 다시 읽으며, 내가 상담가의 길을 걷게된 계기를 다시금 찾았다.
주인공 모모가 살고 있는 원형극장에 찾아온 친구들의 이야기를
모모가 가만히 무심코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마을 사람들의 고민이 해결되는 마법같은 능력은 경청의 힘을 나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모모는 그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전에 그 아이 없이 어떻게 지낼 수 있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이 작은 소녀가 그들 곁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소녀는 더욱더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모모의 집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모모 곁에는 언제나 누군가가 앉아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직 모모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튼 모모에게 가 보게!" 이 말은 인근 마을 사람들이 으레 하는 일상어가 되어 버렸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모모가 누구에게나 좋은 충고를 해 줄 수 있을 만큼 똑똑하기 때문에?
위로를 받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꼭 맞는 말을 해 줄 수 있기 때문에?
현명하고 공정한 판단을 내릴줄 알았기 때문에?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모모가 마술을 부릴 줄 알았던 것은 아닐까? 모든 근심과 어려움을 잊게 해 주는 비밀스러운 주문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손금을 보는 재주가 있거나, 아니면 앞날을 내다보는 그 비슷한 어떤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꼬마 모모는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 주는 재주였다.
진정으로 귀를 기울여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 줄 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모모는 어리석은 사람이 갑자기 아주 사려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끔 귀기울여 들을 줄 알았다. 상대방이 그런 생각을 하게끔 무슨 말이나 질문을 해서가 아니었다.
모모는 가만히 앉아서 따뜻한 관심을 갖고 온 마음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말을 하는 중에 벌써 어느새 자기가 근본적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와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렇기에 나는 나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소중한 존재다.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모모는 그렇게 귀기울여 들을 줄 알았다.
모모의 진심으로 경청하는 능력은 상담자에게 가장 중요한 역량이지 않을까 싶다.
나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성인이 되면서 여러차례 <모모>를 읽으며,
모모와 같은 사람이 되고싶다는 생각을 은연중에도 그리고 의식적으로도 많이 했었다.
모모는 경청하고 귀기울여 들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모모를 찾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고는 한다. 모모는 그저 들을 뿐이다. 하지만 마음을 쏟아 듣고 상대방에게 눈을 맞춘다.
학교 위클래스에서 근무하며 많은 학생들이 찾아오곤 한다.
나는 그들에게 모모와 같은 역할을 해야하는 사람이다. 상담교사로서 학생들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으며 나 또한 그러한 의지와 소망이 있다.
5번도 넘게 읽은 <모모>를 다시 읽으며 반성한 점은, 나는 경청의 힘을 믿으면서도 실천하지 못하고 있었군.
3년을 채우고 매너리즘과 무기력에 빠져 경청하지 못하고 학생들의 말을 흘려넘기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섣부른 해결책을 제시하기에만 급급해서 내담자의 감정을 읽어주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내일은 길다면 긴 겨울방학을 마치고 오랜만에 학교로 출근하는 날이다.
분명, 3주 간의 휴식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한 몇몇 학생들이 학교 복도를 헤메이고 있겠지.
그렇다면 학교의 누군가가 이렇게 외쳐주길 "아무튼, 위클래스에 가보게!"
나는 마을 한구석의 원형극장에서 누군가에게 귀기울일 준비가 되어있는 주인공 모모처럼,
위클래스에서 학생들의 마음을 읽기 위해 눈을 맞추고 경청할 준비를 하는 상담교사로 자리하고 있을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