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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민 Aug 22. 2022

포용력 있는 사람이 되세요.

  제가 만약 20대로 돌아가서 저에게 딱 하나의 메세지만 전할 수 있다면, 저는 이렇게 말할 거에요.

  "포용력이 있는 사람이 되렴. 모든 것에게 말이야. 그게 너를 많이 성장하게 할거야."


  제가 생각하는 포용력은 일종의 '여유'에요. 내가 나를 충분히 돌보고 사랑한다면 비로소 다른 사람을 안아줄 여유가 생기니까요. 저는 마음이 참 좁고 가난한 사람이었거든요. 질투도 많고 참 부정적이었지요. 실제로 가진 게 적지 않았음에도 감사하는 마음보단 더 가지고 싶은 마음뿐이었어요. 그러면서도 그 사실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어요. 저는 제가 똑똑하다고 가치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어요. 마음이 너무나도 허하고 가난해서, 그렇게라도 가치를 증명해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갑옷같은 자존심을 몸에 두른 채 살았지요. 저는 포용력 있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내게 일어나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요.


  그랬던 제가 좀 더 열린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은 어떤 깨달음 덕분이에요. 바로 '모든 것에는 장점과 단점이 함께 존재한다. 그러니 좋아보이는 일도 마냥 좋지만은 않고, 나빠보이는 일도 마냥 나쁘지만은 않다'는 깨달음이지요. 그걸 깨닫고 나니 저에게 주어진 것들에게 감사할 줄 알게 되었어요.


  저는 배낭여행을 혼자서 한 달간 다닌 적이 있었어요. 그 한달간 참 많은 일이 있었고 고생도 정말 많이 했어요. 하루가 멀다하고 사건 사고가 터졌거든요. 한 달이 참 길었지만 그 중에서도 두 번째 도시였던 파리에서의 기억이 가장 커요. 파리에서의 첫 날은 휴대폰이 먹통이 되어서 와이파이조차 잡히지 않아 큰 고생끝에 숙소에 들어갈 수 있었고, 둘쨋 날은 소매치기를 당할 뻔했고, 셋째 날은 지나가던 남자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키득거리는 불쾌한 경험을 했었어요. 그런가하면 넷째 날은 지하철 전체가 예정 없던 파업에 이르러서 자칫 숙소에 돌아가지 못할 뻔한 경험을 하기도 했지요. 파란만장한 그 도시에서의 마지막 날은 하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 오르는 시위 현장을 목격하는 것으로 끝이 났답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어마어마했어요. 당시에는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겼나 괴롭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했어요. 직장까지 그만두고 여행을 온 내 선택을 후회하기도 했었고요. 그렇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요. 그 때의 경험은 어디에서도 해볼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이었고 극복하고 이겨내는 과정에서 제가 훨씬 더 단단해졌기 때문이지요. 한 달간의 여행을 모두 마친 다음에 친구들이 '어디가 제일 좋았냐'고 물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파리'였어요. 제가 더없이 단단해지고 성장한 경험이 있었던 도시였기 때문이지요. 힘들었던 일들도 지나보니 별거 아니더라고요.


  여행을 가는 건 참 낭만적이고 멋지게 느껴지지만, 막상 떠나보면 고생스런 순간을 맞이하기도 해요. 그러나 그 고생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요. 그런 경험을 하다보니 모든 일은 다 장단점이 따라오는구나 싶었어요.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지요. 이걸 깨닫고 나면 더이상 나빠보이는 일이 마냥 나쁘지만도 않구나 싶어져요. 무서운 일에 처하더라도 이 이면에는 어떤 선물이 숨겨져있을까 설레기도 하지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아. 뭐 그럴수도 있지. 이런 말들을 자주 하게 되었어요. 누군가의 말도 어떠한 사건도 한발짝 떨어져서 '그럴 수 있지.'하고 생각하다 보면 조금 더 차분하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아요. 


  나이를 먹을수록 포용력의 힘을 점점 느껴요. 포용적인 사람은 함께 있으면 참 편안해요. 가시를 세우고 있는 고슴도치도 무장해제시키는 편안한 매력이 있지요. 그래서 포용적인 사람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많답니다. 그 뿐이 아니에요. 모든 것에 포용적인 자세는 새로운 기회를 많이 가져다줍니다. 생각해보면 저에게도 적지않은 기회가 찾아왔었는데요. 제가 꽉 닫힌 자세를 고수하면서 놓친 기회가 많았어요. '그건 안될거야.', '내가 무슨!' 하고 말하면서 저에게 온 기회를 멀리 차버리곤 했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참... 왜 그랬을까 싶은데, 그 땐 그게 '분명한 의사와 똑부러지는 자세'라고 생각했어요. 좀 더 열린 마음으로 '그럴 수 있겠다'하고 받아들였다면 더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돌이켜보면 20대에는 굉장히 다양한 일에 분노하고 슬퍼하고 기뻐했었어요. 물론 그런 것들도 젊은 혈기로 겪을 수 있는 귀한 일들이긴 하지만 부정적인 일들에 너무 몰입했던 건 좀 아쉬워요. 그렇게 예민하게 굴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싶고요. 친구의 실수도 연인의 실수도 지금 생각하면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었는데 왜 그리 많은 에너지를 쏟으며 지쳐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별 것 아니었는데 싶거든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나 속상할 때, 마음이 힘들 때 이렇게 말해보세요. 

  "그럴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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