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었다. 여전히 모든게 좋았다.
언젠간 내 이름으로 된 책을 쓰리라는 목표도 까맣게 잊을 만큼.
남들은 이렇게 사는거구나 싶었다.
편안하고, 안락한 근무환경.
나는 그럭저럭 구성원들과 잘 지냈고, 환자들을 마주할 때도 즐거웠다. 작지만 능력을 펼쳐보일 땐 뿌듯하기까지 했다.
아, 나는 드디어 내 자리를 찾았구나.
하지만 항상 인생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법이다.
나는 내가 적응을 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외부적으로 여러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 컴플레인이 쏟아졌다. 인력이 부족하여 업무 부담이 커지자 퇴사율도 증가했다.
이 과정에서 하나의 패턴을 발견했다.
외부적으로 문제가 발생한다. 약간의 소란이 일어난다. 그러면 수습한다. 그 이후, 짧은 평화의 시간이 찾아온다.
이 패턴이 몇 번 반복되었다. 그러면 구성원들도 힘들어하기 시작한다. 퇴사를 고민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러면 퇴사를 하거나, 하지않고 버텨본다. 그러다 보면 이 위기가 지나간다. 또 다시 평화의 시간이 찾아온다.
동일한 패턴이 반복되었다. 번아웃의 빈도도 잦아졌다. 외부적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받아들이고 다니거나, 혹은 받아들이지 않고 나가거나.
병원의 변화를 만들거나, 혹은 내 마음의 변화를 만들거나.
문제를 인식하자 굉장히 답답해졌다. 나는 어떤 문제를 발견하면 그걸 해결해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이직을 해야하나?’
그건 답이 아닌 듯 보였다. 다른 병원도 상황이 비슷하거나, 또 다른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이곳은 일도 사람도 익숙한데, 이걸 버리고 새로운 병원을 한다 한들 힘든 순간은 다시 찾아올 것이 확실했다.
‘그럼 참아야 하나?’
선배 간호사들에게 조언을 구하면 대부분은 그냥 참고 넘기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각자의 선택이지만 다른 곳에 가도 똑같을 거라고. 참으면 참아진다고. 어느정도 동의하는 부분이다. 실제로도 참으면 참아졌으니까. 하지만 계속해서 주기적으로 퇴사 욕구가 드는 것을 보면 그것도 답이 아닌듯 보였다. 이 주기는 조금씩 더 빨라졌다.
그 전에 퇴사하고 힘들었던 경험을 떠올리면, 그냥 지금 여기서 참고 잘 다녀줬으면 싶기도 했다. 왜 남들은 참고 다니는걸 나는 이렇게 고민하고 불만스러운가 싶기도. 벌어진 문제를 해결하지도 덮어두지도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나는 점점 생기를 잃는 듯 했다. 사는게 재미가 없었다. 일은 잘 해낼 수 있지만, 즐겁지 않았다. 병원은 늘 그렇듯 바쁘게 돌아갔고, 매일 새로운 이슈가 생겼고, 메뉴얼대로 처리했다. 삶이 너무 무료했다.
“일이 재미가 없어요. 너무 즐거웠고 잘 해왔는데, 이제 재미가 없어요. 다들 어떤 재미로 사는걸까요? 일은 재미로 하는게 아니라는거 알아요. 저연차인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게, 너무 건방지고 배부른 소리처럼 들릴 수 있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정말로 모르겠어요, 선생님…”
부서장과 상담을 했다. 팀장님은 자기도 그런 적이 있다고, 모두 한번쯤 지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어쩌든지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고도.
당시 내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 임시방편으로 사용하던 방식은 혼자 여행을 떠나는 것이었다. 처음엔 언어도 모르고 길도 모르는 낯선 곳에 나를 떨어뜨려 문제를 해결하는 게 즐거웠다. 불가능하거나 어려울 것이라고 여겼던 문제를 하나씩 풀어가고 해결하고, 익숙해지는 내 모습이 좋았다. 같은 도시를 여러번 방문하니 이제 더이상 낯설지 않았다. 그 감각이 좋았다. 낯선 일이 더이상 어렵지 않게 느껴지는 감각. 내가 할 수 있는 범위가 늘어나는 감각. 성장하는 즐거움이었다.
나는 나의 현실에서도 못했던 걸 해내고 싶어졌다. 마음 한 켠에 두었던 꿈을 꺼내보았다.
내 이야기를 담은 책을 쓰고 싶어.
나도 내 일을 하고 싶어. 직장에 소속되지 않고 말이야.
조금 더 즐거운 일을 하고 싶어. 살아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일 말이야.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하지만 어떻게? 그만둔다고 다 돼?’
당장은 안되겠지 물론… 하지만 될 수 있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불가능해보이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왜 그게 안된다고 생각해? 된다고 생각하고 방법을 찾아봐!
‘아니…. 좋아. 좋아하는 일 하고싶다고 했지? 그럼 좋아하는 일이 뭔데? 그걸로 어떻게 돈을 벌건데?’
그건 아직 모르겠어. 난 뭔가를 만드는걸 좋아하고, 여행가는 것도 좋아해. 내가 조금씩 성장하는 것도 좋아. 외국어 하는 것도 좋고. 글 쓰는 것도 좋아해.
‘그걸 업으로 삼을 정도로 좋아해?’
글쎄… 그건 잘 모르겠어.
‘좋아. 그만두고 네가 좋아하는 거 하고 싶으면, 업으로 삼을 수 있을만큼 좋아하는 일을 찾아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