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유럽여행은 아주 꿈같은 일이었다. 음,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 달' 유럽여행이나, '서유럽 일주'같은,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유럽여행 말이다. 모두들 가는 대학생 때 다녀왔더라면 참 좋았을텐데... 그 당시엔 해외여행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내가 여행에 눈을 뜬 건 모 대학병원에 신규 간호사로 취업한 후 3개월만에 뛰쳐나온 뒤였기 때문이다. 첫 직장에서의 경험이 어찌나 자존감을 뚝뚝 떨어뜨리던지, 자책과 우울을 벗어나는 데 한 달이 걸렸다. 나는 뭘 해도 안되는 것 같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깊은 수렁에서 간신히 고개를 내밀게 된 날, 나는 버킷리스트였던 '디즈니랜드 가기'를 실행하기 위해 홍콩행을 결심했다. 그토록 아득하고 멀게 느껴졌던 꿈이 비행기 표와 디즈니랜드 티켓을 끊는 순간 현실이 되었다.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것'을 실제로 해보며 얻는 쾌감은 상당했다. '난 안될거야.'나 '내가 그걸 어떻게 해?'하고 생각했던 일들을 하나 둘씩 해보면서 자신감과 행복감이 차올랐다.
그렇게 여행 경력이 점점 쌓였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나 자신감이 떨어질 때마다 여행을 갔다. 갈수록 조금씩 더 '나에게 멀게 느껴지는 여행'을 도전했다. 친구나 동생과 함께 가던 여행이 '혼자 여행 가기'로 업그레이드 되기도 했고, 일본처럼 '가까운 나라'에서 필리핀처럼 '거리가 먼 나라'로 가보기도 했다. '최대한 많은 것을 하는 여행'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행'까지. 그런 나에게 좀처럼 이룰 수 없는 가장 먼 곳에 있는 도전이 바로 '유럽여행', 그리고 '한 달간의 유럽여행'이었다.
그런 내가 유럽여행을 결심하게 된 것은 바로 '결혼' 때문이었다. 당시 만나고 있던 남자친구와 결혼 문제를 상의하며 '하고 싶은 일을 아직 다 못해서 결혼이 망설여진다'고 했더니 '그럼 하고싶은 일을 지금부터 빨리 하는게 좋겠다'는 현답을 주었기 때문이다. 나의 오랜 버킷리스트에 시간 제한이 걸린 상태라고 할까?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버킷리스트는 시간 제한이 걸리자 비로소 현실에 가까워졌다. 결혼을 하면 아무래도 유럽여행을 한 달씩 다녀오기는 어려울테니. 반드시 결혼전에 여행을 다녀와야 했다. 하지만 원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질 순 없었고, 우선순위와 기회비용을 두고 오랜 시간 고민해야다.
결론만 이야기 하자면 나는 결혼전에 유럽여행을 갈 수 없었다. 2년간 몸담은 나의 두번째 직장을 퇴사하고 여행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직장에서 만족했던 나는 결혼, 임신 그리고 출산후 복직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후 한 달 휴직까지 고려해보았지만 이야기가 잘 되지 않았다. 그렇게 결혼을 했고 신혼여행을 영국과 체코로 다녀왔다. 가고 싶은 곳은 많고 시간은 짧았다. 신혼여행을 기점으로 언젠가는 꼭 다시 오리라 마음을 먹게 되었다.
결심의 순간은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결혼 1주년이 가까워지고 상황이 안정되자 슬슬 아기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가 생기고 나면 한동안 온 전력을 아기에게 쏟아야할테니 그 전까지 여행을 꼭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 직장에서의 육아휴직 기회도 고려했지만 아무래도 이번이 나의 버킷리스트를 위한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퇴사로 인한 기회비용은 아쉽지만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여행을 떠나기로. 그토록 꿈꾸던 유럽으로!